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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 무루의 어른을 위한 그림책 읽기
무루(박서영)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건강하게 화를 내는 법을 아직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해서 지지난 주부터 이리저리 쌓여 온 감정을 꾹꾹 눌러 대기만 했다. 좋아하는 만들기도 하고 책도 읽었으나 거의 논문급이었던 책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만들기까지 끝내고 나니 해소되지 못한 감정은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와서 급기야 지난 목요일에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던 그날 그냥 자려다가 집어 든 이 책의 첫 챕터를 읽다가 결국 펑펑 울고 말았다. 읽어나갈수록 흐느끼는 소리까지 터져 나와서 그 챕터만 읽고 책을 덮은 후에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이 책이 슬퍼서라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는 슬픈 책이 아니다. 그냥 내가 늘 생각하던, 마음에 담고 있던 어떤 부분을 가볍게 토닥이고 감싸주기도 했다가 치워주기도 하는 그런 책이었다. 그런 세심함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툭 무심한 듯 다가오기에 무방비로 있다가 감정의 쓰나미에 휩싸이게 되는 그런 '이상한' 책이었다.

아이들은 태어나기로 결심했다. 아이들의 삶은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이들의 인생에 어떤 위험과 불행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랄 것이다. 먹고 뛰고 구르고 다치기도 하면서 몸이 자라날 것이다. 그렇게 몸이 다 자란 뒤에는 몸이 아닌 것들도 자라날 것이다. ……
우리는 모두 태어나기로 결심한 아이들이다. 용감하게 알을 깨고 나온 모든 아이들의 모험에 박수를 보낸다.
-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中 p.14~15
스스로가 태어나기로 결심한 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MBTI 검사에서 '나는 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한다'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누르는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던 친구의 동그란 눈이 생각난다. 친구는 이게 전혀 궁금하지 않단다. 왜 태어났는지 궁금한 만큼 나는 내가 원해서 태어났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태어나기로 결심한 아이라니... 물론 저자가 말하는 태어남은 탄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거 같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낯선 곳에 갈 때 같은 모든 첫 경험을 시도하는 거 자체를 태어남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거나 삶을 시작하고 살아나가는 우리 모두는 태어나기로 결심했고 그렇기에 성장도 있다는 거, '왜 태어났는가'에 대한 답은 아니지만 삶을 좀 다르게 보는 데는 도움이 될 거 같다. 특히 부모와 아이, 상호 간에는 이런 시각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이 되고서야 그 마음을 짐작한다. 살아보니 경험의 총량에 비례하는 지혜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나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다시 설 수 있도록 일으켜 주었던 말들은 언제나 나를 잡아끄는 말이 아니라 나를 안아주는 말이었다.
-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中 p.20
타인의 삶을 예단하고 충고하는 일이란 얼마나 주제넘은 일인가. 나도 그들과 같은 시대를 통과했다. 기혼자들의 세상에서 성장해 어른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들 속에 섞여 살아가야 한다. 내가 아는 어른 중에는 비혼으로 사는 어른이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 사는 방법 같은 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中 p.171
바라는 모든 것이 나이에 비례해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렇지만, 가능하면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는 말과 행동이 앞서고, 타인과 내 경험 앞에서 겸손할 수 있으며, 인간, 또 나만 생각하지 않고, 상실과 불안을 먼저 고민하지 않는 삶으로 나이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다르다는 것에 대해 섣부른 비난이나 비판하지 않는 포용력 넓은 사람이면서 상대방이 그렇지 않다고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

어릴 때부터 들은 평범한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라 신 아버지의 말씀을 어느 때보다 실감하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내가 비슷한 형태로 비슷한 시기를 지나며 스스로를 세상의 가장자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저자에게 공감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담담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 속에 저자가 읽었거나 읽고 있는, 혹은 다시 읽은 그림책들의 등장이 공감의 영역을 넓히고 한층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읽으면서 몇몇 그림책들은 지인들에게 선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수업하면서는 그림책도 자주 사고 읽었었는데 이제는 너무 텍스트 중심의 책 읽기를 하고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처럼 그림책도 아이들만 보는 게 아닌데 말이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은 저자를 응원한다. 덕분에 몇 주간 쌓였던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나를 비롯해서 이 책을 읽은 모두가 그러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하루하루 충실한 나름의 일상을 채우며 '할머니, 할아버지'로서 완성된 노년의 삶을 꿈꾸는 우리 모두 다소 엉뚱하고 이상(理想)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