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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 - 코미디언 무어 씨의 문화충돌 라이프
이안 무어 지음, 박상현 옮김 / 남해의봄날 / 2016년 5월
평점 :
오래 살던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 정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국경을 넘어서 벌어지는 일이 되면 정말 다른 차원이 이야기가 되는데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영국인 모드족 이안 무어는 임신한 아내와 아들, 키우던 개까지 데리고 프랑스의 작은 마을로 바로 그런 이주를 감행한다.
물론 그에게는 반은 프랑스인의 피가 흐르며 프랑스어가 가능한 아내가 있고, 아내의 조부모님이 프랑스에 계셔서 무어 가족의 정착을 돕기는 했지만 주차 공간 확보조차 피 튀겼던 영국 크롤리에서 프랑스 루아르 계곡의 작은 농촌마을로 이주해서 농장까지 꾸리는 건 상상으로도 쉽게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게다가 모드족으로 매사 자신의 스타일이 확고한 이런 사람이 말도 안 통하는 프랑스 시골에서 농장 일을 한다니...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정말 호기심 한가득이었다. ^^

저자인 이안 무어는 원래 작가가 되고 싶었고 스탠드업 코미디도 작가가 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으로 작가의 꿈도 이뤘는데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신랄하고 통렬한 문체가 읽는 내내 낄낄거리게 만든다. 원서로 읽으면 얼마나 더 거침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아이 중 유일하게 영국에서 태어난 새뮤얼은 셋 중에서 가장 '영국적인' 아이다. 물론 여기에서 '영국적'이라 함은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고, '새끼 bugger'라는 욕을 많이 한다는 뜻이다. 새뮤얼의 동생인 모리스와 테렌스는 둘 다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특히 제일 어린 테렌스는 (적어도 내 생각에는) 가장 프랑스인에 가깝다. 항상 자기 주장이 강하고 자신의 의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파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면에 모리스는 감성이 넘치고 예술가 기질을 타고나서 창의적이고, 자기 감정을 쉽게 표현한다. 하지만 그런 모리스도 프랑스 친구들 사이에서 앵글로-색슨의 본색을 드러낼 때가 가끔 있다. 가령 축구 연습 때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게 그렇다.
- 『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 中 p.55
프랑스에 이주하고 5년 사이에 태어난 아들 둘까지, 모든 자녀를 묘사하는 표현에서도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본업인 스탠드업 코미디를 계속하기 위해 일주일에 절반은 영국까지 출장을 다니는 이안보다는 아내 나탈리가 예민하고 섬세한 남편과 각기 다른 개성으로 무장한 세 아들, 그리고 말, 닭, 개, 고양이 등 농장의 모든 생명체를 보살피고 달래는데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하는 실질적이고 정신적인 지주이다. 남편에 세 아들이라니, 고양이라도 암컷을 키우고 싶어 했던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처음 해 보는 농장 일과 동, 식물을 돌보는 데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가족들의 저마다 다른 성향으로 인한 문제들, 그리고 영국과는 다른 문화적, 사회적인 차이 때문에 겪어야 하는 사건사고들, 모두 가끔은 멘탈을 붕괴되게 하고 쓸데없이 기운 빼거나 인내심에 한계가 오게 만들지만 저자는 때로는 거침없는 비난과 비판으로, 때로는 인내와 끈기로, 결국(?)은 포기와 인정으로 적응해 나간다.

… 내 생각에 프랑스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파리지앵, 즉 파리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다른 프랑스인들을 수준이 낮다고 내려다본다. 두 번째 그룹은 파리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프랑스인들이다. 이 사람들은 파리 사람들은 진정한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이 있으니, 레퐁시오네르 les Fonctionnaires, 즉 공무원들이다. 파리 사람들과 '진정한' 프랑스인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집단이다.
- 『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 中 p.341~342
서류를 잔뜩 들고 도청에 도착한 우리는 번호표를 받고 호명을 기다렸다. 대기실은 혼잡했다. 우리가 겪은 그 모든 과정을 그대로 겪은 사람들(이 사람들은 프랑스 자동차를 산 프랑스 사람들이었는데도 그랬다)이 삶의 희망을 잃고 모여 있었다. 우리가 외국인이라서 특별히 괴롭히는 게 아니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미워하는 게 프랑스의 관료주의이다.
- 『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 中 p.344
단연 하이라이트는 영국에서 산 자동차를 등록하기 위해 두 부부가 프랑스의 공공기관, 공무원과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였는데 한 번씩 우리나라 공조직도 속 터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럴 때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는 거 같다. (그런데 최장 3년 동안 프랑스 정부에서 지원하는 유급 육아휴가는 좀 부럽더라. ^^;;;)
저자와 그 가족이 겪는 이 모든 과정을 읽어나가면 고개가 끄덕여지고 같이 속이 답답해지기도 하지만, 결국 미소를 짓게 된다. 약속된 날짜가 별 의미 없는 공사들, 유달리 동물들에게 마음 약한 나탈리에게 쏟아지는 동물 구조 요청, 이안에게만 일어나는 동물들과의 트러블까지 남이 속 터지는데 껄껄 웃고 있는 게 살짝 미안하기도 한데 저자도 모든 후회는 집에 돌아와서 5분 사이에 사라진다고 하니 그 순간에 어떤 마음이었던지에 상관없이 결국 그도 웃었을 것이다.
한국 독자들을 위한 서문과 미니 인터뷰가 별도로 있는 것을 보고 역시나 저자는 세심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번 더 했다. 코로나19로 그의 멀고 잦은 출장 여정도 일시 멈춤 상태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래도 농장에서의 유쾌한 일상은 계속되고 있을 거 같다. 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어서 다시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