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합격자 명단에서 당신의 이름을 보고 축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 왔습니다.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수능 점수 100점으로 예비 합격한 당신을 축하할 자신이 내게도 없습니다. 지금쯤 당신은 어느 대학의 합격자가 되어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있거나, 아니면 기술 학원에 등록을 해 두었는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축하의 편지를 씁니다. 이제 대학 입시라는 우리 시대의 잔혹한 통과의례를 일단 마쳤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이 징역살이를 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서가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낭패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책을 읽다가 '건축'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한동안 그 노인의 얼굴을 상기합니다.

차치리(且置履)라는 사람이 어느 날 장에 신발을 사러 가기 위하여 발의 크기를 본으로 떴습니다. 이를테면 종이 위에 발을 올려놓고 발의 윤곽을 그린 것 입니다. 한자로 그것을 탁이라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장에 갈 때는 깜박 잊고 집에 두고 갔습니다. 신발 가게 앞에 와서야 탁을 집에다 두고 온 것을 깨닫고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제법 먼 길을 되돌아가서 탁을 가지고 다시 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장이 파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 사연을 듣고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탁을 가지러 집에까지 갈 필요가 어디 있소. 당신의 발로 신어 보면 될 일이 아니오." 차치리가 대답했습니다.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습니까?" 주축돌부터 집을 그리던 그 노인이 발로 신어보고 신발을 사는 사람이라면 나는 탁을 가지러 집으로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탁과 족, 교실과 공장, 종이와 망치, 의상과 사람, 화폐와 물건, 임금과 노동력, 이론과 실천... 이러한 것들이 뒤바뀌어 있는 우리의 사고를 다시 한 번 반성케 하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대학의 강의실에서 이 편지를 읽든 아니면 어느 공장의 작업대 옆에서 읽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느 곳에 있건 탁이 아닌 발을 상대하고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당신이 사회의 현장에 있다면 당신은 당신의 살아 있는 발로 서 있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대학의 교정에 있다면 당신은 더 많은 발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대학은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종속의 땅'이기도 하지만 그 연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의 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동안 못했던 일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겠다고 했습니다. 대학이 안겨 줄 자유와 낭만에 대한 당신의 꿈을 모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얽매여 있던 당신의 질곡을 모르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그러한 꿈이 사라졌다고 실망하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됩니다. 그러나 '자유와 낭만'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와 낭만은 '관계의 건설 공간'이라는 말을 나는 좋아합니다. 우리들이 맺는 인간 관계의 넓이가 곧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낭만의 크기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에 내장되어 있는 안이한 연루와 결별하고 사회와 역사와 미래를 보듬는 너른 품을 키우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대학은 당신이 그동안 만들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게 해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만나는 연대의 장소입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발의 임자를 깨닫게 하는 '교실'입니다. 만약 당신이 대학이 아닌 다른 현장에 있다면 더 쉽게 그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예전에 수능 공부할 때 언어영역 문제집에서 보고 인상깊었던 글.

1996년 출간된 <나무야 나무야>라는 책에 실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