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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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 자격시험 바칼로레아에서 떨어지고 노인 요양원 수레국화에서 일하게 된 열여덟의 그레구아르. '곁가지 문학' 서점을 운영했던 요양원 거주자 피키에 씨와 가까워지면서 그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다. 고된 업무에서의 탈출구로 시작된 낭독은 점점 그레구아르를 책에 빠져들게 만들고 피키에 씨의 코치를 받으면서 사적인 모임이었던 낭독 시간은 전체 거주자와 방문 가족을 위한 이벤트로 자리 잡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죽음을 예감한 피키에 씨는 요양원에서 250킬로미터 떨어진 퐁트브로 수도원까지의 순례와 낭독을 그레구아르에게 부탁한다. 여정을 시작한 그레구아르는 이마저도 요양원 운영에 이용하는 마송 원장의 행동에 화를 내고 그 통화를 마지막으로 연락을 끊는데...

 

 

생일선물로 읽고 싶은 책 얘기하라고 할 때 바로 떠오른 책이 이거였다. 공교롭게도 또 프랑스 작가란 말인가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읽었던 프랑스 소설과 소재 자체가 달라서인지 늘 느꼈던 문화적 거리감은 거의 없었다.

공부랑 책이랑은 담을 쌓고 살았던 그레구아르, 어려웠던 형편의 그늘에서 늘 고생하고 소극적이었던 어머니와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버텨나가던 그는 피키에 씨와 책, 그리고 낭독을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바로 보고 불합리한 처우와 사회에 맞설 의지를 얻는다. 

 

"… 너는 금세 푹 빠져들게 될 거다. 텍스트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는 건 정말 짜릿하고 감동적이니까. 어떤 한 단어 때문에 이전에 읽은 어떤 책의 어떤 단락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문학을, 밀려갔다 싶어도 매번 새롭게 태어나면서 끊임없이 되밀려오는 집단창작물이라고 생각하렴. 만약 요행히 그게 인생과 직결된다면, 거기서 너는 걸작을 만나게 되는 거야."

-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中 p.112

다행히, 반항심과 분노가 불쑥 치민다.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때처럼 우리가 정말 두려울 때 손을 맞잡을 수도 없다면, 이 사회는, 이 모든 전문적인 의료기술들은 도대체 왜 존재한단 말인가?


-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中 p.141

혼수상태에 빠진 모렐 부인을 실은 구급차가 긴급할 게 없다고 사이렌도 울리지 않고, 회전 경광등도 켜지 않는 장면은 약간 충격이었다. 죽음이 임박했으니 긴급할 게 없다는 게 논리적인 건가? 구급차는 무조건 사이렌과 회전 경광등이 기본이고 언제든 차선 양보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었는데 이미 코마 상태인 환자, 곧 죽음이 자명한 환자라고 아무런 신호도 없이 그냥 그렇게 이송된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임박한 누군가가 그저 이번 차례에 해당되는 번호표 받은 사람처럼 치부되는 것, 이건 좀 아니다 싶으면서 그레구아르의 분노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레구아르는 재봉일하는 어머니가 당하는 부당한 대우도 참지 않는다. 무수한 세월을 그저 견뎌온 어머니도 결국 그레구아르의 행동을 정말 잘한 일이라며 지치고 서러운 울음을 터뜨린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가 되고 그런 권리를 누군가에게 주게 되면 그 사람은 사람이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게 된다. 대체 왜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살도록 그냥 두지 않을까?

 

"네가 옳다고 믿고, 확신에 가득찬 무언가를 위해 행동에 나설 때 말이다. 타인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야심을 품는 건 문제가 있어. 근본적인 문제가. 손을 놓는 순간, 바로 그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지. 예를 들어 네가 서점을 운영한다고 치자. 너는 다른 누구보다 먼저 신간을 읽지. 그런데 남들보다 먼저 읽고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결정하는 건 시건방진 짓이야. 무슨 자격으로 그걸 결정해? …"


-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中 p.52

책을 읽으며 새로 태어나는 기분을 느끼는 그레구아르에게 피키에 씨는 독서를 계속할수록 독단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책은 우리를 타자에게로 인도하는 길임을, 그리고 자신보다 나와 가까운 타자는 없기에 책을 읽는 것은 자신과 만나기 위해서임을 이야기한다.

피키에 씨의 의도와는 좀 다르지만, 나도 책과 사람과의 잘못된 만남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에게 좋다고 다른 모두에게 좋다는 보장이 없어서 이렇게 리뷰를 쓸 때마다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막 좋다고 쓰기도 그렇고, 아주 별로라고 쓸 수도 없고, 솔직함의 경계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 그래서 가끔 내가 쓴 글을 보고 그 책을 읽고 싶다는 친구에게 나의 감상임을 감안하고 읽으라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책을 볼 때 누군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아, 이 책은 000이 좋아하겠다. 재미있어하겠다.' 이런 기분이 정말 강해져서 권한 책을 당사자가 즐겁게 읽었다고 하면 그때는 진짜 기쁘다. 이건 책과 사람의 천생연분 같은 만남인 건가.

그레구아르의 성장기이지만, 그 안에서 동성애, 고령화, 요양원 같은 의료 시스템, 배척을 내세우는 무례한 극우 세력 등 프랑스 사회에 대한 작가의 생각도 엿볼 수 있다. 작가 마르크 로제는 직업적인 낭독가다. 그래서 이 소설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나 했는데 순수한 허구라고 한다.

책을 한 권 읽었지만, 무수한 작가들과 작품들을 접한 느낌이 드는 건 그레구아르가 책 속에서 책을 읽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 이다음에 읽고 싶은 책을 떠올렸다면 이 책과의 만남은 성공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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