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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씽
니콜라 윤 지음, 노지양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영화 프로그램에서 보고 끝이 궁금해서 원작 소설로 읽게 된 『에브리씽 에브리씽』.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의 장르를 로맨스라고 하겠지만, 끝까지 다 보고 나니 나에게 이것은 로맨스의 탈을 쓴 호러였다. 잠자리에서 곱씹을수록 너무 무서웠다고만 해두자. 다만 그런 분위기를 그나마 희석시켜주는 건 저자의 남편인 일러스트레이터가 솜씨를 발휘한, 딱 매들린이 정말 그렸을 거 같은 재치 있는 일러스트다.

프로그램에서 결말만 제외하고 거의 다 보여줘서 내가 진짜 궁금한 곳에 이르기까지 좀 조바심을 내서 읽게 되었다. 그러다가 설마 했던 불길한 예감이 '그럼 그렇지'하고 딱 들어맞는 순간, 이 책은 나에게로 와서 호러가 되었다. ^^;
세상에서 누군가의 시간을 뺏는 거만큼 나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상식 범위에서 누군가에게 뺏을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어느 정도 보상이 가능하다. 물론 집안의 가보라던가, 유품이라던가, 정서적인 가치가 부여된 것들은 완전한 보상이라는 게 있을 수 없지만, 심지어 누군가의 사랑을 뺏어도 위자료라는 걸 청구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시간은 아니다. 내 시간을 떼어서 누군가에게 주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고, 더 큰 문제는 시간이라는 건 도리어 뺏은 사람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좀 늦을 수도 있지, 뭐!라는 말 안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주인공 매들린은 무려 18년의 시간을 도둑맞는다. 그녀가 18살이라서 괜찮을까? 아니다. 그녀는 그 시간 동안 보통의 인생이 누리는 것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놀이동산, 소풍, 외출, 쇼핑, 학교, 친구, 다툼... 그녀의 인생에는 오로지 집, 엄마, 입주 간호사, 인터넷으로만 만날 수 있는 선생님이 있었다. 엄마랑 하는 게임, 엄마랑 보는 영화, 금요일마다 엄마의 솜씨로 즐기는 프랑스식 디너가 그녀가 가진 추억의 전부다. 나는 매들린이 느끼는 절망과 분노에 너무 공감이 되어서 인생은 길고 18살밖에 안 되었으니 긴 인생 이제부터 누리라는 말이 정말 개소리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 사랑한다면
정말 오래전에 즐겨보던 경연 프로그램에서 최종 파이널 무대에는 늘 가족이 함께했다. 몇 시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시즌의 우승 후보 중 한 참가자가 이전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가족은 고통이라는 식으로 얘기했었다. 그래서 최종 파이널에 가족이 오지 않는 건가 했는데 어머니가 나타났고, 그 참가자는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라는 생뚱맞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게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자식에게 좀 가까이 살가운 모습으로 서 있으려고 했던 어머니와 그게 영 어색하고 불편했던 그 참가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예전 기억까지 가지 않아도 가족은 마냥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닌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이야기가 매들린과 옆집 소년 올리의 풋풋한 사랑을 중심에 두고 그 비중이 압도적이라서 그렇지 이 소설 속 가족은 내가 이 소설이 호러라고 느끼는데 크게 한몫했다. 자세하게 얘기하면 완벽한 스포가 될 거라 더 이상 말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에게 사랑을 말할 때, 특히 가족이라는 특수한 관계에서 사랑을 말할 때는 더 조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랑은 받는 사람이 원하는 사랑과 주는 사람이 주고 싶은 사랑이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완벽하게 다른 시간을 살았는데 그게 같을 수가 없다. 그건 나랑 같은 DNA를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랑 다른 환경과 다른 경험을 가지고 살고 있는데 아무리 부모, 자식이어도 어떻게 같은 마음, 취향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말하기 전에 그 사람을 잘 보는 게 먼저여야 한다. 그 사람이 원하는 걸 잘 살피고 내가 주고 싶은 사랑과 그 사람이 받고자 하는 사랑 사이에서 적절한 교집합과 균형을 찾는 것, 그게 먼저인 거 같다. 무조건 '너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다분히 이기적이다.
이 책을 너무나 사랑스럽게 읽은 많은 독자들은 내 감상이 황당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원래 모든 작품은 경험한 사람이 다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정답은 없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