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86

라다크리슈난ㅡ

"다른 사람의 노를 노하지 않음으로써 정복하라."

 

p.107

38. 쾌락 고통을, 이득 손실을, 승리 패배를 하나로 보고 싸울 태세를 갖추어라.

그리하면 죄를 범함이 없을 것이다.

 

p.110

41. 쿠루의 아들아, 여기서는 결정적인 태도가 오직 하나 있을 뿐이다.

결정적이 되지 못하는 생각이란 가지가 많고 끝이 없는 법이다.

 

p.113

[마하바라타]ㅡ

강에서 물을 길어 쓰는 사람은 우물을 그리 가깝게 알지 않듯이

어진 이는 의식 행함에 아무런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의식을 지킴이 아무 가치가 없다.

 

p.114

47. 네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그러나 또 행동 아니함에도 집착하지 말라.

 

라다크리슈난ㅡ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그 선한 뜻 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성공, 실패는 그 개인만이 아니고 다른 여러 가지 요소에도 달려 있다.

 

p.118

58. 마치 거북이 그 사지를 끌어들이듯이,

그러한 사람은 제 감관을 감각의 대상으로부터 온전히 끌어들인다.

그런 사람은 지혜가 튼튼히 섰느니라.

 

59. 감각의 대상은 거기에 대해 단식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 맛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극히 높은 이를 보게 될 때는 그 맛도 사라진다.

 

간디ㅡ

이것은 단식 또는 그 밖의 자기 억제의 방법이 소용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거기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감각의 대상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는 데는 그러한 억제 방법이 필요하다.

다만 그 뿌리가 뽑히려면 지극히 높은 이에 대한 체험이 있고서야 된다.

고상한 갈망은 저속한 갈망을 정복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ㅡ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물건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 아니다.

만일 욕망이 남아 있으면 물건이 없는 것만으로는 떼어버림이 되지 못한다.

욕망까지 눌러버려야 떼어버림이 된다. 그래야 영혼이 자유한다.

그 때는 소유가 아직 남아 있다 해도 관계없다.

 

p.126

라다크리슈난ㅡ

스승은, 현대의 심리학자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도자를 두 종류로 구별하고 있다.

즉 내향적인 사람, 곧 정신적인 내적 생활의 길을 찾으려는 경향을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 곧 활동적으로 외적 생활을 따르는 경향을 가지는 사람이다.

거기 따라서 깊은 정신적 사색을 찾는 사람에게는 지식의 요가의 길이 있고,

활발하게 사랑의 활동을 원하는 성격에게는 행동의 요가의 길이 있다.

그러나 이 구별이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향 외향의 두 가지 경향을 다 가지고 있는 법이다.

 

p.128

5. 어떤 사람도 비록 한 순간이라도 무위로 있을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천성에서 나오는 충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다크리슈난ㅡ

욕망의 지배를 받지 않음이, 개인적인 이해 관계에서 오는 망상의 지배를 받지 않음이

진정한 무위지, 결코 육체적으로 활동을 피하는 것이 그것은 아니다.

해탈한 사람에게서는 일이 떨어져 나간다 할 때 그 참 의미는

그는 더 이상 더 개인적인 일의 필요를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p.130

라다크리슈난ㅡ

우리는 모든 사물을 참의 나타남으로 보아야지

붙잡고 가져버릴 물체로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8. 너는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여라. 행은 비행보다 나으니라.

행함 없이는 네 육신의 부지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p.131

라다크리슈난ㅡ

우리는 낮은 마음을 높은 마음에다 희생해야 한다.

 

p.132

함석헌ㅡ

사람은 공양 드린다 하여도 아무것도 제 것으로 할 수가 없다.

하나님 혹은 신들에게 속하는 것을 가지고 바친다.

이 희생이란 우리가 자연과 하나님께 진 빚을 갚는 것뿐이다.

 

p.134

[에라브다 망디르]ㅡ

산에 나무가 없어 헐벗으면 비가 아니 오고,

나무를 심으면 비를 끌어 식물이 느는 것에 따라 강우량이 올라간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과학적 사실 아닌가?

(???)

 

p.138

19. 그러므로 집착을 떠나 언제나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하라.

집착 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 데 이르기 때문이다.

 

라다크리슈난ㅡ

우리는 이상을 현실제도 속에 구현할 수 있다는 희망의 영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인도 세계가 그 젊음을 잃었을 때 그것은 저 세상적으로 기울어버렸다.

늙어 지치게 되면 포기와 인내의 복음을 취하는 법이다.

희망과 정력이 넘치는 때에는 현실 속에서 봉사의 활동을 하고 문명을 구원할 것을 강조하게 된다.

보에티우스는 "혼자서 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늘에 못 간다."고 잘라서 말했다.

 

p.139

21. 무엇이거나 어진 사람이 한 것이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 하는 법이다.

그가 모범을 세우면 세상은 그것을 따른다.

 

라다크리슈난ㅡ

[기타]는 위대한 사람이란 뒤엣사람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개척자란 것을 지적해 주고 있다.

빛은 대개 일반 사람보다 한 걸음 앞선 개인을 통해서 온다.

그들은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아직 아래 골짜기에서 잠을 자고 있는 동안

산꼭대기에서 빛나는 불빛을 벌써 보고 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한다면, 인간 세상의 소금이요 누룩이요 빛이다.

그들이 그 빛나는 불빛을 보고 외칠 때에 알아듣는 사람은 극히 적은 수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뒤늦게야 차차 깨닫고 그를 따라간다.

 

p.140

22. 오, 프리다의 아들아. 내게는 이 삼계 속에서 꼭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아무 일도 없고,

또 아직도 얻지 못해서 꼭 얻어야 한다는 어떤 물건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간디ㅡ

혹시 이런 반대를 듣는 수가 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 아니시니 물리적으로 일을 하신다 할 수는 없고,

썩 잘한다 해도 정신적으로 일하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해, 달, 별 등등의 운동은 곧 하나님이 일하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신적 활동이 아니고 물리적 활동이다.

하나님은 비록 형상도 없고 사람 같은 인격은 아니지만

마치 형상이 있고 몸을 가지신 것처럼 일하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일하고 계시면서도 일에 얽매이심이 없다. 그 영향을 입지도 않으신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마치 자연의 모든 운동이나 변천이 기계적이기는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지헤 혹은 뜻에 의하여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그처럼 사람도 제 하는 날마다의 행동을 기계적으로

규칙적이고 정확한 데까지 내려가도록 해야지만

또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일이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 기계적인 성격을 강조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의 자동기계에까지 내려가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 뒤에 하나님의 지도가 있는 것을 알아 자기도 깨달음으로 따라하는 데 있다.

누구나 다만 자기를, 그리고 행동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만 하면,

기계적인 정확뿐 아니라 어떠한 닳아짐도 떨어짐도 없는 안전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행동함으로써 사람은 제 마지막 날까지 씩씩하고 꿋꿋하게 살아 있을 수 있다.

그 몸은 때가 이르면 떨어져 나가겠지만

그 혼은 주름살 하나 없이 흠집 하나 없이 늘 푸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마하데브 데자이ㅡ

사람이 애착의 맛에서 물러설 때 모든 일의 멍에는 편하고 모든 짐은 가벼운 것이 돼버린다.

마치 지구의 인력이 없어질 때 몸이 그 무게를 잃는 것과 같다.

 

p.143

라다크리슈난ㅡ

광명에 집중되는 혼은 이미 자기를 위해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는 거룩하신 이가 하듯이 자기도 우주적인 활동에 더불어 참여하여야 한다.

그 떄 그의 행동은 지고자의 광명과 희열에 감동되어서 하는 것일 것이다.

 

26. 깨달은 자는 깨닫지 못하여 행동에 집착하는 자의 마음을 뒤흔들어서는 아니 된다.

깨달은 사람은 도리에 모든 일을 요가의 정신으로 함으로써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p.144

라다크리슈난ㅡ

모든 사람이 다 가장 좊은 지경에까지 이르러야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대단히 느린 걸음으로 되는 것이지 갑자기 일약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종교 견해는 우리 힘으로 선택해서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조상과 자라남과 전체적인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p.153

[담마파다]ㅡ

세상에 애욕같은 불은 다시 없고, 미움 같은 괴물은 다시 없고,

어리석음 같은 올무는 다시 없으며, 탐욕 같은 급류는 다시 없다.

 

p.175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이해력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가르침은 한층 더 오묘하면서도

한층 더 단순한 형식으로 주어진다.

 

p.181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진짜 꿀이 혀에 와 닿으면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단맛이

이때까지 맛봤던 모든 단맛을 다 이기게 된다.

혀가 만일 그 참 꿀맛을 잊지 않고 가지고 있다면

전에 먹었던 단것들의 생각이 일어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우주 의식 속에서 체험했던 초월적인 축복의 맛을

언제나 마음 속에 가지고 살아간다면 마찬가지 결과가 일어날 것이다.

지나간 날에 얻었던 기억이 다시 작용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도를 깨달은 이들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는 버릇을 벗어버리기 위해 취한 길이었다.

 

p.181

22. 우연히 오는 것으로 만족하고, 상대로 보기를 넘어서서,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

성공 실패를 하나로 보는 사람은 아무리 행동하여도 얽매임이 없느니라.

 

p.183

간디ㅡ

업이란 이제 앞으로 열매를 맺을 행위다.

 

p.185

라다크리슈난ㅡ

[망티크 테르]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네가 이때껏 살아오고, 보고, 하고, 생각했지만

네가 아니고 나다, 내가 보고, 살고, 했다.

순례자도, 순례도, 길도,

나 자신이 나 자신에게 한 것이요,

내 문간에서 나를 만난 것일 뿐이니라.

오라, 너 잃어진 분자야, 네 중심으로 오라.

먼 곳을 헤매었던 광선아

돌아오라, 넘어간 네 태양으로 다시 돌아오라.

(All you have been, and seen, and done and thought,

Not you but I, have seen and been and wrought......

Pilgrim, pilgrimage and Road,

Was but Myself toward Myself; and your,

Arrival but Myself at my own door......

Come, you lost Atoms, to your centre draw......

Rays that have wandered into Darkness wide,

Return, and back into Sun subside.)

 

p.187
마하데브 데자이ㅡ

"제한된 자아가 그 자신이 곧 무제한의 자아와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 곧 이 희생이다."

 

p.189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초월적인 명상 중에 마음이 체험의 오묘한 지경에 이르면

모든 감각의 활동이 점점 약화되어 나중에는 멎게 되고,

호흡도 점점 고르게 되어 결국에 가서는 멎는 상태에 간다.

이것이 "모든 감각 작용과 생기의 숨쉼을 요가의 불로 바치"는 일이다.

 

p.191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사람이 음식을 억제하면 신진대사를 위한 산소의 필요량이 적어지기 때문에,

따라서 호흡도 옅어진다.

 

p.192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희생은 정화의 길이다.

 

p.193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모든 희생 중 가장 힘있는 것은 초월적인 명상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직접 마음을 절대적 정결에 이르게 하여

무진장의 생명력과 지혜에 접촉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p.194

33. 재물의 희생보다 지식의 희생이 더 낫다.

대적을 뇌쇄시키는 자야, 오, 프리다의 아들아,

모든 행위는 예외 없이 지식에서야만 그 절정에 이른다.

 

간디ㅡ

무식하게 하는 사랑이 도리어 큰 해가 되는 일이 많음을 모를 사람이 누구일까?

 

34. 겸손한 공경으로, 거듭하는 질문으로,

받들어섬김으로서 스승에게서 그것을 배울지어다.

 

간디ㅡ

지식을 위한 이 세 가지 조건을 명심하라.

 

라다크리슈난ㅡ

이 절은 정신 생활에서 믿음이 먼저고 그 담 지식, 그 담 체험이 오는 것을 보여준다.

 

p.198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내버림의 지경은 행위의 요가로야만 이루어진다. 내버림을 실행할 수는 없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내버림의 지식이지 내버림의 실행이 아니다.

 

p.204

공자ㅡ

아, 어질도다 안회야. 한 주발의 밥, 한 표주박의 물로

외진 시골 구석에 있는 것을 사람이면 누구나 그 걱정을 견디기 어려울 터인데,

회는 그 즐거워함을 변치 않으니, 참 어질구나, 회야.

 

나윤ㅡ

이 몸의 목숨이란 거품처럼 뜬 것이니 이리저리 헤치고서 지나가면 그만이다.

일을 내 욕심에다 맞추려면 언제든지 족한 줄을 모르는 법이다.

반대로 한 발짝 물러설 줄만 안다면 근심할 일이 무엇이 있겠나?

잘산다 못산다 하는 것은 비유해 말한다면 꽃이 피었다가는 떨어지는 것 같은 것이요,

모이고 흩어짐은 마치 구름이 가다가 멎었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티끌 세상의 생각을 잊은 지 오래고

날마다 재 위의 다락에 올라 취한 듯 자연을 바라보며 한가히 서 있다.

결코 화를 내서도 아니 되고 수심을 해도 아니 된다.

타고난 본분에 따라 우주의 대법칙에 일치한 살림을 할 것이지

조금도 억지로 구하려 해서는 못쓴다.

쓸데없는 말 입 밖에 낼 것 없고, 내게 관계없는 일에 머리 내밀 것 없다.

인간의 부귀란 꽃잎 사이의 이슬 같이 잠깐인 것,

소위 피를 흘리며 다투는 공명이란 종이 위에 써 놓은 것인데

그것은 마치 물 위에 뜬 거품인 듯 맥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옅은 인정의 요구와 영원한 하늘 이치를 비교해

어느 것이 귀하고 어느 것이 쓸데없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난 다음에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근심 걱정을 해가며 사업을 한답시고 분주히 돌아다니겠느냐?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 일이란 "어지러운 세상"이라 하는 한 글귀에 다 그려진 것이다.

혹할 것이 없고 한적한 숲과 샘의 깊은 자연 속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가장 어진 것이다.

간소한 생활이야말고 행복의 샘이다.

간단한 한 칸 초막을 짓는 데 억새 베어다가 송낙으로 엮어 이엉 이으면 그만이요,

도둑 근심이 있겠나, 권세 있는 사람이 찾아올 걱정이 있겠나,

나뭇가지 엮어 싸리문을 하나 내고 보면 그 앞으로는 흘러가는 맑고 노래하는 시내뿐이니

얼마나 좋은가? 거기서 마음이 평안하니 한껏 잠을 잘 수 있지,

실컷 자고 깨어나면 그에서 더 즐거움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살진 것을 먹을 필요도 없이 밥을 조금 먹으면 시장한 줄을 모르고

그러면 저절로 근심 걱정이 없다.

그런데 무엇을 한답시고 이른바 세상의 크고 작은 영웅들이라는 것이

분주히 왔다갔다하며 떠들어대기로서니 그 무엇 때문이냐 하는 호기심인들 어찌 내게 있으며,

누구요 무슨 일이오, 묻기는 고사하고 머리를 돌려볼 필요인들 있겠느냐?

 

p.206

4. 삼캬와 요가를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은 무지한 자의 말이다. 어진 이는 그러지 않는다.

그 하나에만 올바르게 서도 양쪽의 결과를 다 얻을 수 있느니라.

 

p.210

함석헌ㅡ

우리를 정말 자유롭게 하는 진리의 신은 초월적으로 계시는 동시에

반드시 또 내재하시는 이여야 한다.

 

p.217
16. 그러나 그 무지를 자아의 지혜로 깨치는 자에게는

그 지헤가 태양처럼 그 지극히 높으신 이를 드러내 보여주리라.

 

p.218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이 절을 보면 지혜에 의하여 무지가 깨쳐지지,

무지를 깨쳐서 지혜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무지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기보다는

직접 체험에 의해 지혜를 얻으려고 힘쓰는 것이 옳다.

 

p.228

라다크리슈난ㅡ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그에게 육체적 쾌락을 주는 것도

생활을 향상시켜 주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진성을 발견하여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p.251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마음은 행복의 체험으로 억제가 되는 것이다.

 

명상에서 마음이 사색 과정의 가장 오묘한 지경을 경험하고 있을 때

그것은 계속 높아가는 황홀의 길에 놓여 있는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기대하거나 바라거나 하려는 경향이 생기면

그만 그 길에서 떠나게 된다.

 

p.252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잊으려고 하는 일이 잊고자 하는 물건을 기억하게 만든다.

 

p.255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크리슈나가 밝히고자 하는 첫째는 명상은 반드시 앉은 자세로 해야지,

눕거나 서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누우면 잠들고 서서 하면 깊이 빠졌을 때 쓰러질 수 있다)

 

p.255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감관 중에 가장 심히 활동하는 것이 눈이다.

그러므로 눈이 가만 있으면 다른 것도 자연 가만 있게 된다.

눈은 모든 감관이 다 그렇듯 마음으로 인해 움직인다.

마음의 활동은 숨과 관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과 감관과 숨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코끝에 주의를 모으라고 했다.

그 코끝은 시선과 숨이 만나는 곳이다.

그렇게 하는 결과로 마음과 감관과 호흡의 활동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고,

그러므로 모든 비정상적인 작용이 없어지게 된다.

 

p.259
16. 그러나 아르주나야, 요가는 지나치게 먹는 자도 이것을 얻지 못하고

지나치게 먹지 않는 자도 얻지 못하며, 지나치게 자는 자도 이것을 얻지 못하고

지나치게 깨어 있는 자도 얻지 못하느니라.

 

17. 그 음식 섭취와 쉼을 알맞추 하고, 그 활동에서 힘쓰기를 알맞추 하며,

그 자고 깸을 알맞추 하는 사람에게는 요가는 고통을 꺼버리는 힘이 되느니라.

 

p.260

라다크리슈난ㅡ

이것은 모든 지식을 초월한 체험이다. 왜냐하면 참 자아는 관념으로 표현할 수 있는,

또는 마음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형언할 수 없는 주관적인 것이다.

 

p.261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어떤 객관적 경험도 마음이 감각을 통하여 그 대상과 연결되는 데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가령 예를 든다면, 어떤 생각에 대해 명상을 할 때 그 생각에 대한 조잡 또는 오묘한 경험은

마음이 말의 감각과 접촉하는 데 달려 있다.

 

p.264

마하리시 마헤슈 요기ㅡ
감각으로는 왜 무한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없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감각의 기원과 목적을 알아야 한다.

감성의 경험 범역은 이 다섯 원소에서 나오는 창조물에 한정되어 있다.

이들 감각은 우리로 하여금 다만 객관 세계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p.266
함석헌ㅡ

"마음만으로"를 간디와 마하리시가 번역한 것을 보면,

그 뜻은 극기나 고행으로 감각을 억지로 눌러버리거나 없애버리려 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내 마음을 참으로 높은 데 두면 감각은 쉽게 이겨진다는 말이다.

마음이 몸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악이 감각 그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 나를 찾으려 하지 않는 마음에 있다.

그러므로 헤매는 마음을 그대로 두고

선을 행하려고 감각을 억지로 구속하고 강제하여도 소용이 없고,

반대로 마음을 올바른 길에 놓기만 하면 감각은 자동적으로 거기 따라 참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그것이 곧 생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이다.

브라만 혹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또 내 속에 근본적으로 선의 씨가 있음을 믿는 것이다.

지극히 선하신 이를 믿기를 결심할 때 마음 속에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인자가 천하에 대적이 없다는 것은, 인자는 아무리 악한 자라도 대적을 알아 정복하려 하지 않고

그에게 스스로 선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된 환경 속에 자라는 어린이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사랑과 평등과 평화를 살고 있는 부모와 어른들 사이에서 사는 동안

그 어린이의 자아는 올바르게 자람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어린이의 도덕적 활동 능력은 자동적으로 높아진다.

그러나 반대로 불우한 환경에서 사랑, 평등, 평화를 맛볼 수 없이

삐뚤어진 자람을 한 아이는 벌써 그 마음이 스스로 하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아무리 훈계를 하여도 벌을 주어도 소용이 없다.

 

개인이 그렇다면 인간의 공동체 살림은 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목적을 위해 강제와 폭력의 방법을 서서는 아니 된다.

종교는 고등한 종교 활동에 의해서만 향상되고,

악한 풍속은 선한 풍속을 길러줌에 의해서만 제거되며,

저속한 풍조는 고상한 예술에 의해서만 배제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규칙과 단속과 형무소 등으로, 정치적 조직적으로 되지는 않는다.

"마음만으로" 혹은 "마음 자체로"라는 건 깊이 생각할 만한 말이다.

정치가 종교나 교육이나 예술을 직접 간섭해서는 아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p.277
함석헌ㅡ

그렇지만 그렇다고 상대계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비를 초월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또 현실로 있는 시비를 인정한다.

정말 초월은 상대를 부정하면서도 살려두는 것이다. 그것이 참 초월이다.

[기타]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절대에 서지만 또 상대를 인정한다.

그래서 일단 버리고는 또다시 속세로 돌아오려고 한다.

 

p.313

라다크리슈난ㅡ

어떤 정성도 보람 없지는 않다. 비록 무식한 신자라도 차차 자라 거룩하신 이 안에서의

자기의 최고의 선을 구하여 자라게 될 것이다.

 

p.347

라다크리슈난ㅡ

거룩한 자유에 들어가는 첫걸음은 우리 속에 신성이 내재함을 믿는 일이다.

 

p.365

라다크리슈난ㅡ

예배의 결과는 예배하는 대상 속에 녹아듦인데, 유한한 대상이면 유한한 결과를 줄 수 밖에 없다.

 

p.372

라다크리슈난ㅡ

우리가 모든 것을 홀로 하나인 초월적 실재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볼 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모든 더듬고 헤맴을 면하게 된다.

 

p.377

스와미 프라부파다ㅡ

정신적 완성의 절정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일반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알고 있지만,

어떻게 위대하시냐 하는 것을 사실로 안다면

자연히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러면 자연 정성된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p.402

라다크리슈난ㅡ

자기 무지로 인하여 눈이 어두운 인생들은 자기 멸망으로 달음질 치는데,

거룩하신 주재자는 그것을 그대로 두신다.

그들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원할 때는 그 결과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행동은 우리를 결과에다 붙들어맨다.

이 원인 결과의 법칙은 하나님의 뜻의 한 발현이기 때문에,

그 법칙대로 실현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연속적으로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로 생각하신다.

거기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p.412

라다크리슈난ㅡ

환상은 다만 열어줌일 뿐이다. 그것은 튼튼케 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본 것은 다른 감관의 증거로써 시험해 보고 확인하고 하듯이

환상으로 얻어진 지식도 생명의 다른 요소들에 의해 온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p.423

라다크리슈난ㅡ

그러한 정신적 경지에 자연히 이르러지지 않을 때는

우리는 부단하고 끈질긴 정진의 길을 취할 수밖에 없다.

 

p.431

라다크리슈난ㅡ

"믿음을 가지고"라 한 것은

체험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 영혼이 믿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p.435

라다크리슈난ㅡ

우리가 인간 영혼의 성격을 알아보려고 할 때는 위로부터도 할 수 있고 아래로부터 할 수도 있다.

즉 영적인 원리에 의해 하든지, 아니면 물질적인 성격에 의해 하든지,

인간은 이중적인, 서로 반대되는 존재다. 자유하면서 또 종살이면서,

그는 하나님 닮으면서 또 그 속에 타락의 표적을 가지고 있다.

 

p.438

라다크리슈난ㅡ

대상화는 주관을 객관 세계로 몰아냄이다.

객관 세계의 어떤 것도 자주하는 실체인 것은 하나도 없다.

 

p.450

라다크리슈난ㅡ

만유 속에서 보편적인 정신을 보는 사람은 그 자신이 보편을 보고 보편이 된다.

 

p.452

30. 사람이 만일 산 물건들의 가지가지의 상태가

하나인 것에서 일어나서 거기서부터 번져나가는 것이라 본다면,

그는 브라만에 도달하느니라.

 

라다크리슈난ㅡ

자연의 복잡과 발전을 '영원한 하나'에까지 더듬어 올라갔을 때

우리는 영원을 스스로 취한 것이다.

 

p.470

간디ㅡ

구나티타(구나를 초월한 사람)는 자신으로서의 지경의 체험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지경을 떠난 것이다.

그러려고 하는 순간 '자기'가 벌써 참견을 한다.

 

p.497

라다크리슈난ㅡ

'신앙'은 하나의 신조를 받아들임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모든 힘을 어떤 주어진 이상에 집중함에 의해

자아를 실현하려고 노력함이다.

 

p.504

틸라크ㅡ

이성의 평정을 얻으려면 감각을 통제하는 힘을 얻지 않으면 아니 되고,

그리하여 만유를 꿰뚫는 오직 한 분의 지고자가 계시다는 것을 충분히 체험해야 한다.

지고자의 인식할 수 없는 모습이 비록 인식할 수 있는 모습보다 더 높은 것이기는 하지만,

인식할 수 있는 모습을 예배하면서도 오직 한 분의 지고자가 계시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면, 그것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라고 설명해준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지로 실현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p.507

스와미 프라부파다ㅡ

모든 장에서 크리슈나는 인생의 구경의 목적이 지극히 높으신 신을

진심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p.518

47. 불완전하게도 제 본성에 의하여 정해진 의무를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의무를 빛나게 하는 것보다 나으리라.

 

p.519

48. 타고난 본성에 의하여 정해진 의무는 비록 잘못함이 있더라고 버리지 말 것이니

모든 경영 다 결함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불이 연기에 싸여 있듯이.

 

50. 쿤티의 아들아, 완성의 지경에 이른 사람은 어떻게 브라만에 이르는가를 간단히 들어보아라.

그것이 지식의 최고의 경지이니라.

 

51. 맑은 이성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굳센 뜻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소리 따위 감각의 대상을 물리치고, 좋고 언짢고를 내버리고,

 

52. 고요한 곳에 홀로 있으면서, 적게 먹고, 몸과 말과 뜻을 억제하며

명상과 요가에 전념하고, 언제나 이욕(욕망을 떠남)에 의지하며,

 

p.520

53. 아집, 폭력, 오만, 욕망, 분노, 탐욕을 벗어나 아욕이 없고 마음이 잔잔한 사람은

브라만과 하나 됨을 얻을 수 있느니라.

 

54. 브라만과 하나로 되어 마음이 안정에 든 사람은 근심도 바람도 없고,

일체 만물을 평등으로 보며, 나에 대한 최고의 믿음에 이른다.

 

라다크리슈난ㅡ

이 절은 [기타]에서 볼 때는 개인이 형태도 없는 절대 속에 녹아 없어지게 되는 것이

반드시 최고의 경지는 아니고, 도리어 변과 불변을 자신 속에 다 가지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를 정성되게 믿는 것이 그것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설명이다.

 

쓰지 나오시로ㅡ

브라만과 신은 온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p.526

라다크리슈난ㅡ

자아를 초월하는 가장 쉬운 길은 항복이다.

"아무것에도, 자기의 도덕에조차도 종 노릇을 아니하는 사람만이,

거룩하신 이를 명상할 자격이 있다."

 

67. 너는 이것을 고행을 하지 않는 자에게나, 참된 믿음이 없는 자에게나,

들으려는 마음이 없는 자에게, 또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말하지 말지니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