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경제학>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불평등의 경제학
이정우 지음 / 후마니타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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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오리엔탈리즘에 대하여


불평등이 무엇인가, 라는 화두로 경제라는 생물체를 바라본다. 경제라는 것, 쉽게 말해서 잘 먹고 잘 잘 수 있는 마지노선을 책은 정해놓았다. 책을 이해하기 앞서 고조선의 8조법금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②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
③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들어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배상)하려는 자는 50만 전을 내놓아야 한다.

오래 전, 그런 게 있었나 상상조차 쉬 허락되지 않던 고조선에도 원칙과 불평등의 조항이 들어있다. 경제를 성장에 촛점을 둔 것이 아니라 평등에 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불평등의 경제학>은 이 평등에 기초를 하고 있고, 현대 노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닌가 유추할 수 있다. 모 대학의 경제학 강의를 해온 저자의 고뇌가 듬뿍 들어가 향신료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의구심은 책을 읽으면서 사라졌다. 민주주의 시대인데 과연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가? 라는 의문은 책에 나타난 숫자와 흐름에 더 깊이 빠지게 되었다. 고대 사회 이후 줄곳 권력과 부의 집중 문제는 사라지는 부의 집중이 아니라 바톤을 이어받는 것과 같다고 해야한다. 지금이야 머리가 잘 돌지 않으나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공부한 정수론과 최적제어이론 등 여러 사회이론이 어떻게 수학의 증명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는지를 궁금해했다. 낙향이라 치고, 덜 복잡한 사회로 온 지금에서 본 서울과 도시와 글로벌이란 유행은 오감을 마비시키는 최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을 책은 상류(上流)에서 말하는 게 아니라 하류(下流)에서 상류를 보며 말하고 있다. 하류에서는 상류에서 물에 버린 것들이 쌓이기 마련인데, 그래프로 치환되는 이론들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신간서평 평가단에서 이런 난이도가 높은 서적을 보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해서 조금씩 읽어 책을 뚫었다. 어찌된 일인지 뚫릴수록 멍해졌다. 선택적 숫자가 만드는 그래프의 이면, 그 뒷골목을 다시 보게 되었다. 통계는 선택과 취사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현존하는 정규분포의 오류성에 대하여서도 언급을 조금 하려 했을까-저자는 1장 서론 중 3절의 펜과 난장이의 행렬에서 새로운 분포도를 들고 왔다. 낯선 분포도지만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그래프였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로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지 때로는 혼란스럽긴 하지만 아주 용감하게 개략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대체로 진보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평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고, 보수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효율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라고 평등과 효율의 관계를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서 보고 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시장의 문제, 그리고 자본주의 해괴한 문제를 나는 막스베버에서 잠시 찾곤 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막스베버는 '의도하지 못한 결과'가 바로 자본주의라고 못 박았다. Karl Max의 자본론에서도 자본주의라는 용어가 없다. kapitalistische produktionsweise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쉽게 쓰이기 위해 자본주의라고 명명되었듯, 현재의 자본주의는 머리와 꼬리를 잘라낸 물고기처럼 보이곤 한다. 프랑스대혁명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라는 정신을 되찾고자 함이었으나 평등과 박애는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자본의 역사가 동양에도 있으나 중상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구조주의를 발전시킨 유럽의 이데올로기를 제대로 관찰해야만 자본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 근대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어떤 이유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다가 <불평등의 경제학>에서 진화된 기피가 어렴풋하지만 어렵지 않게 잡게 되었다.

저자는 비정규직의 증가 현상과 부동산의 문제, 빈곤 문제, 세계화와 복지국가 문제, 세계화와 불평등 문제, 성장이냐 분배냐…를 야인의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그가 교수이면서 지방에 있기에, 현장의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까닭이다. 이론만으로 무장된 경제는 미국발 금융사고를 일으키게 하지 않았던가. 숫자는 노동이 아니기에 땀 냄새가 나지 않는다. 금융회사가 자본을 대표하던 월스트리트의 잉여놀음은 노동의 가치를 추락시키지 않았던가. 돈을 번다는 것과 축적한다는 것이 선성장과 후분배라지만, 화장실 갈 때와 갔다오고 나서 달라지는 탐욕의 심리가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다.

10장 빈곤을 서평에서 중점적으로 파고 들어가려 했다. 까닭은 자본은 상대적으로 빈곤을 다루지 않으면 자본주의라 할 수 없어서다. <순수하게 신체적 늉률을 유지하기 위한 최저한의 필수품을 정의하고 이들 필수품을 사는 데 필요한 소득에 미달할 때 1차적 빈곤의 상태로 보았다. 그것은 생활이라기 보다는 생존의 수준이다. 라운트리가 말하는 1차적 빈곤이란 아무리 현명하고 주의 깊게 소비하더라도 신체적 능률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를 충족하기에 수입이 불충분한 상태를 말한다. 이에 대해 2차적 빈곤은 역시 빈곤의 타격을 받고 있는 가구이지만 그 수입이 음주나 도박 등 평소와 다른 것에 소비하지 않는 한 그런대로 빈곤선(貧困線)  이상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p328> 에서 빈곤의 기조를 데려온다. 경제가 선성장에 머물거나 그들을 옹호하는 대변자자일 때,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쓴소리다.

빈곤을 다루는 날카로운 칼은 아무 것이나 자르지 않는다. 책은 절대적 빈곤이 아닌 상대적 빈곤을 다루는데, 경제학의 지표들은 거의가 절대적 빈곤으로 통계를 내기 때문이라설 게다. <신체적 능률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라는 개념은 너무나 협의의 것이어서 현대에는 맞지 않으며, 그것보다는 사회적·심리적 필요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라고 밝혀주면서 절대적 필요(Absolute needs)를 필요의 사회적 결정(social determination of needs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하고 있다. 그리고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르티아 센의 빈곤에 대한 연구를 소개한다. <① 상대적 빈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절대적 빈곤을 너무 협의로 해석해 '절대적 필요'는 일정불변인 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절대적 빈곤의 개념도 시간적·공간적으로 변화하는 여러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며, 그렇게 보면 절대적 빈곤 개념에도 어느 정도 융통성이 생긴다. ②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성취한다는 것과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음으로 인해서 절대적으로 덜 성취한다는 것, 이 두가지를 상대주의자들은 같게 보지만 사실은 다르다는 점이다. 센은 상대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다는 것 자체가 절대적 궁핍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

자본주의의 예측은 성장에 몰려있다. 성장예측과 위험관리는 모두 실패의 문제를 떠안지 않으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그러나 잘하려 하지 마라, 잘못 하는 게 없으면 잘하는 것이라는 옛말이 있듯, 예측이란 빈곤에 뿌리를 두고 해석을 내리는 게 변수의 오류를 줄일 수 있다.

경제학은 쉽지 않다. 온갖 함정이 숨어 있기에 경제 여행이 망설여지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더 많은 이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런 딱딱한 책을 읽어야 한다. 단독(單讀)이 아니라 장독(長讀)으로 천천히 다시 읽어야 할 책이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청소년 교양서로 나온 서적도 필수적으로 읽어두는 게 좋을 듯 하다. 서가에 꽂혀 있는 베버와 이 책을 소걸음으로 읽는 누릴 수 있어 행복한 새벽이다. 불평등을 올바로 보려는 데에서 세로토닌이 분비되고, 비로소 본능 중 하나를 벗할 수 있지 않을까. Economy and Society, Max Weber, Bed Minster Press(1968)을 낡은 책을 다시 꺼내게 한 몹쓸 책이다. 그래서 새벽이 밝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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