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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그릇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8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병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5월
평점 :
플랫폼에 선다. 기차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나는 철길을 내려다본다. 거기 시체가 놓여 있다는 걸 나는 아까부터 알고 있었다. 얼굴이 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피에 젖어 그냥 빨간 덩어리다. 조만간 역무원들이 발견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내가 탈 기차가 떠나려면 아직 1시간 30분이 남았다. 나는 플랫폼에 쓸쓸히 놓여 있는 낡은 나무벤치에 느슨히 기대어 앉는다. 몸의 긴장을 풀면 여러 가지 상상을 하기에 편리하다. 거기에 새벽산들바람이 불어오니 나는 더 바랄 게 없다.
저 시체는 사고사일까, 자살일까, 살인사건일까. 살인사건이 재밌겠다. 그러면 나는 피해자자가 될까, 살인자가 될까, 아니면 형사가 될까. 음...그건 경우에 따라 그때그때 선택하자.
지금은 피해자다. 나는 당황하고 있다. 왜 나는 여기 죽어 누워 있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훼손시킬 만큼 난 원한을 산 걸까? 나는 당황하고 있다. 영문을 모르겠다. 나름 착하고 선량하고 항상 남을 도우며 살았는데, 도대체 왜?
이 의문은 형사가 풀어 줘야 한다. 형사도 참혹한 시체를 보고 원한관계를 의심하고 그가 일했던 곳과 살았던 곳을 찾아다니며 조사를 하겠지. 피해자의 직업은 뭘로 하면 좋을까...그래. 남을 많이 도울 수 있는 경찰로 하자. 그런데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이 경찰은 보기 드물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게 드러나고. 잠깐. 그럼 어떻게 살인동기를 만들지? 그래. 범인은 과거가 있는 인물인거야. 피해자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하면 되겠군.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지우고 싶은 과거라면? 하하하 좋은데, 이런 반전 설정.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너무 단순해지나?
그럼 여기서 살인자 동향이 나와 볼까. 얘는 이제 초조하겠지? 치밀한 계획살인은 아니니까. 우발적인 살인이었으니 피 묻은 옷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그래. 여기서 여자가 관계되는 것이 정석이지. 그것도 여러 명의 여자를 등장시켜 어떤 여자가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를 조금씩 숨겨 가며 교차시키는 거지. 아, 난 천재인가봐. 여러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면 여러 명의 남자들도 필요하겠군. 치기 어린 살인이란 역시 젊은이들이 적격이야. 그것도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이 좋겠어. 예술 하는 남자들이라면 폼도 나고 좋겠군. 여자들은 하나같이 이들을 너무 사랑하는 거지. 이들을 잘만 움직이면 꽤 복잡해 지겠어.
그러면 형사는 이것을 어떻게 풀어 나가게 해야 하나? 역시 묵묵히 집요하게 사건을 쫓는 캐릭터가 있어야지. 그를 존경하는 후배 형사도 하나 붙여 주자. 형사는 성실하게 사건을 쫓지만...음...그것만으로는 절대 사건을 풀 수 없지. 단서가 나오기 위한 자연스런 우연들이 필요해. 어쩔 수 없지. 형사의 감이란 필연적인 거야. 그 찰나의 번득임이 매력적인 거지. 사소하고 시시해 보이는 일상의 편린들이 그의 통찰력으로 중요한 단서들이 된다면 아무리 우연이 많더라도 독자를 이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깨달음의 순간이 미스터리물의 카타르시스 아니겠어?
차근차근 조여 오는 수사에 살인자가 가만히 있으면 그건 절대 미스터리라 할 수 없다! 기껏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살인이 하나면 일어나면 뭔 재미냐구. 역시 제 이, 제 삼의 살인이 일어나야 옮지. 미스터리에 연이은 살인은 진리다! 하지만 범인은 한 사람이어야 해. 가만있자...그렇다면 뒤이은 살인들은 요란하기 보다는 마치 자연스런 일인 것처럼 보이는 게 사건을 해결하는데 더 어려움을 주겠지? 범인은 똑똑하니까.
하지만 결국 끈질긴 형사는 아주 작은 단서들을 모아 결국 범인을 밝혀 내고야 말지. 하지만 이 과묵한 형사는 정통 미스터리보다 사회파 미스터리에 더 적격이겠어. 그렇다면 소설 중간쯤 지나서 범인의 윤곽을 조금 드러내주자. 그리고 그 범인에게 안타까운 사연을 주는 거지. 앞서 말했던 사람을 죽일 정도로 감추고 싶었던 과거를.
극의 결말부는 조금 감상적으로 가 볼까?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이라 하지 않나.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는 법. 범인의 花樣年華(화양연화)의 순간에 그를 무너뜨리는 거지. 너무 잔인한가? 하지만 모래로 만든 그릇에는 아무리 무언가 담으려 해도 모래알이 흩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걸 범인 뿐 아니라 독자도 쓸쓸하게 깨닫게 되겠지.
엇. 저기 역무원들이 드디어 시체를 발견했군. 아이고 저 호들갑이라니. 나처럼 멋진 미스터리 한 편을 쓰기에는 당신들이 너무 바쁘군. 자아, 그럼 이제 나도 떠날 때가 된 듯 하군. 기차를 타면 난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 모래로 만든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어떨까? 아무 부질없는 짓이지. 바람에 모두 흩어질테니. 범인은 그것을 몰랐다는 것, 아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