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1
유시주.이희영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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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우리는 정말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는가?

가끔 나는 자신을 좌파라고 부르는 사람들과 우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행태와 정신이 너무나 똑같은 것에 말없이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자신들의 이념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필요하다고 믿는다든지, 노무현 대통령 당선 당시 이회창을 찍은 사람들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던 내 대학동기의 편협함, 5년 후인 지금 분명히 대통령 당선자는 이명박인데 주위에 아무도 이명박을 찍은 사람이 없는 이 아이러니(자기방어를 위해 우리 나라에서는 꼭 비밀선거가 지켜져야 한다는 이 쓰디쓴 아이러니).

이 어디에도 나는 우리가 정말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책의 234페이지를 발췌해본다.

p234 - 적과 동지가 뚜렷이 구분되었던 흑백의 시절 ‘회색분자’‘배반자’‘사쿠라’는 확고한 신념 없이 이쪽과 저쪽을 기웃거리는 ‘기회주의자’, 명명백백한 적을 앞에 두고 쓸데없는 고민과 문제제기로 아군의 전열을 흩트리는 ‘내부의 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말은 넘쳐나지만 소통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민주화는 되었지만 민주적 가치는 충분히 사회화되지 못한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는 ‘회색분자’‘배반자’‘사쿠라’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오해와 비판을 무릅쓰고 양쪽을 오가는 ‘회색분자’, 절대적이라고 간주되는 것들을 향해 이의를 제기하는 ‘배반자’, 목적을 같이하면서도 다른 방법론을 주장할 수 있는 ‘사쿠라’는 억압된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현실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는 주체이다. 흑백의 경계를 허무는 ‘회색분자’‘배잔자’‘사쿠라’가 더 많아져야 갈등의 폭이 넓어지고, 극단적 대립이 줄어들며, 소통의 공간이 넓어질 수 있다.

이 책은 사회 여러 분야의 남녀노소를 불문한 사람들을 만나 실생활에서 경험하고 있는 생생한 민주주의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깊이 분석하고 있는 책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책보다 더욱 생생하게 여러 분야에서 몸소 체험하는 민주주의의 실태를 가감 없이 드러내 준다. 다음과 같은 식이다.

p45.민주화 이후에도 별로 좋아지지 않았거나, 오히려 나빠졌다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구술자들은 그 반대의 질문에 ‘표현의 자유’를 꼽았던 만큼이나 분명하게 '1순위‘생각을 밝혔다. 양극화, 분배정의, 상대적 박탈감,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그것이다.
“민주화가 이만큼 진행됐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래가 과연 행복한가. 아니면 적어도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우리가 아는 리듬으로 가는가. 이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분노, 그게 제일 많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 모든 사람이 너무 원한에 차 있고, 저도 그렇겠지만, 저도 건드리면 어느 날 그럴 것도 같지만, 길에서 만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전과 달리 너무 이렇게 응축된 분노를 갖고 있다고 할까요?(...) 그런 사고들은 굉장히 많이 나왔잖아요. 뭐, 지하철에서 그냥 너무 원한에 차서 남을 밀어서 떨어뜨린다거나, 통제 안되는 슬픔, 이런 것들이. 그게 안타까워요. 보여요. (...) 저 혼자도 취직을 못하는데, 학생들의 취직을 걱정해주는...... 학생들한테 ‘그렇게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슬픔이 어떨 때는 굉장히 심하게 전이가 되면서 힘들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취직을 못할 거라는 불안. 특히나 지방대 학생들, 지방대 인문계 졸업생 생각할 때 우울한 거는 거의 말할 수가 없어요.(서영선)”
인문학 전공자인 서영선 씨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98년에 돌아왔다. 시간강사, 강의전담교수를 거쳐 직듬은 한 사립대학 지방 캠퍼스의 비정년 전임교수이다. 비정년 전임교수는 대개 전임교수 급여의 50~80% 수주느이 급여를 받고, 임용된 지 최대 6년이 지나면 퇴직해야 하는 ‘계약직’이다. 스스로를 ‘비정규직’이라 일컫는 서영선 씨의 어조에는 자조와 냉소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서 자신에게로 슬픔이 “전이”된다고 하지만, 앞뒤 맥락을 살피면 사실 그 반대의 방향으로 전이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2년짜리 계약직으로 머잖아 그마저도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처지에 대한 좌절감과 무력감이 “취직을 못할 거라는 (학생들의) 불안”으로 ‘투사’된 것이다. 나아가 그가 길에서 만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통제 안되는 슬픔”을 느끼는 것도 어떻게 보면 똑같은 ‘투사’의 과정이다. 자신 안에 있는 것을 남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옳은 것이다, 라는 건 사실 주입식 교육으로 생긴 하나의 정보일 뿐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는데, 실제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통제 안 되는 슬픔’으로 방황하고 있다면 그것은 과연 민주주의이고 좋은 것인가. 아니, 대한민국은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단지 하나의 낱말일 뿐이다. 그것이 어떤 낱말로 불리든, 국민이 불안하지 않고 현실적인 수준으로나마 자신의 꿈을 조금씩 펼쳐갈 수 있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꿈. 사람은 꿈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진짜 민주주의는 이런 냉소적인 말로 자신을 달래며 야근을 하는 사회가 아니라, 꿈만으론 살아갈 수 없다 해도 꿈을 꿀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는 사회가 바로 민주주의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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