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 (양장)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태 옮김 / 새물결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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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진보하는 존재다. 이성의 힘을 빌려 인간이란 존재는 원시시대부터 현재까지 끊임없는 발전을 추구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은 이성의 합리성에 기반해 철저히 규범적이고 제도적인 발전이었다. 또 제도적인 규범적인 발전은 인간이란 존재를 틀에 박힌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발전이란 미명하에 인권은 점점 상실당했고, 근대화란 미명하에 생태계는 파괴되었다. 과학의 합리성, 인간의 이성이 무규범의 지대 속에 틀어 앉아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지휘하에 두어 버렸다.

위험사회란 바로 이런 근대화의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측면을 말한다. 인간을 위한 진보, 발전, 합리화란 것들이 오히려 인간을 퇴보, 비합리성으로 몰아가고 있는 사회, 바로 이것이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하고 싶은 위험사회의 진실이다.

언제부턴가 환경, 인권, 문화 등이 전지구적으로 문제가 되었을까? 영국의 광우병, 아프리카 난민, 보트 피플의 인권, 문화적 충돌 등이 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들은 단순히 한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전지구적인 확산으로 인해 한 국가에만 머무를 수 없다.

위험 사회는 기본적으로 지구화(Globalization)에 바탕을 두면서 한 사회의 제도적·규범적인 측면에 비판을 가한다. 한 사회란 인간이 만든 제도와 규범처럼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수학 공식처럼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사회란 기계처럼 어떤 영향에 대해 어떤 예상된 결과를 내놓지 않는다. 사회란 유기체다. 인간의 몸처럼 노출되어 있는 존재이고, 어떠한 영향에 어떠한 결과를 내놓을지 모르는 유기체인 것이다. 예측가능성이 아닌 비예측가능성이다.

사회란 이런 것이거늘, 우린 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위험을 제도를 통해 하위층으로 몰았고, 그런 위험들은 부의 분배가 아닌 위험의 분배를 떠맡겼다. 근대화의 대표적 산물인 개인주의는 한 개인의 부와 행복을 위한 것으로 탈바꿈하면서, 황금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주자가 되었다. 계급과 빈부의 차는 개인주의의 미명하에 정당화 되었으며, 공공성이란 비합리성을 대표한다고 철퇴를 맞고 죽었다.

전지구화라는 변혁속에서 인간은 근대화란 미명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죽였고, 여전히 죽이고 있다. 경제성장, 과학발전, 서구 따라잡기, 개인의 자유 확대란 것들이 오용되고, 본래 의도를 상실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측면을 바로잡고, 사회의 생태를 이해하라고 근대화에 대한 반성을 하라한다. 성찰을 통해 근대화의 근대화를 이루라고 한다. 근대화는 인간을 위한 것이거늘, 인간을 위험으로 몰아 넣는 근대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라 한다.

정치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선의의 정치, 민주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 이 모든 것의 기본적인 목표는 인간이다. 인간의 존재를 벗어버린다면, 이것들은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한 사회의 기본 동학의 중심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황금비율에 딱 들어맞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위 정치는 제도권내의 정치가 아닌 제도권밖의 정치를 위한 것이다. 인간의 문화, 사회, 환경이란 제도 내에서 인과법칙이 아닌 비인과성에 의해 작동한다.

근대화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말고 근대화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생태적 사회, 인간적 사회, 성찰적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인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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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한국학
J. 스콧 버거슨 지음, 주윤정.최세희 옮김 / 이끌리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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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무엇이 발칙하단 말인가? 우선 책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이 책의 느낌은 정말 발칙하다. 단지 발칙하다는 그 한 마디 때문에 이 책을 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또한 암암리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한국을 소개하기 위해 저자는 정말 발칙한 방법으로 한국을 소개한다. 자신의 관점보다는 타인의 관점에서 소개한다. 그 타인이란 누굴까?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다. 보통 한국을 소개할 때, 한국인과의 인터뷰를 많이 싣는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한국에 체류중인 외국인들의 눈으로 한국을 바라보면서 좀 더 객관적으로 한국을 바라본다. 오리엔탈리즘을 떠나 한국이 좋아 한국을 택한 이들에게서 한국의 장단점을 가려낸다.

보통 외국인이 한국을 소개할 때, 가장 큰 단점은 문화적 우월감에 빠져 문화제국주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리엔탈리즘이 거론되고, 문화상대주의가 거론된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기술한 고서적을 검토하면서, 그런 책들의 문제점을 꼬집어 낸다. 그 후 이런 학구적 차원을 넘어 저자 스콧 버거슨은 현실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현실적 차원에서 저자는 앞서 말했듯이 한국에 거주하거나 방문한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국의 이미지를 물어본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한국의 이미지를 형성해간다.

대화를 통한 한국의 이미지 소개는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단연 한국인에게도 자국의 모습을 재평가 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준다. 특히 직접 평양을 방문 한 저자의 평양에 대한 이미지 소개는 한국인인 우리에게도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해준다.

이 책은 단순한 한국 소개서가 아니다. 이 책의 접근법 한국인 조차 힘든 방법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매우 훌륭히 한국을 소개한다. 한국인 조차 몰랐던 명소를 낱낱이 소개하면서, 한국의 의식주 문화까지 소개한다. 한국인이 본 한국과 외국인이 본 한국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고, 우리에겐 사소했던 것들이 외국인들에겐 얼마나 낯설면서도 신비스럽게 느껴졌 는 지를 보여준다.

때론 보잘 것 없고 미미한 것들에 불과한 것이 시각의 차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보일 수 있는가를 말해준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한국인인 나에게도 한국을 보는 시야를 넓혀주고, 외국에 대한 동경만이 신비스러움을 낳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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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노자 석가
모로하시 데츠지 지음, 심우성 옮김 / 동아시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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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인(仁), 노자의 도(道), 석가의 자비(慈悲).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줄 곧 배웠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상가들의 깊이는 얼마나 느꼈을까? 공자의 인은 그냥 인이듯 우린 표면적으로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래서 그런지 현실적용은 어려웠다.

이 책은 그런 어려움을 말끔히 해소시켜준다. 백수(白壽)의 나이에 이 책을 집필한 저자는 동양사상이란 이런 것이란 것을 정말 물 흐르듯이 말해준다. 공자, 노자, 석가의 삼자대면을 통해서. 고대 서양철학가들이 대화법으로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듯, 저자도 그런 방법으로 세 사상가의 사상을 비교하고 있다.

또한 저자 스스로 이 삼자대면의 사회자가 되어 우리들이 평소 궁금해 한던 것들에 대해 질문을 함으로써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준다. 인, 도, 자비. 이 모든 것이 지향하는 바는 같지만, 세 사상가들의 출생과 그 당시 사회상으로 인해 조금씩은 틀리다는 것이다.

공자는 군자상을 내세우며, 지행일치를 하라고 하였지만, 노자는 당시의 혼란한 시기로 인해 무위자연의 삶을 지향했고 도란 자연히 일깨워지는 것으로 본다. 인간이 만든 법이나 사회적 제도 같은 것들은 역으로 인간 사회가 혼란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어휘가 만들어지는 이유가 그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란 것을 생각해보면 이치에 맞는 말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석가는 부유하게 자랐지만, 풍파를 겪으면서 인간의 삶이란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말하였다. 그래서 석가가 지향하는 바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러한 비교론적 방법의 전개는 말 그대로 한 권으로 읽는 동양사상 입문서로 부족함이 없다. 세상이 변해도 전통이란 것은 남아있기 마련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은 이 책에 더없이 적당한 말일 것이다.

세 사상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삶이란 것이 보는 시각에 따라 어떻게 변하고, 그 시각은 시각의 폭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세상에는 많은 사상이 존재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상은 아마도 자신이 그 사상을 어떻게 체화(體化)시키냐 일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지식이란 공유하는 것이라는 사고를 가지고 이 책을 썼을 것이다. 그것을 행한 후 저자는 타계했다. 저자는 이미 자신이 말하고 싶은 공자의 지행일치를 몸소 행한 것이다. 자신만이 아닌 우리들의 사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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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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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의 특징을 말하라고 하면, 아마도 이런게 나오지 않을까? 개인화, 고독, 초고속화. 과거와 달리 이제 사회는 진보라는 기치를 걸고 진보 아닌 진보를 하고 있다. 공동체에서 개인주의로, 군중 속의 즐거움에서 군중 속의 고독으로, 느림의 진보에서 빠름의 진보로. 성석제의 소설에는 이런 현대 사회의 특징들이 소설 전개 속에서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황만근은 우직함을 바탕으로 농촌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다. 그는 개인화 속에서 이기주의를 표면적으로 드러내는 도시가 아닌 농촌 속에서도 우직함으로 바탕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황만근이라는 주인공과 이 소설의 제목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기계화와 과학화로 대표되는 사회 속에서 순수성의 파괴와 진보라는 미명하에 파괴되고 있는 농촌 공동체의 파괴. 이런 모습은 '욕탕의 여인들'과 '천애윤락'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 단편 속의 주인공은 세속에 찌들고, 애욕과 물욕을 추구한다. 그 과정 속에 인간성은 파괴되고 인생의 허무감만 느낀다. 그런 주인공들의 모습은 진보라는 사회 구조와 물욕이라는 인간의 욕망과 융합하여 탄생한다. 잘못된 만남은 결국 잘못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런 세속은 더 심화되면서 룰렛 정치판으로 까지 이어진다. '쾌활한 냇가의 명랑한 갯날'의 중경회장은 아마도 현대사회의 세속화된 인간의 대표적 인물일 것이다. 그의 권력추구적인 모습과 독재적인 모습은 우리 사회에 내재한 파시즘적 요소를 잘 나타내준다. 민주정이라는 기치를 걸며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우리의 역사에 숨겨진 또 하나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단편 속에서 암묵적 동의와 묵과하는 인간 군상들은 결국 우리 자신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자기비판보다는 남을 비판하는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저자는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라'고 말하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주변부터 그런 문화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천애윤락'의 동환과 그의 친구들의 모습은 '자아비판'과 '타자비판'이라는 대립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바뀌어 간다. 결국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어'라는 동환의 말을 통해 저자는 알 수 없는 문제해결 과정을 거친다. 도대체 왜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인간의 욕구를 해소 싶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회의 물욕화 과정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인식되는 현대 속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은 것일까? 아마도 현실에 무감각한 '책'의 당숙처럼 때론 한 곳에 열정을 두어 그것에 매진하는 한 인간의 순수를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꽃의 피, 피의 꽃'에서처럼 타락한 인간을 내세워, 오히려 한 인간의 순수성 회복 과정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

성석제의 소설은 그의 문체처럼 때론 짧고 빠르게 현대 사회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그의 일침은 단순한 일침이 아니다.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파헤치기 보다는 인간이란 존재를 통해 보다 근원적인 것을 파헤치려 한다. 짧지만 깊이 있는 그의 소설에 오늘 한 번 빠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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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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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때론 진중한 자세를 거부한다. 심지어 정의와 관용이라는 사회적 규범까지 거부한다. 어떤 사회든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가 있기 마련이고, 그 원리에 순응하여 우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원리가 보편적 원리를 위배하고 스스로에 취한 원리가 되었을 때, 원리 없는 사회가 된다. 원리가 존재하지만 형식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저자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저자의 대학 시절의 한국 사회는 원리가 부재한 사회였다. 자성(自性)에 취해 타성을 이해하지 못했고, 저자가 망명한 프랑스의 사회 원리인 관용도 이해 못했을 것이다. 관용의 뜻을 가진 똘레랑스라는 불어를 저자는 그래서 더욱 가슴 깊이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순과 불의가 판치는 한국 사회에 저자는 사회적 환멸감, 때론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 원리가 어떻게 변질될 수 있는 가를 몸소 느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낯 설은 지역에서의 하루 살이 생활은 저자에게 큰 문화적 충격과 동시에 한국 사회를 재조명 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한 망명 생활은 타인이 아니면서도 타인이 되어버린 저자에게 한국 사회에 대해서 '왜'라는 의문을 갖게 만들 것 이다.

똘레랑스를 이해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해소한 카타르시스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더욱 똘레랑스의 의미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망명 생활을 적어놓은 에세이에 구지 똘레랑스라는 것에 지면을 할애한 것은 그 때문 일 것이다. 이중, 삼중의 타인이 된 그에게 그것은 삶의 의미였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한 망명자의 에세이인 동시에 사회 비평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저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70년대 한국 사회의 실재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프랑스에서의 망명 생활에 대한 저자의 글은 외국인 노동자의 대우에 대한 사례를 잘 제시해주고 있다. 현재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핍박이 문제시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왜 우린 아직 개발도상국이라는 호칭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를 잘 알려준다.

저자에게 프랑스라는 사회는 도피처였을지 모르지만, 또 하나의 조국이 될 만큼 크나큰 의미를 갖고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을지라도, 프랑스 사회의 따뜻한 대우는 '우린, 왜'라는 밤낮을 가라지 않는 의문 속에 따뜻한 안식처였을 것이다. 물론 궁핍한 의식주의 생활이었지만, 정신적으론 안정이 되었을 것이다. 비록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의 이상한 시선이 그를 힘들게 하였을 지라도.

이처럼 이 책은 저자의 망명 생활이 시작된 원인에서부터 그 이후의 삶까지를 세세하게 그리고 있다. 또 한국인이지도 못하고, 프랑스인도 못되는 저자의 한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자의 한풀이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한 때문에 이 책이 더욱 의미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 마음 속 저 깊은 곳 까지 감동 시킬 수 있는 원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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