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 - 이재호의 경주 문화 길잡이 33 걷는 즐거움
이재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사람의 뇌도 컴퓨터처럼 '검색' 기능의 활용이 가능하다면, '경주'라는 키워드로 내 뇌를 검색해보면 제법 많은 기록들이 딸려나올 것임에 틀림없다. 몇 번의 수학여행 중 경주는 언제나 필수코스였고, 가끔은 경주와 인근한 지역에 사는 덕분에 소풍으로 경주에 가기도 했으며, 더러는 경주를 꽤 좋아했던 외삼촌의 손에 이끌려 일없이 따라가 보기도 했으며, 드물게는 가족과 함께 경주를 찾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러한 많은 단편적인 기록들은 다만 '경주에 가 보았다'는 사실만을 되풀이해서 보여줄 뿐, 정작 경주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본 것인지는 전혀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이라는 꽤 감상적인 제목의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실은 낯설기만 한 '경주'의 진면목이 문득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은 그다지 친절한 책은 아니었다. 천년고도였던 경주를 사랑하고, 우리 문화재를 아끼며,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저자의 마음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지만, 정작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은 온전히 그의 것인 것처럼만 여겨졌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저자가 경주의 이곳저곳을 자신의 두발로 걸어 다니며 "아! 숨이 막힌다.(p36)"라거나, 혹은 "아! 달빛 부서지는 밤이여.(p41)"라거나, 또는 "아! 인생은 연극이고 사랑은 예술이라 했던가.(p50)"하고 감탄성을 발할 때, 나는 "아! 그렇구나."하고 동조를 표하기는커녕 저자의 신출귀몰한 감정선을 차마 따라잡지 못하고 이렇게 투덜거렸다. "아! 뭥미"

저자의 감정선을 따라잡기 어려웠던 데에는 내 무식함이 단단히 한몫을 했겠지만, (감히 말하자면) 저자의 글이 꽤 중구난방 식이고, 더욱이 비문(非文)이 더러 섞여 있어서 책을 읽어가기가 그리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물론 주어가 생략되었다거나 혹은 주어와 서술어의 호응관계가 맞지 않는 등의 비문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지만, 이 얘기를 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저 얘기를 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또 이 얘기로 돌아와 "아!"하면서 감탄을 하면, 나는 한숨을 내쉬고 "아! 환장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천년고도를 홀로 즐기는 사람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하는 이의 당혹스러움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저자의 즐거움 속에는 내가 함께 즐길 여지가 결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책을 덮을 때가 다가올수록 사정은 좀 나아졌다. 저자의 문체에 익숙해진 탓도 있고, 정작 내 고장에 있으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반구대 암각화나, 혹은 비교적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에 대해 새삼스런 흥미가 생긴 덕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차를 타고 후닥닥 백 번 보는 것보다 많은 시간을 들여 한 번 걸으면서 느끼는 게 낫다는 저자의 조언이 그의 진정어린 발걸음과 더불어 가슴에 조금씩 와 닿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을 홀로 누리는 사람을 보는 당혹감으로 불만스러웠다면, 오히려 나중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천년고도의 즐거움은 오직 직접 천년고도를 걸은 그 사람만이 홀로 누려야 마땅하다는 단순명쾌한 사실이 뒤늦게 머리를 때린 것이다. 뭐,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저자의 글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지만(이건 취향의 문제라고 해도 좋다).

어쨌거나 본래 의도라면, 언젠가 경주를 작심하고 찾게 된다면 이 책을 들고 갈 요량으로 이 책을 읽은 것인데, 이제는 경주에 가게 되더라도 굳이 이 책을 들고 갈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별로 친절한 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저자의 조언은 경주로 떠나기 전에 반드시 가슴 속에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가 누리는 '천년고도의 즐거움'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금언으로도 손색이 없을 뿐더러, 내가 경주에 꽤 자주 가보고도 그리 대단한 느낌을 받지 못한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을 테니까.

문화유적을 감상할 때도 많은 시간을 들여 걸으면서 느끼고 보면서 감동받기보다 차로 쏙 들어가서 빨리 후닥닥 보는 것을 선호한다. 이렇게 백 번 보아도 한 번 걸어서 간 것보다 못하다. 무수히 유적지를 다녀본 내 경험으로 볼 때, 같은 곳이라도 차를 타고 급히 본 것은 수십 번 갔다 와도 나중에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한 번 걸어서 갔던 곳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고 가슴 찡한 그리움이 아련히 파고든다. (p28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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