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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이번 주에는 이 책을 읽을 게 아니었다. 이 책이 목표가 아니었다고....!
친구 집에 놀러갔는데 내가 책 좋아하는 걸 아는 그녀가 빌려주겠다며 2권의 책 중 고르라고 해서 이렇게 된 거다.
친구가 야한 책이라고 했는데... 야하기는!!! 무슨!!!
친구랑 나랑은 잘 맞는 부분 만큼이나 안 맞는 부분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생각할 때 가장 안 맞는 게 책 취향인 거 같다. 특히
소설...!
나는 소설만큼은 골치 아픈 게 싫어서 좀 가벼운 걸 즐긴다. 추리 소설 쪽을 많이 좋아하는 편이고, 물론 그렇게만 읽는 것은 아니다.
전개방식에 여유가 있는게 좋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같은 흐름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숨 쉴 틈, 긴장을 풀 수 있는 틈이 있는 게
좋다.
그런데 친구는 소설도 약간 논문 분위기 풍기는 게 좋은 모양이다. 사방이 꽉꽉 채워진 텍스트, 결말까지 숨이 턱턱 차오르는 스토리, 가끔은
이게 소설이 맞나 싶을 정도의 방대한 정보까지...
지금까지 그녀에게 4권의 소설을 빌려 본 거 같은데 거의 다 그랬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나에게 소설이라기 보다는 심리학 서적 같았다. 심리학 전공자나 관심 있는 사람들이 보면 좋아할 듯... 게다가 '눈
먼 자들의 도시'처럼(나는 이 책도 읽는 게 넘 힘들었다) 독백, 대화, 지문이 분리되지 않고 문단, 문장 안에서 얽혀서 쓰여진 문체가 무거운
소재와 스토리랑 합체하여 완벽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소설은 피아노 교사인 에리카와 그 어머니, 그리고 제자인 클레머의 관계를 통해 비정상적인 집착과 애정, 제대로 관계맺지 못함에서 오는
심리적 일탈과 정서적 불안을 극단적인 모양새로 보여준다. 에리카에 대해서 부모님과의 관계, 사건 등을 묘사하여 그녀의 언행에 대한 심리적 근거를
촘촘히 쌓아올려 심리학 교재로도 손색이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극 중 에리카의 나이와 같은 나는 소설 중반 쯤에 잠깐 심란해졌다. 에리카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나랑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춰지는
게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에리카의 어머니처럼 우리 어머니가 입고 다니는 옷차림까지 강제하거나 집에 늦게 왔다고 머리채를 잡지는
않으신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일일이 간섭하면서 바리케이트를 치시는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딸과 어머니라면 다 약간씩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럴 거 같다. 유별난 우리네 어머니들이시니깐...
더불어 친구가 같이 저녁을 준비하면서 나한테 "우리 학회에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한 아저씨가 있는데 사람은 참 괜찮은 거 같아. 나이는
나보다 많은 게 분명하고... 근데 주변에서 나한테 그 아저씨랑 연애하라고 하는데 할까?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을 때, 적극적으로
"그래, 연애해!!"라고 대답해 줬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연애하고 싶지 않아?"라고 친구가 물었을 때 나는 "이대로 좋아. 그간의
연애가 크게 심리적으로 나한테 안정감을 준 것도 아니고, 고단하기도 했고... 나는 이대로가 좋다."라고 말했는데...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0대의 연애, 20대의 연애, 30대의 연애, 40대의 연애, 그리고 그 이후도 다 마찬가지로 그 모습도 이유도
다 다른데... 물론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크게 바뀌지 않는 한 나는 내가 겪을
연애의 모습이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한다. 하지만, 똑같은 책이, 영화가, 드라마가 경험한 나이대에 따라 그 감상의 폭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기에 연애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이제 알겠다. 그렇다고 당장 연애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렇게 간단한 것도
아니고... ㅋㅋ 넘치는 애정으로 다가온 클레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몰랐던 에리카처럼은 싫으니까... 책을 돌려줄 때 친구에게 연애하라고, 꼭
하라고 해야겠다.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을 때, 그런 사람이 생기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 꼭 하라고 해야지. 일 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라는 것도 몰라서 용감한 척 뛰어들 필요가 있을 거 같다.
이 책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개봉되었었다. 클레머 역할로 출연한 배우가 줄리엣 비노쉬 남편이란다.
검색해보니 영화 본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멘붕이었다는 감상평이 있었다. 느낌 알 거 같다. ^^;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준 책이지만, 당분간 친구에게서 책 빌리는 건 자제해야지. 가끔은 좀 가벼운 것도 읽어보란 말이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