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건축을 전공한 사카니시는 존경하는 건축가 무라이 슌스케의 설계 사무소에 채용된다. 동경하던 건축가와 일하게 된 카니시는 연필 깎는 법부터 사무소의 방식을 배워 나간다.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에 참여하게 된 사무소는 준비를 위해 모든 직원이 힘을 기울이고, 늘 해 오던 대로 여름을 보내기 위해 가루이자와의 별장으로 옮겨 간다. 여름 별장에서의 합숙으로 상사와 동료들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고, 건축가로서도 한층 성장하게 된 사카니시는 무라이 슌스케의 신임을 받는다. 경합을 얼마 안 남겨 두고 최종 정리를 위해 단둘이 내려 간 여름 별장에서 이동 중에 무라이 슌스케가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 설계 경합 참여는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다.

읽으면서 작가가 건축가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아무리 건축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해도 실제 자신의 직업도 아닌 부분을 이렇게 잘 다룰 수 있다는 게 참 감탄스러웠다. 저자는 '건축에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설계도집도 찾아보고 관련 서적도 곧잘 읽었기 때문에 이 소설을 위해 특별히 취재할 필요는 없었다'고 하니 대단하다. 더군다나 데뷔작인데 말이다.

 

 

화자인 사카니시는 건축이든 일이든 무리하게 진행하지 않고 조화와 세심함이 돋보이는 무라이 슌스케의 건축을 동경한다. 설계 사무소에 입사하기 전부터 그의 건축물을 찾아보고 실측하는 등 관심과 애정을 쏟는다. 처음 경험하는 여름 별장 근무를 통해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부인 말고 다른 여자가 있고, 그 여자를 위해 농장을 지어 그곳을 직원에게 관리하게 했으며 그 업무가 곧 자신에게 넘어올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그 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큰 집이라고 해도 모든 것이 밝고 넓으며 공적인 공간으로 하지 않은 것도 선생님이 만드시는 주택답다. 열린 곳은 마음껏 열고, 닫을 곳은 닫는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주절주절 말할 때와, 멍하니 혼자 있을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거릴 때, 여러 가지 상황에 놓이는 것이 인간이니까, 방도 거기에 맞춰 역할을 분담하는 게 좋다, 고.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中 p.271

어떤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랬던 거 같다. 사카니시가 가르침에 따라 연필을 깎고 선을 긋고 모형을 만드는 것을 활자로 따라가면서 함께 연필을 깎고 선을 긋는 느낌이었달까. 여름 별장에서 불을 피우기 위해 장작을 쌓는 장면에서도 함께 장작을 쌓고 불을 피우는 기분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고 단정한 작가의 문체 덕분에 오히려 상상력이 자극된 덕일 지도 모르겠다. 읽을수록 건축뿐 아니라 새, 식물 등 자연과 음식 등에도 작가의 조예가 깊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라이 슌스케는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라고 말한다. 때문에 사카니시는 건축은 준공되고 나서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고 생명이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 열정과 능력을 발휘했던 국립현대도서관의 모형처럼 그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사카니시의 건축가로서의 여정 안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