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바위, 시간 - 지질학적 증거에 기반한 지구 연대 논쟁
데이비스 영.랠프 스티얼리 지음, 김의식 옮김 / IVP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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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은 곧 과학적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일까?”

 

이번 서평을 준비하며 올해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여 직면한 학문적 결핍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난 4년간의 신학대학교 재학 중, 나는 성서의 창조를 믿으면서 <과학과 종교의 대화>라는 수업을 통해 알게 된 브라이언 그린을 통해 쿼크나 힉스, 초끈 이론이나 M 이론 등의 양자역학의 영역에 조그마한 관심을 가져왔다. 사실 이러한 관심은 창조론과 진화론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학문적 관심은 아니었다. 합리적인 신학도이자 신앙인으로 보이기 위해서 양자역학자들의 이론을 우주론에 대입해보기도 하고, 알리스터 맥그래스 같은 저명한 신학자의 저서를 쌓아두고 읽으며 그들의 신학적 작업이 나와 동일하다는 것처럼 포장하기도 했다.

 

서평의 첫 단락부터 자기반성을 하는 이유는, 나의 신학적 무지함으로 인해 젊은 지구 창조론은 성서를 절대 무오로 믿는 이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라는 그동안의 오만함을 보수적인 신앙을 견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나는 창조에 관해 이렇게 생각해왔다. “창조에 대해서는 신앙으로 믿으며, 창조에 대한 탐구는 합리적으로 열려있다.” 이 말은 스스로에게 창조 신앙을 지니고 있다는 안정감을 갖게 했고, 사회적으로 지탄 받던 젊은 지구 창조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합리적 신학도의 이미지를 굳히기 위한 것이었고, 나의 성서 이해는 현대의 과학적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일말의 우월의식이었다. 이 자리를 통해 성서를 하나님의 무류한 말씀이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사과를 드리고 싶다.

특별히 나는 이번 신간 속 보수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지닌 두 저자, ‘데이비스 영랠프 스티얼리박사가 진실한 신앙 위에서 창조를 위한 지구 연대 논쟁을 우리에게 소개해준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을 통해 저자들은 이후 논의될 내용을 제하더라도, “보수적인 신앙이 곧 창조과학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이지만 신학적 편견에 의해 쉽게 무시되어지던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이 책을 통해 변화된 스스로의 소감은 이 정도로 하고, 지금부터는 <성경 바위 시간> 속 살펴볼만한 포인트들을 각 장마다 간략히 이야기 하고자 한다.

 

1부는 역사적 관점을 통해 보는 지구 연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 위해 각 시기별로 지질학의 발전과 이에 따른 논쟁이 함께 담겨있다. 특별히 현대 지질학이 출현한 이후 지질학과 성서(성경) 사이의 간극은 더욱 분명해져갔다. 이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조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두 세기 전부터 영미-유럽권 교회들에서 논의되어지던 내용이었음을 확인하면서 배우는 점이 크다. 오늘 우리가 치열하게 젊은 지구 창조론의 망령과 논증하는 것이 이전부터도 이어졌다는 사실은 지긋지긋함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를 바로 이해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으로 본다면 우리 세대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가능성을 기대하게 된다.

 

따라오는 2부는 성경적 관점을 통해 보는 지구의 태고성이다. 1부의 마지막 소제목이 지구의 태고성이었고, 그 내용이 20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연구인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2부에서 지구의 태고성을 성경, 성서적 관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질학의 역사성에 비춰서 상호 비교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성서 해석은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성서의 본연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성서 해석이 모든 부분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양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비는 과학과 문화적으로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라는 생각이 이번 장의 마지막과 함께 독자의 머릿속에는 분명히 떠오를 것 같다. 그 생각은 보수적 신앙의 그리스도인이나 성서 해석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나 동일할 것으로 판단된다.

 

성서와 역사 속에서 잠시 잊혀진 부분이 있다면, 이 책의 저자들은 지질학 박사이자 교수라는 점이다. 3부의 목차를 읽자마자 이전까지는 개론이고, 이제부터 본격 강의 시작인가?”하고 스스로 묻게 되었다. 쉽게 말해, 지구과학 이후에는 우리가 단편적으로만 정보를 얻던 지질학의 소재들과 용어들이 이번 장에는 즐비하게 등장한다. 이번 장의 마지막 부분이 방사성 연대 측정에 관한 이야기들이기에 이번 장이 흥미와 당혹감을 오가는 기분을 독자들에게 선사해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자면, (지질학이나 인접학문을 연구하거나 관련직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을 제외한)우리가 이 기회가 아니면 창조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들 가운데 지질학이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을 따로 찾기에는 제한 사항이 있다. 이번 장이 책에서 가장 두꺼운 부분을 차지하며 다소 생소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창조에 대한 관심이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들로만 구성된다면 이것 또한 창조를 이해하는 시선을 가둬버리는 제약이 될 것이다. 지질학을 이해하는 쉬운 길은 이 책을 읽었지만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다. 다만 쉬운 길은 모르지만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지질학자들이 미시간 분지와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통해 지구의 역사를 탐구하고 탐험하는 이 이야기들이 다른 대륙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생각의 여지와 즐거움을 주는 것은 참 특별한 경험이다. (책에 있는 이 지역들의 사진을 보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서 모 포털 사이트를 통해서 찾아보았는데, 컬러로 보니 자연의 광대함과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 이가 다른 곳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4철학적 관점이다. 사실 지구의 태고성을 탐구하는 일에 철학적 개념이 사용된다는 것에 놀라움이 있었다. 사실 역사적-성경적-지질학적 관점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기본적인 이해는 있었기에 저자들이 주는 정보들을 습득해서 나의 지식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4부에서 이야기하는 철학적 관점은 들어봤지만 이 개념이 이렇게 적용될 수 있어?”라고 스스로 되 물으며 쉽사리 책장을 넘기지 못한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철학은 어렵다라는 스스로의 성급한 결론이 다양한 분야에서 철학의 개념이 이미 적용되고 있음을 놓친 것 같다. 비록 철학적 관점에 대한 오해로 4부의 시작을 열었지만, 읽어가면서 이번 장이 왜 마지막에 위치하였는지 깨달으며 마치게 되었다. 이 책의 곳곳에서 이미 젊은 지구 창조론의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4부에서는 이를 보다 분명히 지적하면서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 가능한 지질학적 증거의 총체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로 이 책의 주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지질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입문서로 쓰기에 적절하다. 뻔한 말일 수 있지만, 이 책을 구입해서 읽게 될 독자들은 단순히 지질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목적으로만 이 책을 구입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창조에 대한 이해를 위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과학과 멀리 있지 않음을 알고 싶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가까이 하고자 하는 노력들 가운데 이 책을 집게 된 이들에게 해답은 아니더라도 해답으로 향하게 하는 성서와 더불어읽을 만한 책으로 적극 추천한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에는 양승훈 교수의 해설이 담겨져 있는데, 이 책을 정독하기 전 예습을 위해서나, 읽고서도 여전히 남는 의문들을 정리할 때, 핵심적인 부분들을 다시 생각하고자 할 때도 참 유익하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창조에 대한 고민이 양승훈 교수에게도 동일하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해설 속에서 묘한 동질감과 더불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지혜 또한 얻어갈 수 있다.

 

성서를 해석하는 시선과 신앙이 다르듯 창조를 이해하는 견해들이 다름을 더욱 분명히 깨닫는 오늘날이다. 분명한 점은 이 책을 읽고서 하나님의 창조가, 그리고 이 지구가 우리의 단순한 셈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드는 분들에게나, 앞서 말한 눈가리개를 여전히 벗길 거부하는 분들에게나 이 땅은 소중하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 이 땅은 하나님의 창조의 땅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견들이 창조의 땅을 설명하고자 자신들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한 가지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신앙하는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왔던 과학, 특별히 지질학의 발견을 무시하거나 하대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은 신학을 전공하는 나에게나 신앙 안의 지체들에게는 어려운 부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의 어떠함을 떠나 성서 고유의 가치와 전통을 존중함이 훼손될 것을 항상 염려하고 경계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염원을 가지고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하고 이 신앙을 후대에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우리의 이 마음과 이 태도는 충분히 존중받고 앞으로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인도하고 계신다는 신앙처럼,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놀라운 창조의 세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성서뿐만 아니라 창조의 세계,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또한 이 땅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의 수고는 성서 해석을 위해, 그 말씀대로 살아내기 위해 힘쓰는 우리의 최선만큼 존중되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이 단순히 젊은 지구 창조론의 카운트 어택(반격) 정도로 그치지 않길 바란다. 창조하신 이를 알기 위해 수고하는 이들이 창조하신 이가 만드신 땅에 대해 무지하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이다. <성경 바위 시간>을 통해 이 땅에 있는 모든 현상, 특별히 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우리의 최선이 하나님을 열망하는 우리의 신앙만큼 자라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도한다.

 

창조의 땅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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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북유럽 신화 - 토르, 로키, 오딘에서 라그나로크까지
이경덕 지음 / 원더박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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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사용하고있는 CellPhone 속 블루투스. 이 이름은 어디서부터 유래했을까요? 그렇다면 토르와 오딘의 이름은? 무척 흥미로운 일상 속 이름들의 기원을 찾아 떠납니다! 무엇보다 북유럽은 개신교회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국가교회들이 위치한 곳인데 어떻게 신화를 잃지 않고 오늘까지 왔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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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 마르크스와 다윈의 저녁 식사
일로나 예르거 지음, 오지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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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에서 이 두 인물을 다룬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불온하고, 저급하며, 신앙을 마비시켜 결국엔 이성적 판단을 이데올로기로의 판단으로 바꿀 것을. 그런데 재밌다. 그런 마르크스-다윈 혐오증의 개신교회는 오늘날 가장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집단이 되었다. 밥 먹고 싶다, 그들과.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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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을 말하다
장 지글러 지음, 이현웅 옮김 / 갈라파고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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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들이 당신을 무시한다. 이어서는 그들이 당신들을 비웃는다. 이어서 그들은 당신들과 싸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당신들은 승리한다. 연대의 힘을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살아내는 우리가 바로 형제요 자매입니다. 장 지글러의 희망과 연대가 대한민국에 여전히 유효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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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음, 윤현명 외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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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문집은 항상 사회적으로 파급력을 가진 신간들을 우리 앞에 내놓았다. 특별히 잊혀져가는 과거 속 추악한 진실을 들춰내고 옳은 길로 가기 위한 이정표로 삼는 일에 투신하는 모습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 출판사의 책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사실 출판사의 출판 정신이 어떠한지는 그들이 번역하고 저자들을 이끌어내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그렇기에 내가 서해문집의 책을 자주 리뷰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이 출판사의 독특한 출판 정신이 신학도이자 이 시대의 청년인 나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반증한다.


우리 중 대부분은 일본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일본 사람들에 대한 일방적인 미움이 아닌, 우리는 잊을 수 없지만 그들은 잊은 듯한 조선 후기의 역사, 나아가 일제강점기의 치욕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 누구라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전범 국가의 국민들이 모두 자신들의 과오를 덮기에 급급한 것은 분명 아니다. 이는 단지 독일만의 일이 아니다. 오늘의 저자 "가토 요코"와 같은 일본의 지식인들은 군국주의 일본의 만행과 처절한 패배의식을 역사, 특별히 전쟁사의 시선에 비추어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다. 


서장에서부터 우리는 익숙한 역사가의 서술에 마주한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H 카'의 방식처럼 가토 요코는 서장을 통해 역사가의 서술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역사를 단순 암기로 생각하던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임 동시에 역사에 대한 자세에 대해 다시금 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서장 이후의 내용들은 일본의 근대시대부터의 역사를 시대마다의 전쟁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를 역사가 특유의 분석을 토대로 논리적으로 귀결시키는 것을 따라 읽다보면 어느새 군국주의 일본의 멸망은 지극히 당연했다는 생각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된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파트는 역시나 "왜 진주만은 무방비 상태였나"였다. 저자는 당시 진주만을 공격했던 총지휘관 '후치다 미쓰오'의 입을 빌려 일본이 얕은 수심의 진주만 기지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판의 결과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럼에도" 일본이 이 전쟁을 저지른 것 자체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전후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여 이전의 적국이었던 미국에서 전도대회를 하고 다니며 적장으로 맞붙었던 맥아더와의 조우는 그가 이전 세월의 잘못과 더불어 일본이라는 국가가 사실은 전쟁에 대한 어떠한 명분도 가지지 못한다는 확신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 부분이 개신교인으로서의 나의 어떠함을 건드린 것도 있지만, 전쟁의 패배한 장수로서 이전의 전투들에 대한 분석과 앞으로의 일본의 자세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시대의 리더로서 가져야 할 안목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리더는 실수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생각과 결정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공동체는 그러한 리더를 신뢰하고 또 하루의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일본 독자들의 스테디셀러로 사랑을 받아 온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가 단순한 일본 근현대사 입문서를 넘어, 일본의 변화가 어떻게 현대의 일본을 구성했는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급변하는 현대의 동북아 정세를 꿰뚫어 볼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 책의 일독을 자신있게 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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