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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 ㅣ 스토리콜렉터 34
도로시 길먼 지음, 송섬별 옮김 / 북로드 / 2015년 8월
평점 :
… 제라늄 화분을 내놓으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갔을 때였다. 난간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지금 딱 한 걸음 허공을 내디뎌서는 안 되는 이유가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단 한 가지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 뾰족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 中 p.14
남편과 사별하고 장성한 자식들과도 떨어져 사는 60대 폴리팩스 부인은 병원에서의 봉사, 미술협회 모임, 원예 클럽 등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하는 중에도 딱히 삶의 이유와 의미를 찾지 못해 우울해하고 있었다. 진료 중에 의사가 던진 "오래전부터 꼭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못" 한 일에 어렸을 적 꿈인 스파이를 떠올린 부인은 CIA에 찾아간다. 멕시코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 줄 평범한 관광객이 필요했던 CIA의 카스테어스는 폴리팩스 부인을 우연히 마주치고 그녀에게 얼핏 어려울 거 없어 보이는 이 임무를 맡기기로 한다. 부인은 난생처음 떠나는 멕시코 여행과 나름의 미션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데...

구정 연휴 때 읽으려고 빌려두었던 3권의 책 중 한 권인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은 의외의 공감과 재미와 스릴을 주었다. 일탈을 꿈꾸는 노부인의 좌충우돌 스파이 체험기로 코믹하기만 할 거 같았던 이야기는 위험할 거 없어 보였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려던 폴리팩스 부인이 예기치 않게 납치되면서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가 감금된 곳에서 굴하지 않고 탈출을 계획하는 부인의 기지에 또 다른 분위기로 변화한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폴리팩스 부인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필사적으로 다리를 절며 뛰어가는 패럴의 뒷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이토록 필사적인, 가엾은 인생이라니. 인간이란 어쩌면 이렇게 끈질기게 목숨을 붙들고 매달리는지, 살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일을 해내는지! 그러니까, 몸뚱이에 붙은 목숨 말이다. 영혼의 목숨을 부지하기는 훨씬 까다롭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 中 p.317
협업하던 요원들이 목숨을 잃었고, 부인이 감금된 곳의 위치도, 생사도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CIA 조차 어찌해야 할지 모르던 그 시간에 폴리팩스 부인은 그대로 고문과 죽음을 기다리며 손 놓고 있지도, 그렇다고 자살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감시하던 비밀경찰들과 친구가 되고, 교류하면서 자신의 조국인 미국에 대해 알려주고, 자신도 그들의 나라에 대해 배운다. 여기에는 그녀가 스파이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는 존재로 그저 힘없는 노부인으로 보였다는 게 크게 한몫하기도 했는데 이에 더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질을 발휘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모든 상황을 차근차근 헤쳐나가면서 폴리팩스 부인은 이름 그대로 '뜻밖의 스파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
딱히 특별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폴리팩스 부인이 부상당한 요원 '패럴'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감금자 '지니'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벌이는 탈주의 여정은 한 번씩 숨이 탁탁 막히는 잔인한 위기의 연속이다. <미션 임파서블>이나 <007 시리즈>를 떠올린다면 이 지난한 과정에 괴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국경을 넘는 탈출이라는 건 폴리팩스 부인의 모험에 더 가까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꼭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못" 한 일 중에 폴리팩스 부인처럼 스파이가 있다면 이 모험이 그래도 즐겁게 다가올 것이다.
다 읽고 나면 폴리팩스 부인이 틈날 때마다 하는 솔리테어가 정말 궁금하다. 트럼프 카드로 혼자 하는 게임이라는데 서점 주인 드가메즈가 부인에게 선물로 준 ≪솔리테어를 하는 77가지 방법≫이라는 책도 읽어보고 싶었다. 이제 별 게 다 해보고 싶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