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카인드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조현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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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래전 친한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다. 결혼을 앞둔 선생님의 오랜 친구가 신랑을 소개한다고 마련한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친구는 선생님을 소개할 차례가 되자 '00는 그림 그려. 만화가야'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신랑이 감탄하면서 '재주가 많으시네요'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신랑의 말을 들은 선생님의 친구가 말하길, '이이는... 그림 그려서 얼마나 번다고...'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정말 놀랐다고 하셨다. 평소 그 친구의 언행과는 차이가 있는 말이라서 화가 나면서도 순간 잘못 들었나 싶기도 했다고... 결국 선생님은 내내 그 친구가 갑자기 뭔가 달라진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데 지금까지 자기가 잘못 알았던 것인지 고민했다며 우리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셨었다.

 혹시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이라던가 내 집 마련이라던가, 인생의 나름의 이벤트를 겪으며 갑작스럽게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거 같은 지인... 이 책을 읽으면서 정답까지는 아니더라도 왜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했는지 어떤 메커니즘이 그런 언행을 유발했는지 분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책을 읽기 전 "위기의 순간, 인간은 선한 본성에 압도당한다!"는 문구는 공감보다는 의구심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심리학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각종 실험, 사건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외면받은 그 이면의 이야기, 그리고 저자가 찾은 무수한 연구 자료와 실제 사례, 통계 등으로 우리가 가진 본성이 정작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향의 면모를 보이고 있음을 차근차근 설명해나가는 챕터들을 계속 지나치면서도 그랬다. 실험 참가자들이나 사건 관련자들의 실제 상황이 어땠는지, 그래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결과나 결론이 연구 책임자, 언론 등이 원하는 방향대로 조작되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그런 짓을 한 책임자들의 본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내내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저자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 것은 Chapter 11, '권력이 부패하는 방식 : 후천적 반사회화'부터 였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우리가 만든 사회가 어떻게 소시오패스를 양성하는지를 보면서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다.

 

… 켈트너와 그의 팀은 값비싼 자동차가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또 다른 연구를 수행했다. 이 실험에서 첫 번째 피험자들은 낡은 미쓰비시나 포드 핀토를 횡단보도 방향으로 운전해갔다.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가 발을 막 내딛는 중이었으며 법에 따라 모든 운전자가 자동차를 멈췄다. 하지만 연구의 2부에서 피험자들은 멋진 메르세데스 벤츠를 운전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45퍼센트가 보행자를 위해 정지하지 않았다. 사실 자동차가 비쌀수록 도로상의 매너는 더 거칠어진다. 한 연구원은 ≪뉴욕타임스≫에 "BMW 운전자가 최악이었다"고 말했다(이 연구는 지금껏 두 차례 재현되었는데 결과는 모두 비슷했다).


- 『휴먼카인드』 中 p.316

 

고작 비싼 자동차 하나로 달라진다면, 연구 책임자가 아니라 국가 또는 기업, 아니 단 한 팀이라도 책임지는 자리에 있게 되면 인간이 어떻게 변할지 예상이 되지 않는가. 왜 투표를 하고, 정권을 바꾸고 별 난리를 피워도 세상이, 사회가 달라지지 않는지, 왜 선거 시즌만 되면 시장을 돌면서 절을 하고 노래, 춤으로 쇼까지 보여주는 국회의원들이 정작 선출되고 난 후에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온 농민들에게 고함을 치면서 무릎 꿇리는 행패가 가능한지 알 거 같았다. 저자가 인용한 또 다른 연구 결과에 따르면 'CEO의 4퍼센트에서 8퍼센트는 의학적으로 소시오패스, 즉 반사회적 인격장애자인 반면 일반인의 비율은 1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나에게 힘이 생겼다고 느끼는, 권력이 있다고 느끼는 순간 인지 기능이 달라진다니 선하고 악하고 떠나서 인간의 본성 자체가 너무나 연약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먼카인드』 中 p.490

 


|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절망에 빠졌느냐?! 사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서 좀 울컥했다. 안도감이 들어서였다. 편리하다고 호응 좋은 새벽 배송이라던가, 백화점이나 마트의 가판대 직원들을 보면서 문득문득 느꼈던 문제들을 누군가에게 얘기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듣는 소리는 '거기까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거나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는' 거였다. 그래서 가끔 내가 유별나서 쓸데없는 고민이나 생각을 하는 건가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상할 수 있는 문제 제기에서 출발해 조직을, 인간을,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례들을 보고 나니 우리 모두 함께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관리자와 보너스가 없는 가정건강돌보미 조직 뷔르트조르흐, 인사, 기획, 마케팅 부서가 없는 자동차 부품회사 파비, 다양한 배경과 연령의 아이들을 다 받아주는 네덜란드의 학교 아고라, 베네수엘라 토레스시의 시장 선거, 노르웨이의 교도소를 견학한 노스다코타 교정국 국장의 눈물,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군인들이 보여 준 훈훈함과 그 전염성 등 이 책이 보여주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 놀라기보다는 그로 인해 희망을 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지독히도 부정편향이었는데 어쩌면 우리 인간이, 세상이 나아질 수 있고, 그래서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역자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의 네덜란드어 제목 'De Meeste Mensen Deugen'에 있는 'Deugen'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번역될 수가 없다고 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냥 선하다고 옮긴 경우가 많았다고... 게다가 저자가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사람들이 선하다(good)고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해서 더 번역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

★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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