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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 - 무심코 읽었다가 쓸데없이 똑똑해지는 책
오후 지음 / 웨일북 / 2019년 7월
평점 :
고등학교 때 평균 점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3과목이 있었다. 물리, 지구과학, 수학! 그렇다. 나는 문과생이다. ^^ 그나마 수학은 단원별로 점수가 높을 때도 간간이 있었는데 - 미분, 적분, 행렬, 통계 등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 물리, 지구과학은 뭘 배우든 점수가 신통치 않아서 나도 나지만, 담임 선생님의 입시 지도까지 오락가락하게 만들었다. 같은 과학이래도 화학은 엄청 잘했고 -이건 거의 암기 과목이니까... ㅎㅎㅎ-, 생물은 재미가 없었지 도통 뭔 소린지 모르겠는 건 아니어서 과학 4과목의 점수는 거의 극과 극을 달렸으니까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수학이나 과학을 좀 다르게 접근한 책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뭔가 나에게 다른 길, 다른 방법을 보여주지 않을까 해서 인 거 같은데 아직까지 그런 책들하고 크게 성공적인 만남을 가진 건 아니었다.
책방난달에서 찾은 이 책도 그런 이유로 집어 들었는데 계산을 하고 나서 바로 옆 책장에 놓인 다른 책이 더 재미있어 보여 잠시 잘못 샀나 했다. 또 같은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가 싶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 책 재미있었다. 제목에 과학이 쓰여있지만, 딱히 과학 책이라고 한정 짓기에는 역사, 정치, 철학 등 건드리는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큰 편이고 저자의 재기 발랄함이 느껴져서 유쾌하게 읽을 수 있다. 책 속에서 던져주는 생각할 거리들은 결코 가볍지 않지만 말이다.

인공 비료 생산 이전보다 지구의 인구는 훨씬 늘어났고, 자연은 더 파괴되었으며, 우리는 너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식량 위기, 식수 위기, 혹은 경제 위기는 세계를 지옥으로 바꿀지도 모른다. 인류가 사라지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다. 사라지는 동안 서로에게 보여줄 잔인함이 두렵다.
-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 中 p.57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냥 먹고산다. 배고프니까 먹고, 먹어야 살 수 있는데, 우리가 먹는 것들이 어떻게 생산되고 그것에 어떤 기술이나 역사적 배경이 존재하는지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굶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식량의 대량 생산에 인공 비료가 필요하고 이 인공 비료는 질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질소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고, 나라의 국경이 달라진 데다 화학 무기 개발로까지 이어졌다는 걸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 정확히 말하면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 이 책은 이렇게 우리가 용어 정도만 아는 생활 속 과학 기술의 산물을 두고 그게 가지고 있는 역사와 정치적인 배경, 그리고 관계된 다른 사물들에 대해 흥미롭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아울러 이런 기술들이 구축한 세상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고민해야 되는 것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의 섭리를 어기고 산다. 문화 자체가 인위에서 시작한 것이다. 동물 세계를 통틀어서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고 한다면 인간이 부자연스러운 일들을 매우 잘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성소수자가 자연의 섭리를 어겼다 한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누구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피해는 많은 경우 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두고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는 다수가 준다.
-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 中 p.215
나는 불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불화가 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집에서도 식구들끼리 큰 소리가 나거나 하면 그냥 좀 그러려니 해주고 넘어가면 안 되냐는 얘기를 하는데 가끔 뉴스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나는 약간 그런 마음인 거 같다. 그러려니... 책을 읽으면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 간성이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고, 인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져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게 놀라웠다. 우리나라 대법원이 정한 성별 정정 허가 기준은 웃겼고... ^^
기본적으로 인간은 나랑 다른 존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취향이 다른 상대가 껄끄러운 적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성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배척하고 싶다면 이유는 어마 무시하다. 중요한 건 계속 내가 다수에 속해 있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냐는 거 아닐까? 회사에서나 개인적으로 어떤 사업, 프로젝트 등에 지원하려다가 자격 요건에서 나이나 연혁, 규모 등으로 좌절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한 번씩 고립된 느낌이 드는데 요즘 나는 내가 엄마(주부)도 아니고 청년도 아니라서 갑갑할 때가 있다. ㅎㅎㅎ 사회적으로 소수자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때는 다수의 기준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고 그 안에서 나도 얼마든지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좋겠다.
인간의 방식을 습득한 기계는 인간의 편견까지 그대로 물려받는다. 이전에 존재하던 소수자 배척은 빅데이터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그런 배척이 과학이란 이름으로 공정함으로 둔갑한다는 것이다. 물론 소수자가 얼마나 피해를 받는지도 빅데이터로 수치화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그런 연구를 할 수 있을까. 빅데이터가 과정이 아니라 효율만 찾아간다면 그 길은 필연적으로 차별로 흐르게 된다.
-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 中 p.318
몇 년 전부터 핫한 빅데이터. 그냥 용어만으로 대충 짐작하던 게 이 책 덕분에 명확해졌는데 이런 빅데이터 분석을 맹신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안 좋은 사례들이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들이 그렇듯 명암을 다 가지고 있는 빅데이터는 미국의 월마트의 허리케인이 지나가는 지점에서 딸기맛 팝타르트가 불티나게 팔리게 해 주었고, 서울시 올빼미 버스의 효율적인 운영 노선 지정 등에 도움을 주었지만, 선량한 관광객이 테러리스트로 체포되거나 좋은 평가를 받는 교사가 해직되게도 만들었다. 기술이라는 걸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는 걸 또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빅데이터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분명하고 저자가 보여준 대로 인생의 난제까지도 분석해 낼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이다. ^^
총 7개의 챕터는 식량, 단위, 플라스틱, 성, 우주, 빅데이터, 기상을 다루고 있다. 대충 알고 있던 부분이 자세히 들어가니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평소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는데 플라스틱과 기상을 다룬 챕터를 보고 나니 -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겠으나 - '포기하면 편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냥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피해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고 세상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책 뒤표지에 '빌 브라이슨도 울고 갈, 이토록 웃긴 과학 교양!'이라는 홍보 문구가 쓰여 있다. 전에 빌 브라이슨의 책을 본 적이 있는데 내가 느낀 게 맞다면 그도 이 책 좋아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후기에 구매 인증을 하면, 너무 길어서 책에 싣지 못한 두 챕터를 보내주겠다고 하는데 영수증을 버려서 어떻게 구매 인증을 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