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림을 만날 때 - 개정판
안경숙 지음 / 휴앤스토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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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후'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가.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한 분야에 깊이 파고드는 사람들을 일컬어 '오타쿠', 우리나라에서는 '덕후'라는 용어로 통용해 부르곤 한다. 일본에서 '오타쿠'는 '사회생활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까지 곁들어져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고, 처음 우리나라에 오타쿠 문화가 등장했던 2000년대 초반에도 덕후는 마이너 문화의 부정적인 상징이었다. 허나, 아이돌 문화가 한류의 중심이 되고, 다양한 소셜 매체에서 다양한 분야의 덕후들이 자기고백(?)을 하면서 한국의 덕후들은 문화를 이끄는 소비 주체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나는 이 책의 저자 또한 그림 덕후의 길을 앞서 걸었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쓴 안경숙 저자는 불어불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외국 기관에서 근무 중인,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닌 비전문가다. 허나 《삶이 그림을 만날 때》에 담뿍 담긴 저자의 그림을 향한 사랑과 감동, 해박한 지식을 쉴 새 없이 마주치다 보면, 저자가 비전문가라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조차 머쓱해진다. '그림에 스며든 음악'을 소개하는 4부에서는 저자가 클래식과 연관된 그림을 소개하기도 하고 그림에 어울리는 곡을 덧붙이기도 하는데, 이 부분에서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은 저자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삶이 그림을 만날 때》는 순수하게 그림을 사랑하는 저자가 그림에서 위로받은 경험들과 그림 속에 담긴 이야기를 80여 종의 그림을 통해 펼친 그림덕후의 책이다.


 총 5부로 구성된 책은 휴식, 사랑, 자연, 음악, 삶을 주제로 그림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장마다 유명인의 명언이나 책 속 문장을 소개해 장에 들어갈 이야기를 짐작하게 한다.(이 명언과 문장들을 읽는 중에도 놀랍고 가슴 깊이 와닿았던 때가 많았다.) 앞서 언급했듯 내겐 '그림에 스며든 음악'을 타이틀로 삼은 4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히 차이코프스키, 슈베르트, 쇼팽, 베르디, 베토벤, 리스트 등 당대 유명 음악가들의 초상화를 연달아 볼 수 있는 대목이 압권이다. 그밖의 장에서는 고흐의 알려지지 않은 그림들,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들, 모네의 빛의 풍경화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로코코 시대 그림들 등속 저자의 취향을 따라 다양한 그림들을 소개한다.


 흔히 '그림의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우선으로 삼고 책에서 앞다투어 소개하다 보니, 내가 그간 접하지 못했던 그림들이 참 많았구나 느꼈다. 내가 접하지 못했던 그림이란, 이를테면 익숙하게 봐왔던 여성 신체 성적대상화가 아닌 남성 신체 성적대상화를 볼 수 있는 그림 말이다. 주 고객층이 동성애자 작품 수집가였다는 헨리 스콧 튜크의 그림이나 성 지향성을 의심 받은 적 있다는 프레데리크 바지유의 그림을 보면, 남성들의 나신도 이렇게 매끈하게 혹은 열렬하게 그릴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같이 유리처럼 맑거나 도자기처럼 미끄러지는 피부를 지닌 여성 신체만 보다가, 남성 신체를 소재로 삼아 주제를 펼친 그림들을 알게 되니 참 신선했다.


 내가 접하지 못했던 그림들을 또 말해보자면, 신화나 성서를 주제로 삼지 않아 '소박하다'고 일컬어지는 그림들이 있다. 미술사에서는 혹은 서양사에서는 그런 그림들을 소박하다고 평할 지라도, 내겐 어떤 그림보다 평화와 즐거움을 선물해준 그림들이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입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강아지와 함께 한 그림들에 눈이 사로잡히곤 했는데, 에드윈 랜드시어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반려인만이 느낄 수 있는 감성에 흠뻑 빠졌던 기억이 난다. 덧붙여, '나무 화가' 테오도르 루소의 풍경화와 동심의 세계를 그린 앙리 쥘 장 조프루아의 귀여운 그림도 추천해주고 싶다.


 《삶이 그림을 만날 때》는 2013년 북웨이에서 처음 출간됐고, 독자들의 성원에 힘입어 올해 휴앤스토리에서 리커버되어 개정판이 출간됐다. 내가 읽은 책은 리커버 개정판이었다. (참고로, 책표지에 실린 그림은 폴란드 출신의 화가 타마라 드 램피카의 자화상 <녹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이다.) 예술책에 관심이 없거나, 예술책에 다가서기 힘든 분들도 읽기 쉽고 공감하기 쉬운 책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지 않았나 짐작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책은 역시 독자들이 가장 먼저 알아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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