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낙태 여행 - Journey for Life
우유니게.이두루.이민경 외 지음 / 봄알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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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 함의와 변화를 촉구하는 문제 의식, 우당탕탕 여행 에세이의 장점을 모두 종합해놓은 책이다.


책의 첫인상은 자극적이다. 검은색 바탕에 하얀 고딕 글씨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써놓은 제목이 눈에 띈다. 사실, 나도 지하철에서 책을 들며 읽는 와중에 종종 책의 표지를 가리기도 했다. 책의 제목이 부끄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낙태'라는 글자를 보고 누군가 내 머리를 갑자기 후려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서였다. 피해망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른바 '묻지마 폭행'(^^)이 워낙 많이 일어나는 시국이라 불특정 다수가 모인 대중교통에서는 방어기제가 발동된다. '낙태'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고 부정적이며 거친 느낌을 준다. 이 책을 쓴 출판사 봄알람의 멤버들은 이를 겨냥해 부러 '임신 중단', '임신 중지'라는 표현 대신 '낙태'를 썼다. 대중이 더 널리 쓰는 단어 '낙태'에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걷어내고자 함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책 표지 색이 먹색인 건 단순히 제목을 눈에 띄게 하려는 의도뿐만 아니라 낙태죄 폐지 운동을 가리키는 '검은 시위'를 상징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한국은 근대화 시기 일본법을 받아들이면서 1953년부터 낙태죄가 존재했다. 2019년 4월, 낙태한 여성과 낙태술을 시행한 의사를 처벌하는 낙태죄 항목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리면서 낙태죄 폐지를 향한 여지와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2020년 10월, 정부는 낙태죄를 유지하되 임신 14주까지는 낙태를 허용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어정쩡하게 눈치만 본, 실효성 없는 법안이다. 한국에서 중절 수술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수술 희망자이자 대상자는 주로 기혼자들이다. 낙태죄는 사실상 사문화된 법인데, 2020년에도 낙태죄를 존속하겠다는 정부의 결정은 여성의 신체결정권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겠다는 가부장적 억하심정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나는 한국보다 여성 인권이 '그나마' 발전한 유럽에선 여성의 신체가 '그나마' 존중받고 있겠지 하고 기대를 품었다. 유럽 여행을 하면 <비포 선라이즈>처럼 로맨틱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처럼. 하지만 페미니스트의 기대는 언제나 배신당한다. 프랑스의 활동가 플로랑스의 말대로 '여성의 권리가 온전히 얻어진 곳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절절히 느꼈다. 낙태가 합법인 네덜란드에서는 지정된 병원에서만 수술을 해야 하고(수도 암스테르담에는 낙태 병원이 없다. 네덜란드 전역에 12곳뿐이다.), 낙태권을 투쟁으로 얻어낸 프랑스는 극우 진영의 낙태 불법화 위협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유토피아는, 허랜드는 남성이 권력을 쥔 종교와 제도가 있는 한 양립이 불가하다.

설령 임신 9개월이 됐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그러겠다고 결정하면 할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 - 마리 클로드

낙태를 할 때에는 무대에 여자만이 존재한다. 그 상황을 감당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면 그는 돌연 아빠의 아이가 된다. 어쩌면 이게 여성의 낙태를 그토록 다 함께 손가락질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국가와 남성의 재산인데 그것에 대한 선택을 여성이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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