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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임 머신 - 수치심이 탄생시킨 혐오 시대, 그 이면의 거대 산업 생태계
캐시 오닐 지음, 김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4월
평점 :
1부 첫 페이지에서 식료품점 점원이 저자에게 한 말이 강렬하게 남았던 『셰임 머신』. '진짜 이런 말을 이렇게 한다고?'라는 생각을 계속했다.
세상에는 솔직의 탈을 쓰고 다른 사람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이 말을 뱉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그런 말이 누군가에는 분명히 상처가 되고 수치심을 자극한다. 그 말이 팩트를 담고 있다면 때로는 그렇게 듣는 게 도움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상황도 있을 거다. 하지만,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어떻게, 어떤 단어로 말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상대방에게 자극되는 부분은 차이가 생긴다. 정말 절대 다른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면 듣는 사람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가는 게 맞지 않을까. 내가 듣기 싫은 말은 상대방도 싫다.
식료품 점원이 했던 말은 박사학위에 가까워졌다는 기쁨을 순식간에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저자를 혼란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말을 한 사람, 들은 사람 누구도 좋은 상황이 아니다. 굳이 이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거대한 수치심 머신은 비만, 약물 중독, 가난, 허약함을 이용하기 위해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비난하고, 그 과정에서 힘과 시장 지분을 얻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희생양을 돈벌이로 삼거나 일회용품으로 취급하면서 보통 두 가지 전술을 결합해 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릇된 전제를 복음처럼 받아들여 이 현상에 가담한다. 패배자는 잘못된 선택을 했으니 자기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렇게 충분히 후회해야 잘못된 행동을 고친다고 본다. 수치심은 강력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효과적이다.
- 『셰임 머신』 中 p.129
『셰임 머신』은 사회가 개개인이 가진 수치심을 자극하고 그걸 이용한 수익성 높은 시장을 만들어 고객을 등쳐 먹고 있는 사례들로 시작된다. 비만, 약물 중독, 빈곤, 외모 등을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딸린 문제로만 한정 짓고 이들을 낙인찍고 그들의 수치심을 자극해서 대형 제약회사, 약물 중독 치료소, 사채업자, 인플루언서 등이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지 보여준다. 더불어 이런 산업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어떻게 통계 수치를 조작하는지도 알려준다.
콤플렉스가 없는, 약점 하나 없는 인간은 없다. 우리 사회는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서 벗어나야 행복해질 거라고 얘기하고 그렇지 못하면 한심하다고 생각하게끔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수치심을 사업 기회로 잡아 엄청난 돈을 벌고 있는 여러 산업이 존재한다.
이전에 『전쟁에서 살아남기』라는 책을 읽었을 때 전쟁이 얼마나 큰 비즈니스인가를 느끼고 이래서 전쟁이 사라지지 못하는구나 싶었는데 『셰임 머신』을 읽고 나니 혐오와 분란, 차별이라는 게 사라지길 바라지 않는 사람도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치심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주겠다며 생겨난 상품, 기업, 기관, 단체, 심지어 방송 프로그램들까지 모두 결국 추구하는 바는 자신들의 이익이니, 수치심에서 해방시켜주겠다는 그들의 달콤한 약속은 정말 이율배반적이다.
온갖 비하가 판치는 시대에도 건전한 수치심은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힘은 꽉 닫힌 문과 창문이 아니라 활짝 열린 문과 창문을 통해 들어와야 한다. 친구들, 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열린 문과 창문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이들은 사랑을 담아 점잖게 수치심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빌 게이츠나 파우치 박사보다 훨씬 낫다. 그렇게 부드러운 독려만으로도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다.
- 『셰임 머신』 中 p.232
수치심이 다 나쁜 건 아니다. 저자는 푸에블로 부족의 수치심 의식, 코로나 마스크 착용 등을 통해 적절한 수치심 자극으로 개선을 유도하는 사례들도 보여준다. 그 사례들 속에서의 수치심 자극은 나쁘다고 낙인을 찍는 게 아니라 잘못을 고치라고 충고하는 이벤트로서 기능한다. 다만, 이렇게 수치심이 건전하게 작용하려면 그 자극을 주는 사람들의 세심한 배려, 사려 깊음이 필요하다. 비난이 아니라 다정함이 기반이어야 한다.
도와주는 것보다 비난하는 게 훨씬 쉬운 법이다. 약자를 공격하는 담론은 골치 아픈 문제들을 사업 아이템으로 삼은 광범위한 생태계를 부추긴다. 피해자가 자책하고 그들의 노력이 실패할수록 사업가들은 부유해진다. 업체를 다시 찾는 고객은 황금알이다. 고객 각자가 겪는 처참한 실패는 수치심을 불어넣는 현실을 정당화한다.
- 『셰임 머신』 中 p.283
영화 <굿 윌 헌팅>에서 교수 숀이 윌에게 'It's not your fault'라고 얘기해 주는 장면을 제일 좋아한다.(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누군가가 무의식적으로 생각 없이, 혹은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 때문에 수치심에 시달리는 모두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어졌다. 내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 지나가는 사람의 말 따위는 딱 무시해도 된다. 아울러 아무리 진실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듣는 사람 입장에서 한 번 더 고민해 보고 말했으면 좋겠다.
- 같이 보면 좋은 기사 '매일경제': https://www.mk.co.kr/news/culture/10707345
★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