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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사랑했네
이정하 지음 / 자음과모음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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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해보았는가?'라는 물음에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라고 하는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아마 거의 대부분이 '사랑을 해보았다'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극소수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사랑보다는 단지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좋아한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없지만 나는 그냥 내 느낌으로 구별하고 싶다. 또한 이 시집에서 내가 느낀 사랑이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심원하고 지금의 나로서는 느낄 수 없는 성역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라고 하면 가지각색의 대답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을 사랑했네'라는 이 시집에서는 사랑은 고독이라고 본다. 고독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갖는 게 아니라 지켜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 시집에서의 사랑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게 느껴지는 지도 모른다.

사랑을 얻는다는 건
너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아니었으므로.
너를 체념하고 보내는 것이었으므로.
-책 속에서(p. 13)-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나는 더 철저하게 외로워지나 봅니다.
-책 속에서(p. 46)-

그랬다, 사랑이라는 건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해지는 것.
-책 속에서(p. 60)-

지켜보는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 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짝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어렸을 적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풋사랑을 회상해보면 이런 사랑이 마음에 더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현대의 일회적인 사랑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이라면 오늘 한 번 이 시집을 읽어 보길 권한다. 사랑에 빠져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밤을 설치는 일이 없는 이 시대에 이 시집의 시는 나에게 너무 다가온다. 사랑은 때론 눈물의 결정체이고 때론 그리움의 결정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지요, 당신을 생각하면
왜 쓸쓸함이 먼저 앞서오는 것인지.
따스한 기억도 많고 많았는데
그 따스함마저 왜 쓸쓸하게 다가오는 것인지.
-책 속에서(p. 50)-

'한 사람을 사랑했네'라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쓸쓸함, 고독감, 허전함이 이 시집에는 왠지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붉게 여문 과일들이 수확의 시기가 다가오면 여문 과일 나무에는 한 줌의 과일도 남지 않고 앙상한 가지만이 남은 그 모습이 왠지 이런 감정을 더욱 부추기는 것 같다.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아름답다'라는 말이 더욱 슬피 느껴진다. 떨어지는 가을 잎사귀가 더욱 생각난다.

사랑이라는 어휘의 표면만으로 사랑을 이해했다면 당신은 이 시집을 통해 사랑이라는 어휘의 내면을 이해했길 바란다. 현대의 남발되는 사랑이라는 어휘를 이제는 진심으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은 단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느껴지는 것만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고 느껴지는 사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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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지음, 이희재 옮김 / 김영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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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 가고 역사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만드는 역사 속에는 수많은 문명들이 존재했고 수많은 문명들이 흥망을 거듭해왔다. 특히 이 문명들이 인간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은 재고해 봐야 할 점이다. 그리고 이런 고찰을 통해 세계를 보는 것은 우리에게 다른 미래상을 제시해준다. 지금, 그 미래상(편협된 미래상이지만)을 <문명의 충돌>이라는 사뮤엘 헌팅턴의 저작을 통해 알 수 있다.

우선, 문명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간략한 정의를 내리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문명이라고 하면 대부분 국가 단위 또는 그 단위를 넘어서 발생되는 총체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정치·사회 구조, 종교, 인종, 가치 등을 문명의 요소로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사뮤엘 헌팅턴은 21세기 국제 사회를 바라보는 신패러다임으로서 '문명'을 든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국제 사회를 바라볼 때, 주요 관찰 대상은 국가라는 일원적인 단위(국가 중심적)였다. 이런 일원적인 단위만을 가지고 보는 패러다임에서 가장 고전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현실주의였다. 물론 현실주의 말고도 국가라는 단위에서 벗어난 국제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이론인 자유주의적 관점도 있었다. 하지만 이 패러다임 또한 국가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헌팅턴이 제시한 문명이라는 것은 국제 정치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헌팅턴이 상당한 현실주의자인 동시에 서구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고 상당한 냉전적인 사고 방식을 통해 문명을 보고 있다는 것은 그의 이론에 대한 반론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의 이론에서 헌팅턴은 전세계를 7개의 문명으로 나눈다. '서구 기독교 문명, 동방 정교 문명, 이슬람 문명, 인도의 흰두 문명, 일본 문명, 유교 문명'

전쟁은 이런 문명들의 단층선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문명의 충돌이론의 핵심이다. 즉, 전쟁이라는 것이 단지 국익, 안보 같은 것 때문이 아닌 문명이라는 요소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문명간의 전쟁에서 중요한 것으로, 위에서 문명을 나눌 때 봤듯이, 종교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명들 속에서 가장 중요한 문명으로 헌팅턴은 서구 기독교 문명을 들고 있고 서구를 중심으로 이론을 펼쳐나간다. 특히 서구와 이슬람의 대립을 중심으로 펼쳐나간다. 그래서 그런지 이슬람 문명을 피의 경계선을 가진 문명으로 설정한다.

특히, 이런 이슬람과 서구의 대립을 단지 이슬람 문명 하나만이 아닌 다대(對)일적인 모습으로 본다. 즉 서구와 비서구라는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세계를 편향되게 본다. 이것은 앞서 말한 냉전의 사고 방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 냉전 기간 동안, 소련과 미국이라는 양극으로 세계를 분할한 것과 같은 것이다.

헌팅턴의 이론은 앞서 말했듯이 너무 서구 중심적이다. 또한 너무 현실주의적이다. 단지 문명이라는 것을 자신의 이론의 도구로서 사용했다는 느낌이 든다. 구시대적 사고 방식에 빠진 헌팅턴은 이제 더 이상 나아갈 곳은 없다. 더 이상 서구 대 비서구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헌팅턴의 이론에 대한 반론으로 '문명의 공존이' 나온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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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전쟁과 평화
이리에 아키라 지음 / 을유문화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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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아마 이 단어들은 우리 곁을 떠난 적이 항시도 없을 것이다. 인류의 가장 고귀한 가치인 평화가 지구 둘레를 선회하고 있지만 전쟁이라는 상반된 가치 때문에 인류는 끊임없이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부상시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20세기의 전쟁과 평화>라는 이리에 아키라 선생의 저작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로의 회귀를하게끔 만든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류의 전쟁사 아니 평화사를 확인해 보고 싶은 우리들의 욕망이라기 보다는 인류 전체의 욕망때문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21세기에는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요원인 평화보다는 전쟁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특히 각 대륙의 강대국들은 대륙을 점하기 위해 또는 인종이 종교, 문화 등 다른 요인들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간헐적으로 또는 지속적으로 이웃 국가를 침략하고 정복해왔다. 하지만 이런 세계사 속에서 진정으로 정복당하는 것은 한 국가의 물질적이고 표면적인 경제나 사회 구조뿐이었다. 그런데도 강대국들은 끊임없이 침략을 자행해왔다.

특히 강대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던 1940~50년대의 냉전 기간은 국제사회에 긴장감마저 돌게 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극으로 국제사회가 분할되어 인류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이런 일촉즉발의 활화산 같은 경우는 없겠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화산 같은 테러나 민족성을 내세운 지역간의 간헐적인 분쟁은 인류가 아직도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리에 아키라 선생은 이런 침략이나 분쟁에 대한 전쟁사를 보기 전에 간단히 서론에서 다각도로 분석을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단순히 소위 상위 정치(high politics)라 불리는 군사·경제적 측면이 아닌 하위 정치(low politics)적인 측면을 두루 섭렵해서 말하고 있다.

하위 정치란 이번에 방한한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조셉 나이 원장이 주창한 연성 권력(soft power)과 비슷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화·종교·사회·정신 등 어떻게 보면 평소 우리가 접하는 요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하위 정치 요소들은 정말로 전쟁사 또는 평화사에 큰 역할을 해 왔을가?

과거에는 이런 하위 정치 요소들은 상당히 경시되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홉스적 사고를 통한 현실주의라는 국제정치 패러다임에 의해 국제사회는 조망되고 연구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하위 정치 요소는 경시될 수 밖에 없었지만 현재는 이 부분에서 많은 연구 성과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에 나온 책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은 하위정치 요소를 통해 국제사회를 바라보고 그것을 통해 분석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많은 이견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문명이라는 것을 통해 국제사회를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이전의 많은 국제정치 패러다임-현실주의, 이상주의. 자유주의, 구조주의-이 아닌 문명이라는 하나의 요소를 통해 전쟁과 분쟁을 분석하고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리에 아키라 선생도 문명보다는 폭이 좁은 문화를 잠깐 언급하면서 전쟁과의 상관관계를 약술했다.

그렇다면 이런 폭녋은 주제에 대해 이리에 아키라 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 전체적인 전쟁사를 통해 전쟁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모색해야하는 것이 이책이 말하고 싶은 것일 것이다. 특히 9장과 마지막 장의 비정부단체(NGO)에 대한 것은 최근의 사회가 단지 국가라는 일원적인 존재에 사회가 돌아가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비정부단체 또는 그 외의 다국적 기업같은 국경을 초월한 조직들에 의해 사회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21세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리에 아키라 선생의 저작인 <20세기의 전쟁과 평화>를 통하여 단지 전쟁이 권력의 욕구때문이 아니라는 것만을 알았다하더라도 당신은 아마도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알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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