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휴먼 - 인간에 대한 비공식 보고서
매트 헤이그 지음, 강동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8월
평점 :
리만 가설의 증명에 성공한 수학자 앤드루 마틴 교수의 몸을 빌어 지구에 잠입한 보나도리아인. 그의 목적은 교수의 성공을 알 가능성이 있는 가족과 지인들을 제거하는 데 있었다. 앤드루의 아내 이소벨, 아들 걸리버와 함께 생활하며, 에밀리 디킨슨의 시와 다양한 음악까지 즐기게 된 그는 리만 가설 증명과 관련한 메일을 받은 대니얼 교수를 죽이고 처음으로 악몽을 꾸게 된다. 죽음도, 두려움도, 환상도, 사랑도, 증오도 없는 보나도리아와 사뭇 다른 지구에서의 일상 속에 앤드루의 가족, 지인들에게 애착 을 느끼며 더 이상의 제거는 필요 없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보나도리아의 본체들은 동의하지 않고 논쟁 끝에 인간으로 남기로 한 그를 대신할 대체자까지 보낸다. 결국 걸리버를 죽이려던 대체자와 대치하다 동족을 죽이게 된 그는, 이소벨과 걸리버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그들 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고통과 죽음, 감정도 없는 보나도리아인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우선 대체 리만 가설이 무엇이길래 이것이 인간들에 의해 증명되면 위험한 것인지 무척 궁금하게 만든다. 하지만 수학 7대 난제라는 이 가설을 누가 잘 설명해 준다 해도 알아듣기는 쉽지 않을 터, 과감히 그 질문을 지우고 몰입하면 점점 지구와 인간에 물들어가는 외계인의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적응기가 흥미진진하게 다가온다.
보나도리아인에 의해 죽기 전, 인간 앤드루의 가족 관계는 엉망진창이었다. 수학자 아버지를 둔 탓에 받는 기대가 버거워 학교 적응도 어려운 걸리버와는 제대로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고, 학회와 연구, 학생과의 불륜으로 이소벨과의 결혼도 망가진 건 마찬가지였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기준으로는 눈치 없고 순진한 외계인이 걸리버와 이소벨을 더 아끼고 보호할 줄 알았다. 비록 그 대책 없는 순수함으로 뜻하지 않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말이다.

64. 살아 있어라. 그게 이 세상에 대한 너의 가장 중요한 의무다. …
73. 아무도 너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네가 너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
94. 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무엇이든 될 필요는 없다. 억지로 하지 마라. 네 감각으로 길을 찾아라. 그 길이 맞는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 어쩌면 무엇도 맞아떨어지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너는 목적지가 아니라 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괜찮다. 길이 되어라. 하지만 창밖으로 구경할 만한 것이 있는 길이 되도록 해라. …
96. 너는 훌륭한 인간이다, 걸리버 마틴.
97.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 점을 기억하라.
- 『휴먼』 中 p.375~378 '인간을 위한 조언'
가족을 떠나기 직전 보나도리아인이 걸리버에게 남긴 97개의 조언을 읽다 보면, 누가 진짜 걸리버의 아버지인지 헷갈린다. '이렇게 가족에게 무신경했기에 앤드루는 그런 엄청난 난제를 풀 수 있었던 걸까?' 하는 씁쓸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들에게 거리낌 없이 훌륭한 인간이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음을 상기할 때, 꼭 생물학적인 무언가가 반드시 좋은 부모의 조건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떠올린다.
앤드루 마틴의 껍데기를 쓴 보나도리아인은 걸리버와 이소벨을 떠나 낯선 곳에서 홀로 일상을 꾸려나간다. 이는 나름의 속죄이기도,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친구도 사귀지 않고,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눈물겹다. 그래서 다시 만난 걸리버가 그리움을 고백하는 장면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스스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어딘지 선명하게 깨닫고 일어서는 어느덧 '진짜 휴먼'이 된 이 외계인을 응원하게 되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