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비로소이다 - 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 너머의 역사책 3
임상혁 지음 / 너머북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노비로소이다

 

현現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척도는 재산 즉, 몇 평의 아파트인지, 몇 CC의 무슨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는지 어느 곳에 살고 있는지 등등 가시적으로 기준을 삼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때의 사회는 노비의 양이 현 사회의 물질적인 양으로 대체된 듯 싶다. 

 "나는 노비로소이다"라는 제목을 대할 때 어떤 사회적인 소송이라기 보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책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말의 저자 임상혁의 글을 대할 때 이 책 한 권에  실렸던 저자의 내면 자체가 곧 나는 노비로소이다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책의 구성은 총 5장으로 칼럼 세 편을 부록식으로 중간에 끼어 넣었다. 또한 마지막에는 '부록'이란 장을 마련하여 1517년 노비결송입안과 이지도 판결문 전문 그리고 미주로 마무리 했다. 독특한 구성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전체적인 주 내용이 조선시대 나주 관아에서 벌어진 노비 소유권 문제를 다루었는 데 대부분 각 단원마다 다른 내용으로 단원마다 끊어져 있는 데 이 책은 전체적으로 이어져 있고 중간에 삽입 요소들이 무궁무진 하다. 물론 그 요소들은 조선시대 노비의 문제나 이두, 현행 민사소송과의 비교, 판례, 소송심리 순서에 입각한 구성이나 실체법적인 민사 규정 등을 섞어 놓고 있다. 이는 소설처럼 한 번에 읽어낼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구성 자체가 흥미와 판결의 궁금증을 더하게 했고, 지루할 수 있는 소송에 관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고 재밌는 예화를 들어 결코 지루함과는 거리가 멀게 엮어냈다.

전체의 맥이 되는 내용은 원고가 양반인 이지도(李止道)라는 남성이고 피고는 여든이 된 노파 다물사리(多勿沙里), 그리고 그 재판을 담당한 송관은 김성일 나주 목사로서 노비 소유권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의 과정을 풀어놓는다. 조선시대와 현대의 법률 용어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법관이나 법원의 구실 등에 대해 조선시대와 비교할 수 있는 상세한 해석이 주를 이룬다. 

나주 목사인 학봉 김성일은 일본 정부의 위협과 무례에 대해 남들은 적당히 넘어가려는 사회적 분위기 앞에서 당당히 시정을 요구하며 맞설 정도로 강직함이 소문난 사람이었다. 특히, 1574년 경연(經筵)에서 임금이 신하들에게 "경들은 나를 이전 시대의 제왕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임금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때 누군가는 "요순 임금입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학봉은 "요순이 될 수도 있고, 걸주(桀紂)가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요순과 걸주가 어디 같은 부류인가?"라고 물었다. 김성일은 "올바른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 미치광이가 됩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고명하시어 요순이 되기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겨 간언을 거부하시는 병이 있습니다.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걸주가 망한 원인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런 예화 뿐만 아니라 저자는 학봉 김성일에 대한 법관으로서의 자질 문제도 거론하고 있다. 또한 임씨 ·나씨의 소송으로 김성일의 수난을 얘기하고 있다. 쟁쟁한 집안인 두 가문의 겹친 민형사로 얽힌 판결은 문제가 되었던 듯 싶은 데 이는 임씨의 아버지는 장흥의 수령을 지낸 고관이며, 그녀의 큰 오라비는 문명을 크게 떨친 백호 임제였고  「북정일록」을 보면 김성일이 임제를 만났다는 기사가 있어 면식이 있는 관계였음에도 문벌가인 임제 집안에게 불리한 판결을 서슴없이 내렸기 때문이다.


조선의 법제는 양인과 천인이 서로 통혼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였고, 엄한 처벌 규정도 마련하였다. 양천간의 혼인으로 나온 자손을 노비가 되도록 한 것도 그에 대한 규제일 수 있다. 노비인 첩의 자녀, 이른바 천첩자녀는 또한 노비로서 아버지의 다른 자손들에게 상속될 수 있는 존재이다. 곧, 자신의 배다른 형제들에게 부려지게 되는 것이다. p65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천첩자녀도 자신의 피가 흐르는 자식임에 틀림없는데, 그를 비롯한 자손들이 이후 노비로서 다른 자식들에게 부려지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일 수 없음은 일반적인 정리이다. 그리하여 일정한 지위에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의 비첩(婢妾)소생들을 양인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p66

조선시대의 재판에 대하여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의 구별이 없었다거나, 사실상 구분되기 어려웠다고 보는 시각들이 많다. - 하지만 오래전부터 민사절차와 형사절차는 개념상 구별되어 있었고, 그 운영도 달랐다. 중략 - 같은 기관에서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둘의 차이가 없었다고 해서는 안된다. 지금도 동일한 법원에서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을 수행하고 있으며, 법관들도 또한 두 업무를 두루 맡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중앙에서는 오히려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의 담당기관이 분리되어 있었다. 곧 전택(田宅)에 관하여는 한성부가, 노비에 관하여는 장예원이 맡았고, 형사소송은 형조가 담당하였던 것이다. 가헌부는 풍속에 관한 사건을 맡았다. 사안이 다르다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 절차 또한 달리 이루어져야 함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p106


현재는 소장을 제출한 후부터 소송이 시작되는 데 3장의 '법에 따라 심리한다'에서 조선시대는 피고를 직접 데리고 와야 했으며 그렇더라도 우선은 소지 즉 판결을 구하는 소지를 제출해야 하며 그것이 지금의 소장이 되는 셈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이두가 섞여 있는 문장으로 된 소장을 보여 민사상 구제와 함께 사기죄에 대한 형사상 고소의 예를 현재의 소장처럼 해석해 표현해 이해를 돕고 있다. 공문서에서 이두 즉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 우리말을 기록한 이두에 대해 참고 문헌을 -조선시대의 문헌-소개하며 이 자료들을 활용하고 보존해 온 서리들의 계층에 대해 사회 경제적 법률 업무에 대해 관하고 있다. 소송법서인 『사송유취』 등 중요한 법령들과 법전들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실체법과 절차법에 대한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의 남겨진 기록을 꼼꼼이 찾고, 해석할 수 있었던 저자의 이면에는 아마 법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해박한 법규정에 대해 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다는 것은 그저 지식적인 학습뿐만 아니라 법관들의 판결에 대해 어떤 회의가 들었는지도 모른다. 곳곳에 조선시대의 판결과 슬쩍 비교하거나 조선시대 때의 명판결의 예화를 든 이유가 현재 문제시 되고 있는 판결에 이의를 든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달리 생각해 보면 '노비'라는 최하위 계층을 들어 그래도 그 노비들의 살 궁리가 마련될 수 있었다는 점은 돈이 없으면 소송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현대와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법관의 자질은 그저 시험에 합격이 되면 인성은 그저 관심 밖의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임상혁의 <나는 노비로소이다>(너머북스 펴냄)는 조선시대 나주 관아에서 벌어진 노비 소유권 문제를 다룬 것으로, 원고는 양반 남성 이지도(李止道)이고 피고는 여든이 된 노파 다물사리(多勿沙里), 그리고 그 재판을 담당한 송관은 김성일 나주 목사로서, 그 문제를 어떻게 판결해 냈는지를 상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라고 오마이뉴스에도 올라온 걸 보면, 노비는 현대에도 중요한 이슈임에 틀림없다. 카스트 제도가 계급사회를 지칭하지만, 포루투칼 언어였고 침략을 정당화하고자 만든 확대된 개념이라 할 때, 노비는 자본주의가 만드는 현대판 노예제도 속의 사람들을 건지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책은 조선에서 건너오면서, 닳고 낡아 행간을 오로지 상상력으로 읽어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까짓 노비의 기록보다는 양반의 기록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한 당시 사회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다. 시간이 더 속도를 내어 책을 밖으로 글자를 꺼낸다. 멋진 책이다.

 

二乙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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