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법칙 - 반양장
허브 코헨 지음, 강문희 옮김 / 청년정신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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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에서 협상이 무려 8할이나 된다고 한다. 인생이란 그처럼 협상의 연속이다. 단순한 말다툼에서 논쟁에 이르기까지 협상이란 알게 모르게 존재한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용돈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생활 속의 가장 대표적인 협상의 예다.

자식이 용돈을 올려주면 성적을 끌어올려 보겠다고 하면 분명 부모는 자식의 용돈을 올려줄 가능성이 증가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무작정 용돈을 올려달라고 할 때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또 광고지 전단 속에서도 협상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신문에 딸려오는 광고지들을 보면 '파격세일', '특가' 등 소비자들을 현혹시킬만한 광고로 무장하고 있다. 또한 플러스 알파의 위력은 대단하다. 즉 한 상품을 살 경우, 덤으로 주는 상품의 양과 질, 가격 할인의 정도는 놀랄만하다.

이런 상품 판매의 기술들은 모두 협상 기술을 잘 응용한 것이다. 협상이란 정보, 시간, 힘에 의해 좌우된다. 상품 광고가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은 시간이다. 할인 판매나 특가의 경우 모두 일정 기간에 한한다. 이런 이벤트성 할인은 아마도 상품 회사의 주 수입원이 된다. 왜 백화점, 할인마트에서 이벤트를 많이 하는 것일까? 왜 그런 곳의 상품은 다른 곳보다 싸게 팔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모두 이벤트를 통한 충동구매를 자극하여 이익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플러스 알파 상품이란 이익 극대화의 주 수단이다.

예를 들면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두 개를 1/2의 가격으로 준다고 보자. 여기서 광고는 50%란 점을 강조한다. 소비자들은 50%에 끌리지 햄버거 한 개의 가격인지 두 개의 가격인지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숫자에만 끌린다. 이것은 다른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하나를 30%에 파는 것보다 싸지 않다. 왜냐하면 위의 경우, 햄버거 하나의 가격은 25%에 팔기 때문이다. 두 개를 살 경우, 50%이지 한 개를 살 경우 50%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광고의 시각적 효과에 머무르고 말고, 패스트푸드에서 일정기간이라는 시간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협상의 기술은 아마도 광고 회사와 상품 회사가 가장 많이 이용할 것이다. 그리고 우린 그 협상에서 항상 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이 책을 통해 협상의 좌우 요건과 협상에서 이기는 법을 배운다면, 충동구매의 욕구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협상이 이익을 좇기 보다는 합리성을 좇는 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협상이 항상 한쪽을 패하게 해야 내가 이길 수 있다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의 경우는 아마도 비제로섬 게임이다. 양자 모두 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용돈과 성적이라는 것으로.

이 책을 보면서 협상을 필요악으로 보기 보다는 삶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협상이란 서로에게 좋은 수단이 될 것이다. 협상이란 양자에게 악한 측면보다는 선한 측면이 많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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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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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는 매우 친숙한 단어이다. 드라마, 가요, 서적 등에서 빠지지 않는 단어이고 언제나 화제를 몰고 오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고 그렇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요즘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랑이라는 것이 소비, 시청률, 판매량 등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어버린 사랑. 사랑의 진리를 상실해버린 사랑.

이런 사랑에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는 우리에게 유치하다고만 생각했던 어릴 적 순수한 사랑을 일깨워 주는 책이 있다. 바로 <독일인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것인지 알려준다. 서로간의 감정이 휘발유에 불 붙듯 확 일어났다 확 사그라지는 그런 사랑이 아닌, 모닥불처럼 아주 고요히 하지만 매우 아기자기하고 움직임 하나 하나에 생명이 깃 든 사랑을 보여준다.

이 책은 매우 작은 책이다. 손에 딱 들어 갈 만큼 작아 귀엽기 그지 없다. 하지만 작은 책이라고 얕볼만한 한 책이 아니다. 내용이 너무 고결하고 순수한 사랑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풀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랑을 풀어내는 저자의 주요 모티브는 회상, 죽음, 순수로써 요약될 수 있다. 특히 주인공이 사랑하는 후작 부인의 딸, 마리아의 죽음으로의 과정은 그 사랑의 순수함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처럼 저자가 순수한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죽음을 앞 둔 마리아와 주인공 간의 대화이다. 대화를 통해 사랑이라는 것을 순수한 말로써 표현하면서 서로간의 감정을 고요히 느낀다. 그 고요한 사랑은 저자의 말솜씨에서 맘껏 볼 수 있다. 이런 대화는 어쩌면 죽음을 앞 둔 마리아의 고통을 줄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대화는 주인공의 고결하고 순수한 사랑을 고백하는 과정이다.

어렸을 적을 회상하면서 마리아와의 첫 번째 만남의 느낌을 잊지 못하는 저자에게 지금 대화로서 그 느낌을 풀어나간다. 후작 부인의 딸이라는 마리아의 위치는 주인공에게 아무런 필요가 없다. 어쩌면 저자의 의도가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은 비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사랑 자체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이 담긴 것이다. 이런 저자의 생각은 책 속에서도 끊임없이 나온다. 그 만큼 사랑이라는 것이 현대의 일회성 사랑이 아닌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감정의 교류라는 것이다.

회상, 사랑,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모든 요소를 보여준다. 회상을 통한 순수함, 사랑을 통한 사랑 그 자체, 죽음을 통한 고결함. 사랑의 요소라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어떤 사랑에 있어서든 빠질 수 없는 요소인 것만은 확실하다. 사랑은 너와 내가 우리가 되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은 서로에게 무언가가 될 수 있는 정신적인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서 녹아 들어가야 할 것이다. 수단들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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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노예
로버트 라이시 지음, 오성호 옮김 / 김영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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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성공은 무엇일까? 부의 획득, 화려한 미래, 안락한 생활 등.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의 이런 물질적 측면 뿐만 아니라 정신적 측면까지 살펴보자. 그럼, 과연 성공은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아마도 정신적 피로, 가족과의 함께 하는 시간의 소멸, 정신없는 일상, 날로 더해 가는 심한 압박감 등 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편하고 안락하게 살 것을 주문하는 책들(느림의 미학,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등)이 많이 나오고 있고, 출간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베스트셀러 대열에 낀다. 이런 경향 때문인지 요즘 들어 삶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는 내게 많은 궁금증을 던져준 책이 있었다. 바로 <부유한 노예(원제: 성공의 미래)>라는 이 책이었다. 미국의 한 장관의 갑작스런 사임 결정의 이유가 가정으로, 즉 일보다는 삶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아쉽게도 내가 처음에 원했던 '삶을 위한 삶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해주진 못하고 있다. 하지만 명쾌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이런 현실 속에 우리는 경제적 이익보다는 좀 더 도적적이고 가족적인 생활을 해야한다고 결론에서 얘기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의 현실이 어떻기에 저자는 책의 제목을 '성공의 미래'라고 했으며 왜 도덕적·사회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을까? 한 번 저자의 생각 속에 잠시 들어갔다 나와보자.
미국의 신경제 아니 이제 전세계적인 조류인 정보화 속에서 소비자들은 더 싸고 더 좋고 더 빠른 것을 원하고 있다. 이런 소비자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기업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소비자를 부여잡기 위해 항상 긴장감 속에서 소비자들의 물질적 측면 뿐만 아니라 정신적 측면까지 고려해야한다.

이런 상황은 자연히 사람들에게 혁신을 종용하며, 20세기의 예측 가능한 미래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즉 이제 모든 사람에게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이로 인해 현재 자신의 지위와 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려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혁신을 종용하는 소비자와 혁신을 해야만 하는 기업들의 작용·반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행해지고 있다. 이런 신경제 속에 더 이상 안정된 직장은 없으며, 자신의 수입은 보장되지 않는다. 더 이상 자신이 속한 기업이 자신의 브랜드일 수 없다. 이제는 한 개인인 살아있는 브랜드이다. 정말 냉혹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브랜드라는 것은 항상 자신의 능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며, 그 능력이 자신의 수입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냉혹한 현실에 부담(?)을 느낀 저자는 아마도 자연으로의 회귀처럼 가정으로 돌아간 것인 줄도 모른다. 그리고 한 개인의 관심과 취미 영역 조차 마켓팅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에 삶의 의미를 상실했는 줄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사회의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진정으로 의미있는 삶은 가정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공의 미래란 너무나도 냉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게 바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저자는 결론에서 현실과 삶에 대한 이상을 절충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한 개인의 표면적이고 육체적인 측면만이 마켓팅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이제는 내적이고 정신적인 측면까지 확대된 것이 정말 번역자가 선택한 제목처럼 우린 이미 '부유한 노예'가 되어있는 줄모 모른다. 오늘 한 번 생각해보자. 행복,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상실되 있는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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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라는 이름의 타인
양혜영 지음 / 올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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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우울하다. 형제, 그 얼마나 친근한 말인가? 험악하고 믿을 수 없는 세상에 형제밖에 없다는 말처럼 형제는 소중하고 친근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는 말이다. 누구나 그랬듯이, 동생이 형하고 싸우면 동생편을 들며 동생과 같이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연(緣)이란 그리 쉽게 맺어지는 것이 아닌 듯 하다.

동생편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지라도, 꼭 한 번은 동생을 같이 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도 있다. 동생과 나는 형제인데. 아무리 형제라도 경쟁 의식을 같고 있고, 이런 경쟁 의식은 때론 열등감을 불러일으킨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모성애, 공부 등.

왜 형제는 이러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런 형제간의 애증(?) 관계를 다루고 있다. 동일한 환경에서 자라는 형제가 왜 다르게 커가며, 그 속에서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형제간의 애와 증을 어떻게 해야 조화롭게 될 수 있는가? 이런 형제간의 차이는 유전인가, 아니면 환경인가? 저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저자는 형제 간의 차이를 유전적 요인보다는 환경적 요인에서 찾는 듯하다. 형제간에 있어서 부모의 영향, 형제간의 다른 사회 경험, 형제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살펴보기 때문이다. 그 예로 부모가 동생이 잘못을 감싸주고 오히려 형에 대한 질책은 형으로 하여금 시기, 질투, 모성애 결핍을 나을 수 있다. 또한 공부 잘하는 형에 대한 동생이 느끼는 압박감은 오히려 공부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이런 일상적인 예는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학문적인 수준에서만 모르고 있을 뿐.

이 책은 형제간의 애증 관계를 환경적 요인에서 찾으려고 하면서, 형제라는 것이 타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타인이라고 하지만 반타인이라고 보는 게 나을 듯하다. 혈연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형제라는 반타인의 존재를 일상적인 차원이 아닌 학문적인 차원에서 조명해보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새롭게 다가올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형제 관계에 대한 정확하고 자세한 답을 찾지는 못하고 시도 차원에만 머문다. 저자도 말했듯이, 아직은 미개척 분야라 활성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료가 부족하고, 형제의 일생을 조사해야하는 장기간의 과정 때문에 사례 또한 드물기 때문이다.

형제 관계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그래도 저자의 시도는 좋았다고 본다. 그래서 형제 관계가 너무 궁금하다거나, 나는 왜 매일 동생하고 싸우는가, 동생하고 나는 도대체 뭐가 틀려서 여러 면에서 다른가에 대해 너무 궁금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일독을 하기 전 너무 많은 기대는 하지 말기 바란다. 일독 후 형제는 역시 형제일 수 밖에 없고 타인이라기보다는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반타인이라는 존재를 알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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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퇴각 - 세계 경제 내 권력의 분산
수잔 스트레인지 지음, 양오석 옮김 / 푸른길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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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각국간의 간헐적인 분쟁, 무역 마찰, 그리고 투기자본의 활성화, 대조적으로 자유무역의 활성화, 전지구적인 네트워크망 등은 현 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과거 국가의 권위주의적이고 중앙통제적인 방식으로는 현 세계에 대처할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런 현 국제정세를 학자들은 글로벌 가버넌스(Global Governance)의 부재라 본다. 즉 전지구를 통치·관리할 마땅한 행위자가 없다는 것이다. 국가의 역할이 국방에 한해서는 아직까지는 통제력을 지니고 있지만, 시장에서 국가의 역할은 사라진지 오래다.

수잔 스트레인지의 <국가의 퇴각>은 현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제정치의 고전으로도 볼 수 있는 이 책은, 아직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주의에 대한 도전이라 볼 수 있다. 국가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현실주의에 대한 비국가 중심적인 사고를 지닌 스트레인지의 도전이다. 관성에 젖어있는 학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국제정치경제학자인 스트레인지는 세계 경제가 기술의 발달, 금융의 확산, 생산의 증대를 통해 국가의 권한은 상실하고 있다고 본다. 더 이상 기술이란 국가에 영향을 받지 않고 비국가적인 행위자인 다국적 기업에 의해 전지구적으로 발달·확산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술의 발달은 정보화에 힘입어 신기술의 도래로 자본의 유동성을 급격히 증대시켰다. 생산의 증대는 이로 말미 암아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국가에 의해서가 아닌 비국가적 행위자에 의해.

초국적·다국적 기업들, NGO, 거대한 투자가들에 의해 시장에 대한 국가의 권한은 끌어내려지고 있다. 국가 대 국가의 동맹 관계가 이제는 기업 대 기업, 국가 대 기업, 투자가 대 기업간의 동맹으로 전환되었다. 부의 재분배는 국가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탈국가적인 기업들에 의해 더 진행되고 있고, 국가의 세금 징수 권한은 기업들의 타국의 생산 시설의 설비로 인해 무시되고 있다. 국가 기능의 가장 기본적인 조세 권한까지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탈세는 많은 지구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국가의 존재가 얼마나 미미한지를 보여주는 단서일지도 모른다.

영토에 기반한 국가의 권력은 점점 상실해 가는 대신, 생산·금융·지식에 기반한 구조적 권력은 더욱 힘을 받을 것이다. 국가라는 것은 더 이상 영토에 기반해 주권을 주장하는 존재가 아니라, 전지구적인 생산·금융·지식의 흐름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국가의 권력은 더 이상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통제 능력 자체에 있는 것이다. 힘을 상실했다 하더라도, 통제 권한·능력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구조적 권력인 것이다.
교권이 상실해가고 있더라고 그것은 힘에 의존했던 교권이 상실해간 것 일뿐이다. 선생님이라는 권위체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그것은 우리들에게 암묵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구조적 권력의 실체다. 시장은 바로 이런 구조적 권력에 의해 통제 받는 것이지 국가의 군사력에 통제 받는 것이 아니다.

스트레인지의 이러한 주장들은 많은 현실주의자들을 경악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더 놀라게 될 것이다. 세계는 스트레인지의 주장대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 신자유주의는 어쩌면 패권국들의 통제 도구라기 보다는 패권국 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 세계가 과연 국가라는 존재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국가정체성은 어느 정도나 존재하는가? 세계 경제를 미국이 쥐고 있지만, 그 미국 또한 세계 경제의 나비 효과에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더 이상 권력은 집중하지 않는다. 집산(集散)을 반복하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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