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으로 시작하는 철학 입문
가게야마 요헤이 지음, 오정화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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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을 돌아보면 어려운 ‘철학’에 대한 가장 깊은 고민은 입시공부를 하거나 교양과목을 듣던 대학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고 난 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영화 보다는 매트릭스를 오마주하여 만든 애니메이션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실재인지 아닌지 고민하던 학생이 현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에 빠져들면서 마지막에는 옥상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는 짧은 단편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하도 오래 되어서 검색도 잘 안 되는군요)



그 때 저도 며칠동안 생각의 꼬리를 계속 물고 있었습니다.

'지금 나는 실재하는가?'

'내가 지금 거울로 바라보고 있는 나는 실재하는가?'

​

거울 속의 내 모습은 결국 빛을 통해 내 망막에 맺힌, 그래서 내 뇌가 인식하는 전기신호이다.

그렇다면 어떤 물리적 활동도 없이 인큐베이터 안에서 전기신호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혹시, 내가 잠을 자고 있는 동안 그 시스템이 일시적 정지나 휴지기를 가지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이 결국 하나의 명제로 귀결되어 ‘멈춤’신호를 보냈습니다.

’나의 언어적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질문의 언어는 본인의 존재를 뛰어넘어, 그를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과도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질문의 언어를 만들어 다양한 질문이 펼쳐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을 구성한다.

철학적 질문의 목표는 그 유일한 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질문을 던지는 인간 자체의 존재 방식을 밝히는 것이다. 7p



‘질문’이라는 말은 왠지 쉬워보입니다. ‘답변’이나 ‘해설’을 하여 상대방을 이해시키기 보다는 ‘질문’하는 것이 쉬운 역할이라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질문‘을 시작하지 않으면 ’선행하는 것‘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문‘자체가 궁극적으로 선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보다 앞에, 신보다 앞에, 자아보다 앞에, 나아가 모든 것보다도 앞에

형태가 없는 불확실성에 직면하는 ’질문‘이 철학을 작동시키고 있다.

철학의 바탕에는, 그 자체에는 어떤 기댈 곳도 없는 원초적인 떨림을 책임지는 ’질문‘이 있는 것이다. 42p

​

의심하고 질문하는 순간 존재가 성립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맞는거죠?

의식하지 않고 지나쳐버린다면 그 대상은 있어도 없는 ’존재‘입니다.

대상을 의식하고, ’질문‘하는 것부터 ’존재‘가 성립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맨처음 ‘질문’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그 다음에는 철학의 다양한 기본 주제-존재, 범주, 실재, 세계, 시간과 공간, 자기와 타인, 신체, 탄생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해 ‘질문’을 관점으로 살펴 봅니다.

’질문‘, ’입문‘이라는 단어와 작고 얇은 책의 외형에 이 책이 쉬울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읽었습니다.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무엇이 전제가 되는지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지만,

어쨌든 웜뱃은 그것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탐구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상’의 본질인 불확실성을 파악하여 보일 수 있도록 하는 ‘질문’이 없다면,

애초에 불확실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질문’이란 아직 답이 정해지지 않은 불확실성을 직면하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 없이는 불확실성을 불확실성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무엇보다 ‘질문’이 있어야

선행하는 것에 관한 전반적인 탐구가 처음으로 유의미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은 철학적 탐구가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어로 이 장소를 ‘토포스topos’라고 부른다. 39p

‘웜뱃이 뭐지?’

중요하지 않은 사례에 집중이 흐트러지길 여러번. 정신을 집중하여 읽지 않으면 긴 문장을 두세줄 읽다가 끈 떨어진 연처럼 생각이 저 멀리 날아가버렸습니다.

중간까지 읽다가 결국 책 읽는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평상시처럼 빠른 속도로 ‘시독’을 하지 않고 나머지 부분을 ‘통독’으로 흝어본 후 다시 천천히 ‘묵독’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묵독하고 있는 암브로시우스를 일러, "눈은 페이지를 쫓고 마음은 의미를 더듬고 있었지만, 목소리와 혀는 쉬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작은 웅얼거림이지만, 혀와 귀를 함께 사용하니 눈 앞에서 겉돌던 글자가 조금씩 머리 속을 거쳐갔습니다. 다행인 것은 일본 저자의 말을 ‘강의하듯’ 쉽게 풀어낸 역자의 문장이 어렵지 않아 읽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강의교안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특정 정치 세력과 결합한 하이데거의 질문은 전혀 다른 ‘대단함’을 띠고 있다.

‘묻는가, 묻지 않는가에 대한 철학적 수행의 구별’과 ‘한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의 구별’은 근본부터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이 둘을 하나로 보고,

철학적 질문을 담당하는 독일 민족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이나 미국인 등의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선을 그어버렸다.

이렇게 현실의 민족 국가가 법정의 소크라테스처럼

여러 국가를 향해 자기 주장을 하는 영웅적인 자기상(르샹티망의 함정이지만)이 탄생했다.

다시 읽기 시작하자 그동안 듣기만 했던 하이데거 등의 현대 철학자들의 이야기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질문‘과 ’입문‘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사용했다고 해도 여전히 철학은 어렵습니다.

제대로 ’의식‘하고 ’질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철학‘의 필요성, 유용성에 대해서만 ’의식‘하고 고민해 왔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철학‘은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는거지?”라는 의심과 질문은 잘못된, 순서가 맞지 않는 질문이었습니다.

대상, 즉 철학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바탕에 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는 ’철학‘은 존재하는가? 에서부터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철학의 유용성을 논하기 이전에 존재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고? 무슨 소리에요!‘

이렇게 써놓고서야 저는 조금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만...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정리하지 못 했습니다. 쿨럭)

말장난같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자유다. 선택하라. 다시 말해 창조하게나.

샤르트르가 이 말에서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실존의 주체적 자유다.

실존의 주체적 자유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지만,

자기의 존재 방식을 매번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자유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자유관에 따라 앞에서 다룬 현실성을 극복하는 ’나‘의 가능성을 극대화했다.

이 자유는 누구도 지지해주지 않는 지나치게 가혹한 것으로,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는 낭떠러지 끝에 섰을 때, 추락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몸을 내던진다는 선택을 해버리는 자신의 자유에 무심코 전율을 느껴버리는 감정이 자유의 불안이라고 비유했다.

이 불안은 살아갈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나‘의 존재 자체를 나타나게 한다.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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