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렐렘
나더쉬 피테르 지음, 김보국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세렐렘의 독특한 문단 구성 방식>

 

<세렐렘> 허구인가, 실제인가?


주인공인 ‘나’는 연인 에바에게 이별을 고하러 찾아간다. 연인의 집에서 마리화나도 피우고, 사랑도 나누고 일련의 행위들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실제가 아닌 허구였다. 그리고 자신이 찾아온 12시 30분이라는 시간 속에서 단 1분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인공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연인 에바의 존재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고 시간의 영원성에서 갇혀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떤다. 주인공은 모든 행위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허구인지 가려내려는 것이다.

 

분명 주인공은 의식 속에서 모든 행위에 대해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한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마리화나를 펴서일까? 마리화나가 보여준 환각으로 인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리화나를 펴서 환각으로 인한 것이라면 시간은 흘러야 하지 않는가? 시간은 처음 집에 찾아온 시각과 마찬가지로 흐르지 않았다. 시간은 멈추고, 주인공의 관념 속에서 시간이 흐른 것일까?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실제일까? 단순히 마리화나가 가져온 환각을 본 것인가, 판단할 수 없다.

 

결국에 이 꿈같은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을 청한다.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잠을 잔다는 것은 역설적인 것 같다. 보통 우리는 꿈에서 깨기 위해서 일어나지, 잠을 자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 일어난 시간은 2시 45분이다. 2시간 15분 동안에 일어난 일들과 소설의 전개는 사실 별로 없다. 주인공이 의식 속에서 사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소설이 참 난해한 것 같다. 주인공에게 일어난 일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

 

잠자는 동안 꿈에서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인지, 허구의 세계와 영원히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잠을 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모든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르는 일에도 분명한 사실이 있다. 주인공이 연인 에바와 이별한 것이다. 마지막에 떠나지 말라는 연인의 만류에도 차갑게 돌아선 주인공에게 모든 일이 예정된 이별의 아픔으로 인해 벌어진 것 같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도, 이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던 시간이 흐르지 않던 중요하지 않다. 연인 에바와 같이 있는 마지막 시간이 영원하게 느껴진 것이 아닐까? 환각인지 주인공의 꿈인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살갗의 감촉과 사랑을 나누었던 순간이 떠오른 것은 더 이상 그녀와 정을 나누지 못하고 그녀를 안아주지도 못하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자 해설이 꼼꼼하게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나더쉬 피테르 작가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데 해설이 풍부하지 않다는 점은 너무 아쉽다. 역자 후기라고 되어있지만, 작품해설은 아니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니, 전문 번역자도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아쉽다. 물론, 소설을 해설에 맞추어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이 난해하고, 처음 소개되는 만큼 꼼꼼하게 독자에게 해설을 해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p61

그 살갗. 살아 숨쉬는 육신의 빛속. 좋다, 경계 없는 두 육체 사이의 이런 것. 내 느낌은 반복적으로 의식에서 분리된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의식은 정확하게 작동한다. 내가 여기 이 침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내 의식이 감각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를 뿐이다. 그리고 만약 계속해서 내 의식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내 의식이 어쩌면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로 그 의식, 감각에서 독립해야 할 그 생각은, 나를 기만하고 있는 바로 그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가 느끼는 그것을 과연 내가 진짜로 느끼고 있는지 아닌지, 또는 단지 존재하고 있다는 감정으로 상상하는 것인지를 내가 모른다면, 그녀가 여기에 실제로 있는지 아닌지, 여기 내 옆에 있는지 아닌지도 나는 알 수 없거나, 또는 그저 상상하는 것일 뿐이다.

 

p72

일어나지 않았고 단지 일어난다고 믿었을 뿐인데! 나의 공포는 더욱 우스운 것이다. 있지도 않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가. 편안하게 웃을 수 있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만약 웃음에 나를 완전히 맡기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아직도 상상을 사실로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게다가 있지도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지금, 지금은 무엇이 있었던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 나는 듣고 있다. 새로이 그 외침을 듣고 있고, 내 무릎에서 치골의 저항을 느낀다. 그러나 사랑의 행위는 없었고 그저 내 상상이었을 뿐이다.

 

p82

나는 이미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나 자신을 느끼게 하는 외부 세계를 느껴야 한다. 이 사고의 흐름 또한 극단적이고, 출발선으로 되돌아간 것이며, 나는 반복, 자기합리화, 논리적인 체계 안에 있다. 다시금 거기에. 장면들이 반복되어버린 것처럼, 이 사고의 흐름은 스스로를 반복하고 있다.

 

p99

시간이 멈추고, 그것은 나의 상상 속에서만 흐른다. 실제는 그 마지막 한 조각도 상상임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이 증명의 행위 역시 상상이다. 반복되는 것. 내 논리가 이미 이를 증명한 그 사실의 반복. 그 궁극점에 대해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존재가 멈추고, 이미 내가 아닌 그때가 아마도 그 순간, 이 12시 30분, 이것이 그 시간인데, 지금까지는 아직 내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신념 속에 내가 있다. 형이하학적 존재가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관념 속. 시간은 그 유효성을 잃었다.

 

p138

그 여정의 피곤함이 그녀의 사랑을 꺼버렸다. 나를 되살린 그 사랑을. 얼마나 우스운가. 동일한 도로 구간에서 양방향의 교통. 그녀가 느낄까, 아닐까? 얼마나 내가 사랑하는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무엇으로 그녀에게 저지른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무엇으로 나의 냉담, 부동, 광기가 유발한 그녀의 슬픔을 쫓아버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녀는 나를 위해 싸웠고, 지금 나는 그녀를 위해 싸워야 한다. 두 요소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얼마나 익숙한 것인가! 그런데 서로를 위해 끌어온 이 싸움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이것은 그저 말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끌어온 지난함속에서 그 치열한 싸움을 내가 즐겼던 것은 아닐까? 나 또한 그녀를 위해 나 자신에 대항해 싸웠고, 단 한 순간이라도 그녀에게 닿기 위해 고통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이토록 재료에 매여 있는가? 사랑은 왜 그 안에서 사랑 그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가? 왜 나는 느낄 수 없는가.

그녀가 나 없이,

다만 그녀라는

것을! 오로지 그녀를 위해!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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