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윤슬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6월
평점 :
품절
근현대 국내 문학 작가들 중에 박완서 이름 석 자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작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정작 그분의 작품을 온전히 읽어 본 것이 몇 편이나
있는지 잘 기억이 안날 정도로 의외로 낯설기도 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윤슬 에디션'은 그녀의
에세이 660여 편 중에서 베스트 35편을 선별해서
영국 아티스트 고든 헌트의 작품을 표지로 담았다고 한다.
이미 작고한 국내 대표 여류 작가이신 박완서 님이시지만,
아직도 꾸준히 사랑을 받는 작품들이 소개될 때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 살아 숨 쉬고 계시는 듯 가깝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가깝게 느낄 정도로 친숙한 작가였지만,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에세이 작품집을 읽어보면서
그녀가 일제강점기 시절에 여학교를 다녀야 했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고향도 떠나고 갓 입학한 대학교
학업 역시 지속하지 못핬던 안타까운 내용을 보면서
우리 할머니 세대였다는 점이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혀 세대 차이나 세월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는
작가의 정갈하고 세련된 문체를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디지털 미디어에 친숙한 우리의 시선으로 보아도
너무나 정감 넘치고 지나친 기교 없이 자연스러운 글이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에세이집에서는,
뒤늦은 나이에 문단에 뛰어들어 글을 쓰는 소설가이자
집에서는 자녀와 티격태격하는 엄마였고 한 남편의 아내,
한 가정의 며느리로 사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여성의 특별하지 않은 보통 사람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게 소탈하게 풀어놓고 너무나 공감 가는 글이었지만,
현재 우리 주변과 사뭇 다른 7,80년대 서울 생활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어서, 연배가 있으신 분들에게는
그 옛날의 추억의 모습들이 아련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젊은 세대들에게는 신기하기도 한 모습이 흥미롭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줄지어
기다리면서, 전화를 거는 사람들의 사연도 살짝
들어보면서 나름의 상념에 빠지는 내용처럼 말이다.
지금은 대학로 문화의 거리로 잘 알려진 지역도
사실은 서울대학교 본관 자리였기에, 문리대학이
허물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서는 시기에 저자가 학창 시절
보냈던 장소가 전혀 낯설게 변해버리는 풍경에 대한 애틋한
감정도 전혀 다른 세대이지만 깊이 공감을 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당시 버스 중간 출입문에서 요금을 받았던
차장 아가씨의 고단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의 일상과
딸의 모습을 오버랩해 보지만 왠지 오지랖 떠는 듯한
주책바가지처럼 그려지는 가벼운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에세이집에서는,
일제강점기에 학창 시절을 보냈던 저자의 이야기부터
남편과 아들을 잃고 허망했던 심정, 그리고 어느덧
손주를 보게 되면서 딸과 손녀에 대한 애틋함도 꾸밈없이
전달하고 있기에 더더욱 마음으로 공감이 가는 듯했다.
어렸을 적에는 남녀 차별이 분명했던 우리 시대상의
한 켠을 볼 수 있었고, 창씨개명에도 일본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기에 가슴 떨렸던 시절과 저자의 어머니가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위해서 서울로 힘들게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모진 삶을 겪었던 내용 등. 조금은 거친
풍파 속을 해쳐왔던 궂은 삶이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옛이야기를 구수하게 들어보는 듯한 정겨운 내용이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제목처럼 작은 일상의
모습부터 평소 우리 엄마가 느꼈음직한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 더욱 진솔하게 느껴지는 문장들이었다.
특히나 본인은 욕심이 없기에 그저 보통 가정의
보통 사람의 사윗감을 고르고 싶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혼처가 그렇게나 까다로운 조건인지 몰랐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어쩜 우리 엄마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중략)...
내가 생각하고 있는 보통 사람과도, 신문사에서
뽑은 보통 사람과도 다른 또 하나의 보통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보통 사람의 실체를 파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러다가는 내가 보통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정말인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모르겠다. 지금 누가 나에게 보통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이마에 뿔만
안 달리면 다 보통 사람이라고 대답하겠다.
_P. 55
그녀의 유명세에 비해서 꽤나 검소한 삶을 살았던
모습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러 에피소드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한때 필리핀 독재 대통령이었던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의 구두가 3,000 켤레나 있었다는
엄청난 낭비벽과 저자의 신발장을 비교도 해본다.
그리고 이해인 수녀와의 만남도 저자의 일기처럼
당시의 생각과 감성으로 편하게 들어 볼 수 있었다.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 마음과 달리 할머니의 사랑을
버거워했던 철없던 시절을 뒤늦게 다시 돌아보기도 하는데,
칠순 여행으로 다녀왔던 유럽 여행 사진을 자식들의
무관심에 남겨둘 이유나 필요 없어서 모두 불살라
버렸다는 친구의 원망 어린 이야기와 빗대어 보면서,
이렇게 또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월이 돌고 도는 듯했다.
...(중략)...
나와 나의 어머니의 딸에 대한 모순된 생각은
매우 비슷하다. 그렇지만 나의 어머니와
내가 딸을 기르는 가르침에 있어서
똑같은 헛수고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한 여자이기에 감수해야 했던
온갖 억울한 차별 대우를 딸에게만은
물려주지 않으려는 어머니들의 진지한 노력과
간절한 소망에 의해 여성들의 지위가
더디지만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_P.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