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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환장 속으로 - 엄마 아빠, 나만 믿고 따라와요, 세 식구가 떠나는 삼인사각 스페인 자유여행
곽민지 지음 / 달 / 2019년 4월
평점 :
스페인 여행 갔을 때 엄마 생각을 많이 했었다. 장 봐서 숙소에서 마음대로 밥해 먹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는 거주 중심의 여행이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고, 엄마 생신이 껴 있어서 그랬나 싶기도 했다. 평화로운 사라고사도 좋아하셨겠지만, 해변도 있고 좀 더 버라이어티 한 발렌시아에 엄마랑 같이 한 번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걸어서 환장 속으로』는 독서 의욕마저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이건 정말 큰일이다- 요즘, 뭔가 재미있는 걸 읽고 싶다는 생각에 고른 여행 에세이였는데 바로 비혼의 딸이 은퇴한 아빠와 엄마를 모시고 떠난 스페인 자유여행이 담겨 있다. 마드리드에서 세비야, 론다, 그라나다, 바르셀로나를 거치는 동안, 딸이자 가이드였던 저자와 처음 자유여행을 경험하는 관광객이자 딸의 어설픈 스페인어도 자랑스럽기만 한 부모였던 두 분은 즐겁고 유쾌하고, 때로는 짠하기도 한 추억을 쌓아나간다.
전에 엄마와 떠난 베트남 여행에서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방향과 전혀 다른 전개로 진행되는 일정 속에 난감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 기억들이 엄마를 스페인에 모시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가장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나 싶다. 2층 버스 타고 라운드 트립으로 야경 보는 것도 귀찮다고 숙소에 있을 테니 혼자 다녀오라 셔서 결국 혼자 구경하며 산발이 된 머리로 페이스톡으로나마 엄마한테 실시간 생중계를 해드리기도 했는데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ㅎㅎㅎ 나이 드신 부모님이랑 하는 여행은 절대 내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다. 아쉬워도 내려놓는 게 필요하고, 같이 갔지만 홀로 여행하는 것처럼 다니기도 해야 하는 거다.
저자는 두 분을 다 모시고 떠났으니 떠나기 전부터 엄청난 준비에, 얼마나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하며 일정을 짰을지 책을 읽기 전부터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그런 단단한 채비 속에서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전해지는 여행의 에피소드들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세 식구가 서로의 감정과 상황, 그리고 삶을 더 애틋하게 감싸 안으며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대화들이었다. 저자가 너무 아프게 후회한다는, 엄마의 힘든 삶에 대한 토로를 있는 그대로 품지 못했던 밤의 술자리, 여권을 잃어버린 예상치 못한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 터져버린 눈물, 타파스 투어에서 술 취해 털어놓은 실연의 고백에 대한 의외의 쿨한 시선 등 여행을 통해 서로 더 변화하고 맞춰가는 가족의 모습이 계속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나만 어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상황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고. 그 과정 속에서 무기력해져가는 아빠와, 점점 어두워지는 나를 보면서 힘듦을 터놓지 못했던 엄마, 그리고 정작 나를 가장 많이 괴롭히다 그라나다 교차로에서 완전히 녹아내린 나. 정말로 내가 조금 더 어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터놓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고, 힘듦을 말하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한데 나는 그 두 가지 모두에 소질이 없는 딸이었다.
- 『걸어서 환장 속으로』 中 p.218
터놓는 것과 힘듦을 말하는 것, 역시나 저자처럼 두 가지 모두에 소질 없는 딸인 나는 저자가 울던 그 순간 같이 눈물이 나서 혼났다. 어떤 마음일지 너무 잘 이해가 되어서... 인생을 긴 여행이라고 본다면,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생기는 사건, 사고로 인한 모든 짐을 내가 질 수는 없다. 그걸 알면서도 힘들어도 어려워도 말하지 못한다. 이건 용기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꾸준한 연습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최근 들어서 계속 생각한다. 아마 어느 정도 그 연습이 되어야 엄마랑 스페인으로 떠날 엄두가 날 거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