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리트의 껍질
최석규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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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그건 자기가 사이코패스인 줄 아는 사이코패스래요. MRI로 찍은 자기 뇌사진을 보고 자신이 사이코패스의 뇌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어느 뇌 과학자의 말이에요.”

오랜만에 읽은 소설입니다.

책을 펼치자마자 단 숨에 읽었습니다.

이번 책도 역시 글맛이 좋습니다.



작가의 첫 번째 단편소설 “소설이 곰치에게 줄 수 있는 것”도 읽었습니다.

https://blog.naver.com/nezumi0712/222410571187

작가의 첫 번째 책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여러 개의 단편을 엮은 책이어서 짧은 호흡으로 가볍게 읽었습니다. 작가의 치밀한 묘사와 감정표현이 좋았습니다. 그 중 몇 편은 서사를 더해 장편으로 확장시키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네, 그 사람 이름을 딴 해리슨 신드롬이라는 것이 있어요. 예전에 그가 탄 비행기가 사고가 난 적이 있지요. 비행 중 엔진이 멈추고 거의 추락 직전이었어요. 근처 공항으로 어찌어찌 비상착륙을 해서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사고 전 5일간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해리슨 포드는 자신이 추락할 뻔한 일은 기억하지만, 그 전에 자신이 며칠간 어디 있었고 무엇을 했고 심지어 왜 비행기를 탔는지조차 전혀 기억하지 못했어요. 살아남기 위해 뇌에서 공포의 기억을 깨끗이 삭제해 버리면서 발생한 부작용이죠.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가 발동한 거에요. 일시적으로 뇌의 리코딩 기능이 멈춰버렸다. 쉽게 말하면 그런 겁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날 강변에서 의식불명의 상태로 구조됩니다. 어떤 사고로 그 곳에 있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2년 간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역행성 기억상실, ‘해리슨 신드롬’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주인공 강규호는 집 화장실 비밀 벽에 숨겨진 한 여성이 찍힌 스냅 사진과 소형 금고를 발견합니다. 금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비밀번호가 무엇인지도 기억해 내지 못한 채 회사로 다시 복귀하며, 회사-집-편의점-책 대여점을 오가는 무료한 일상을 보냅니다.

그리고 어느날, 누군가 자신을 매일 미행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갈등이 고조됩니다.


270 페이지 정도의 장편소설이라고 하지만 금새 읽어버려서 그런지 이야기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흔히 미스터리 스릴러에 필수조건이라 말하는 ‘복선’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냥 지나쳐버리고 기억하지 못 할수도 있습니다.)

“정신의학, 뇌공학, 심리학, 문학, 미술 분야가 융합된

신선하고도 탄탄한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작품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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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소개에 실린 문구입니다. 다만 많은 소재들을 표현하다보니, 설명이 길어지고 반대로 플롯이 단순해지진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사용되지 않을 법한 대화가 거슬리기도 합니다.

“(중략) 후져보여도 유럽 ECB-S 방도 시험도 통과한 1등급인걸요. 웬만한 화재나 침수에도 끄떡없고, 드릴이나 해머, 산소절단기, 그라인더도 소용없어요. 수류탄으로도 부수기 힘들어요. 20센티 두께의 3중 철제 패널, 이음새 없는 마감, 전류충격 방지 장치, 콘크리트 스틸 매쉬에 세 방향 액티브 볼트 구조로 아주 잘 빠졌죠. 이중 골곡 형태라 프레임 전체가 데드볼트 역할을 해요. 이걸 열 방법은 오직 비밀번호뿐이에요.”

주인공 강석규가 찾은 심부름센터의 사장의 이야기입니다.

뇌과학과 연관된 이야기를 끌어가는 빌드업도 일상적이지 않은 어려운 단어로 나열되니 서사를 끌고 나갈 설명이라기 보다는 책이나 작가의 특성을 표현하는 미사여구처럼 보입니다.

“마그.... 뭐더라. 마가린? 마그릿? 마그리트, 그래, 마그리트의 껍질.”

‘마그리트의 껍질?’

3초? 길어야 5초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깊은 이마 주름, 꽉 다문 입술, 일그러진 눈매. 이병우 팀장의 얼굴이 얼음처럼 경직됐다.

찰나였을 뿐이지만, 난 모든 것을 보았고 기억했다. 망막에 맺힌 이미지는 내 시신경에 의해 정보로 바뀌었다.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은 것들을 구분하고 보강, 필터링해 세 개의 신경망 경로를 따라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은 처리 장소로 전달됐다. 후두엽을 거친 정보는 두정엽에 도달하면서 얼굴 근육의 위치를 파악했고, 공간 개념을 더 정교하게 만들어 지금 본 장면을 종합적으로 재구성했다. 편도체와 측두엽에서는 정보가 가지는 의미, 관련된 기억, 숨은 뜻을 추론했다. 그것들은 단기 기억을 저장하는 뇌세포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저장되었다. 고성능 QHD CCTV 카메라 뒤쪽에 숨겨진 네트워크 녹화기 저장 장치처럼 미묘하게 바뀐 이병우 팀장의 표정을 기록했다.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구조들을 길게 설명하다보니, 이전 책에서 느꼈던 작가의 ‘치밀한 묘사’가 와닿지 않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아쉬움이 많아 보이지만, 그래도 ‘독자에게 잘 읽혀야 한다’는 미덕을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굳게 지켜나간 책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글을 써서 이렇게 멋진 장편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만큼 어려운 일인지는 가늠할 수도 없기에 작가님께 경외감을 가지게 됩니다.

소설에 나오는 수많은 소재들은 대부분 책을 통해 습득하셨을겁니다. 주요 무대인 CCTV 회사에 관련된 공학관련 소재는 특허 관련 일을 하시면서 모아놓은 소재들일테구요.

2014년 등대문학상 소설부문 가작을 시작으로, 17년 사하 모래톱 문학 부문 소설 대상, 그리고 20년 예술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첫 책 ‘소설이 곰치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출간했습니다.

그의 이력을 보면 국문학과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직장생활을 하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글을 쓰고 자신의 글을 내놓을 수 있는 여러 기회를 계속 탐색하고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기간 성장하며 준비하여 메이저 출판사를 통해 출간한 저자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소설가로 사는 좋은 점은 타자의 삶을 그럭저럭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백년을 훌쩍 뛰어 넘기도 하고 성별이 바뀌는 진기한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바람이나 돌멩이가 되어 사람들을 관찰할 때도 있지요.

그것은 책을 피동적으로 접하는 것과는 질과 결이 다릅니다.

에스프레소의 진한 맛을 알게 된 후 거기에 물을 타서 마시는 아메리카노를 취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니까요.

이번에 수상한 소설 '축제'의 노구 이야기가 삶이 되길 바랍니다.

작가 최석규의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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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소설만큼이나 작가의 삶에도 호기심을 가지고 즐겁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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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악과 사투를 벌인다는 말은 악도 죽음을 각오하고 선과 싸운다는 말이기도 해요. 목숨 건 전쟁에는 정의도, 불의도, 옳고 그름도 없어요. 오직 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뿐이죠. 인간이 가진 근원의 악을 없앤다? 사람들이 선을 꿈꿀수록 악은 점점 더 커져요. 악은 선의 그림자입니다. 모든 악한 것들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좋은 날이 올 것 같나요? 세상에 온갖 종류의 선들만 남았을 때 그 중 덜 선한 것이 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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