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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평점 :
혁명을 겪고 있는 러시아,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내무 인민위원회 소속 긴급 위원회에서 메트로폴 호텔 밖으로 평생 나갈 수 없다는 종신 연금형을 선고받는다. 이 소설은 선고받은 1922년부터 1954년까지 32년의 세월을 배경으로 삼아 급변하는 사회 상황과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 속에서도 품위와 긍정, 평정을 잃지 않고 살아간 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모두의 친구가 되다
알렉산드르 백작은 원래 묵었던 스위트룸이 아니라 호텔의 좁은 다락방으로 거처도 옮기게 되는데 덕분에 가지고 있던 집안의 소중한 물건들을 모두 챙길 수도 없게 된다. 비록 그가 연금형을 선고받고 다락방에 묵어도 호텔 직원들은 여전히 그를 각하라고 부르기도 하고 기꺼이 그를 돕는데 인상적인 것은 그 관계가 상하 수직이 아니라 상호 존중의 관계로 점점 두터운 신뢰와 은밀한 공모의 커뮤니티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다.
호텔에서 생활하는 소녀 니나, 잡역부 아브람, 호텔 식당 지배인 안드레이, 주방장 에밀 등 호텔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맺은 우호적인 관계는 백작에게 활력을 준다. 특히 니나는 호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그를 마스터키를 이용해서 다채로운 내부 탐험의 세계로 이끈다.
"음, 모두가 어떤 말을 해줄 땐,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가 많단다."
"모두가 어떤 말을 해줄 땐 그들이 모두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니나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 『모스크바의 신사』 中 p.150
결국 여동생 옐레나의 10주기 기일에 자살하려고 했던 백작은 호텔 잡역부 아브람이 권한 신선한 꿀에서 익숙한 고향의 향을 떠올리고 마음을 돌리게 되고, 호텔의 식당 보야르스키에서 웨이터 주임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공산당 간부 오시프의 외국어 및 서구 문화 관련 개인교사로까지 활약하게 되는데 이 친분은 그가 나중에 소피야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 아버지가 되다
연금된 백작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였던 니나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열혈 청년으로 활약하게 된다. 자연스레 백작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지만, 사랑하는 남편이 체포되어 멀리 이송되자 이를 따라가면서 안정된 상황이 될 때 데리러 오겠다며 딸 소피야를 백작에게 맡긴다. 달리 부탁할 사람이 없다는 니나의 말에 한두 달만 봐주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시작된 대리 부모 역할은 무려 16년이 넘도록 지속되는데 소피야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어렵고 낯설었던 소피야와의 관계 맺기는 그가 한층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고, 새로운 계획을 꿈꾸는 계기가 된다. 다친 소피야를 안고 의식할 여지도 없이 호텔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하고, 피아니스트 그리고 인간으로서 더 나은 소피야의 삶을 위해 치밀하고 대담한 스파이가 되기도 한다. 예기치 못하게 주어진 아버지 역할이었으나 그는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고, 딸에게 더 나은 삶을 주는 데에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에게 소피야가 없었다면 이 소설의 마지막은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가 어떤 모습이나 행동을 취하던 이야기 안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논리, 품위가 달라지지 않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내가 생각하는 낭만이라는 것에 가장 부합한다고 느끼지 않았나 싶다.
700페이지 가량의 이야기는 마지막 17페이지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호텔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혁명에 휘말린 러시아 귀족의 길고 먼 여정(?)을 따라온 기분이다. 여행이라는 건 꼭 멀리 갈 필요도 없고, 특별한 곳일 필요도 없는 거라는 걸 백작이 다시금 알려 준 거 같다.
+ 문득 러시아 사람들은 이 소설을 어떻게 느낄지가 궁금해졌다. 그들에게는 혹시 이게 서양의 오리엔탈리즘과 비슷하게 읽힐 수도 있을까? 미국 작가가 그려낸 혁명 시기에 연금형을 받은 러시아 귀족의 이야기가 어쩌면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내가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