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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해석 -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 / 김영사 / 2020년 3월
평점 :
첫 해외여행을 친구와 둘이 갔었다. 여행지는 일본 도쿄였고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좋아하는 나에게 여정이나 방문지에 대한 것들이 거의 맡겨진 상태였다. 비용 부담은 친구가 더 많이 하기도 했고 내가 흥미 있는 곳만 주구장창 다니기에는 좀 걸려서 느슨한 일정에 보편적으로 많이 가는 곳들을 다양하게 챙겨 넣었었다. 이렇게 나름 서로를 배려했다고 생각한 여행은 정말 최악이었는데 친구는 옆에 그냥 서 있으면서 길을 잃을 때마다, 방문지 한곳이 끝날 때마다, 어디로 가야 하냐, 거기 왜 가는 거냐, 꼭 가야 하는 거냐며 계속 날 다그쳤다. 똑같이 초행길이었는데 딱히 아이디어 없이 닦달만 해대는 친구에게 나는 점점 지쳐갔고 화가 났다. 꽤 배워왔던 일본어가 한 번씩 들릴 때마다 뿌듯해할 겨를도 없었고 여행 막판 즈음에는 나는 말을 잃었다. 친구는 자기 기분을 바로바로 표현해서인지 계속 기운찬 느낌이었는데 어느 순간 내가 저기압인 게 자기도 느껴졌는지 몇 번은 눈치를 봤지만 결국은 자기 기분으로 돌아갔다. 차라리 그냥 내가 가고 싶은 곳 중심으로 아주 빈틈없이 꽉 찬 일정을 짰으면 더 나았을 텐데... 이 경험 이후로 나는 절대적으로 혼자 하는 여행을 선호하게 되었다. 특히 처음 어디를 갈 때 누군가랑 가는 것보다 혼자 가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만일 헤매더라도 혼자 헤매는 게 속 편하니까. 그래서 이 친구와는 어떻게 되었냐면,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도 관계가 이어지기는 했다. 친구였으니까 그게 친하다는 착각이었든, 뭐든 간에 친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한다. 정말 잘 살고 있을 거다. ^^
이 여행 때문에 친구를 탓할 생각은 없다. 정말 정말 화가 나기는 했지만, 우리가 서로를 잘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과연 친하다는 게 어느 정도의 관계일까가 궁금했다. 그리고 이 친구와 길게 가지는 못하겠다는 생각까지... 친구와 나는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과연 우리는 진짜 친했던 걸까?
이런 경험이 나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함께 보냈던 시간 속에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한다. 단순하게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그 사람의 취향, 성향 등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 고민하면서 많은 부분을 살피고 정보를 모은다. 문제는 이런 판단의 신뢰성이다. 우리는 결국 스스로가 내린 판단을 신뢰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지만 자신이 정한 기준과 그로 인한 판단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말콤 글래드웰의 『타인의 해석』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타인에 대해 판단을 내릴 때- 우리가 범하는 오류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해 동안 어마어마한 금액의 사기를 치는 상황에서도 조금도 의심받지 않았던 메이도프, 미국 중앙정보국 최고 간부 위치까지 올라간 쿠바 스파이, 소아성애자 샌더스키, 천재 시인의 자살과 테러 집단 간부의 자백 등 실제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그와 관련된 각종 통계와 연구 자료를 연결 지어 그토록 거대한 속임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당연하게 지나치면 안 되는 부분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나간다.

모든 코치가 소아성애자라고 가정되면, 어떤 부모도 아이가 집 밖을 나가게 하지 않을 것이며,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코치를 맡겠다고 자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결정이 아무리 끔찍한 위험을 수반하더라도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는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가 굴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신뢰가 결국 배신으로 끝나는 드문 경우에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은 것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비난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
- 『타인의 해석』 中 p.177
투명성은 행동과 태도, 즉 사람들이 겉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그들이 속으로 느끼는 방식에 대한 확실하고 믿을 만한 창을 제공한다는 관념이다. 이것은 우리가 낯선 사람을 파악하는 데 사용하는 결정적인 도구 중 두 번째 것이다. 누군가를 알지 못하거나 그와 소통하지 못하거나 그를 제대로 이해할 만한 시간이 없을 때, 우리는 행동과 태도를 통해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 『타인의 해석』 中 p.190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타인에 대해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도록 설계되었다. 낯선 사람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가 진실하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끔 되는 것이다. 농담처럼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쁘지만, 두 번을 넘어가면 속은 사람이 나쁘다는 말을 하는데 기본값을 진실로 놓는 인간이 속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주변에 누군가가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저 다른 사람도 나에게 진실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무슨 핑계를 대도 범죄자는, 나쁜 놈은 속이는 사람이니까...
예전에 미드 중에 표정이나 제스처를 읽고 범인을 밝혀내는 수사극이 있었다. 책에서 언급된 안면 동작 부호화 시스템이라는 소재에 착안한 것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사람을 직접 대면하는 게 더 판단하기에 좋다고 생각하는 데는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숨길 수 없는 감정을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런데 문화권에 따라서 같은 표정도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우리는 표정을 학습한다. 책 같은 텍스트,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과 이미지를 통해서 사람이 놀랐을 때나 행복했을 때 짓는 표정과 행동을 끊임없이 본다. 그리고 그것으로 내 감정도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런 학습의 밖에 있으면 이런 표준화된 태도와 행동은 무용지물일 수 있는 거다. 더불어 학습의 안에 있더라도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은 다 다를 수 있기에 태도와 행동을 내면과 바로 연결 짓는 판단은 아만다 녹스의 사례처럼 무고한 사람을 마녀사냥할 만큼 아주 위험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타인에 대해 판단할 때 어려운 부분은 그 사람이 드러내지 않은 배경이나 맥락을 우리가 절대 알 수가 없다는 점인 거 같다. 저자가 책의 시작에 언급하고 끝에 집중적으로 다루는 샌드라 블랜드의 사건은 우리가 타인을 단편적으로 판단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 그녀를 체포했던 경찰관 엔시니아는 말콤 글래드웰이 지적한 거의 모든 오류들을 바탕으로 샌드라를 의심했는데 가장 비극적인 부분은 이 두 사람 모두 서로가 그렇게 행동한 배경이나 맥락을 전혀 몰랐다는 것일 거다. 사실 두 사람이 그렇게 행동한 데에는 사회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되는데 결국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가지고 이주한 젊은 여성이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해임된 엔시니아가 여전히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샌드라를 탓하고 있는 것도 또 다른 비극이라면 비극이겠다.
우리는 의심과 경계로만 살 수는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믿고 의지한다. 이 때문에 뒤통수를 맞는 것까지 감수하지 않으면 사회라는 시스템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저자도 특별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보편적인 기준과 판단이라는 걸 너무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좀 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됨을 여러 연구와 수치로 보여 준다. 전에 선생님이 대화 중에 나와 친구에게 각각 적립제와 차감제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타인을 만났을 때 나는 신뢰를 조금씩 쌓는 스타일이고 친구는 100% 신뢰에서 시작해서 상황에 따라 조금씩 차감을 한다는 얘기였다. 선생님은 본인도 차감제로 살아왔다고 하면서 사람에 너무 치이니까 적립제로 바꿀까 한다는 말씀을 했는데 나는 두 방식 모두 일장일단이 있어 꼭 적립제로 한다고 해서 사람에 덜 치이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건 가지고 있는 성향에 따른 거라 쉽게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닐 거라는 데 우리 모두 동의했었다.
메이도프에게 뒤통수 맞고 큰 돈을 날린 것과 마코폴로스처럼 사기꾼 메이도프를 꿰뚫어봤지만 상대를 과대포장하여 총기까지 사면서 공포에 떠는 것, 둘 중에 어떤 게 더 나쁜 일이지 모르겠다. 하지만, 타인과의 관계없이 살아가는 게 불가능한 세상에서 단순하게 선택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는 것은 분명한 거 같다.
+ 이만한 두께의 책을, 추리소설도 아닌데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은 건 처음이다. 정말 흥미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