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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이다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평점 :
흔히 여행책을 읽는 이유는 두가지다. 곧 떠날 여행지에 대한 생생한 후기나 가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훌륭한 노하우를 얻기 위해서. 혹은 절대 가보지 못할 곳, 아니면 여행이 너무나 아른거리지만 물리적으로 떠날 수 없을 때 대리만족을 하기 위해서. 씨네21 기자이자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맛깔나는 진행자 이다혜 작가의 <여이가 아니면 어디라도>는 그 둘을 함께 만족시키는 훌륭한 에세이였다. 시인 보들레르의 시 '여기가 아니라면 그 어디라도'라는 시에서 채택한 책 제목이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낯설어지기 위해 떠날 뿐이다.'라는 표지 밑부분의 짧은 한마디처럼 여행에 대한 태도, 그리고 여행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참 마음에 들고 공감이 가서 짧은 한강 여행 중에 순식간에 읽었다. 텐트를 치고 누워서 마음껏 여유를 즐기며, 블루투스에서 흘러나오는 볼빨간사춘기의 노래를 BGM 삼아 책장을 넘겼다. 아무런 목적 없이, 실제 구글맵을 켜서 저자처럼 전세계 방방곳곳을 누비기도 했다. 2~3시간 남짓한 여행책 독서는 제법 탁월한 선택, 짧은 여행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졸리지 않으면 자지 않는다.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생각하며 바람을 느끼며 걷는다. … 고작 이런 걸 하기 위해 날 찾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지낸다. 바다를 보고 있거나 정원을 보고 있거나 그냥 잠만 자거나.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없이 살아본다. ‘혼자’ 여행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이 시간이 내게 소중해서다. 시간을 그냥 보내기 위해서. ---「목적이 없어서」중에서"
사실 여행책은 요즘 통 손이 가지 않았다. 올해만 싱가폴, 태국 등 뭐에 홀린듯 해외를 부쩍 많이 다니기도 했기에 크게 여행에 대한 기다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읽은 여행책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었다. (불평쟁이 할아버지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을 제외하면.) 요즘 같은 스마트폰 시대에 크게 유익하지 않는 출입국 팁이 담겨있는 딱딱한 여행 정보책, 혹은 아날로그 필터감성에 푹 빠진 아련한 사진이 잔뜩 담겨 있는 여행 사진 에세이 등이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묘하게 여행에 대한 자기 자랑과 마치 위험을 무릎쓰고 지도밖을 행군해야 진정한 의미의 여행, 나아가 자아성찰에 성공한다는 거창한 포부는 내 철학과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돈 주고 여행 위험지를 가라고해도 가지 않을 것이다. 해외 여행 기준의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는 축구인 (응?) 내게는 위험 지역에서 펼쳐지는 아슬아슬한 여행기는 도저히 이해 못할 객기일 뿐이었다.
“내가 여행과 관련해서 유일하게 되뇌는 점이 있다면, “예정대로 되지 않는 일을 받아들일 것.” 오로지 그것을 더 여유 있게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매일의 삶에서 예정대로 되지 않는 일은 내 힘으로 돌파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라면 더 부드럽고 가볍게, 여러 가지 변수를 받아들인다. 아마도 나는, 평상시에 대충 ‘해치울’ 수 없는 것들을 해버리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 같다.”
(‘떠나는 찰나의 중독성에 대하여’ 14쪽)
호주를 첫 해외여행으로 다녀오고, 일본 여행에는 도가 튼 이다혜 작가의 여행 목적은 무척 와닿았다. 뭔가 대단한 경험이나 자아 찾기가 목적이 아니라 그냥 집이 아닌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게 여행이다. 작가는 여행 중 실패와 실수를 전제에 두고 온전히 여행을 즐길 준비를 한다. 그녀의 여행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게 목적인 경우도 있고, 무언가 꽂힌 물건을 사기 위해, 맛있는 음식(예를 들면 내장요리라든가, 혹은 내장요리라든가.)을 먹기 위한 설레는 과정이다. 핫플레이스 어디는 꼭 가서 메뉴 A를 먹어야한다, 야경이 예쁘니깐 어디 스팟에서 꼭 몇시에 사진을 찍어야한다. 이런 류의 부담감은 오히려 여행을 스트레스로 변질되게 만들 수 있다. 당연히 낯선 곳이기에 예정대로 일이 되지 않더라도 평소보다 더 유연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게 여행의 매력이다.
"그냥 떠나고 싶어서 핑계를 만든다. 나는 너무 지쳤어. 잠깐 여기서 끊어갈 타이밍이라고 느낀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생각을 하고 싶어졌어.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면 무엇이 보일까 궁금해.
신발이 발에 너무 잘 맞아서, 여권에 빈 칸이 많아서, 경주에 가본 지 오래되어서, 나이 들기 전에 뭐든 더 해보고 싶어서, 핸드폰 사진첩에 매일 먹는, 같은 음식 사진만 한가득이라서.
그냥 그러고 싶어서.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중에서"
중국에서 겨우 찾아낸 북한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들을 묘한 분위기에 먹은 에피소드,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내장 요리 매니아를 위한 가이드, 헌책방, 서점, 옷 등 쇼핑에 관한 소소한 팁, 여행지에 빠질 수 없는 책에 대한 이야기, 출장은 여행으로 삼아야하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등 짧지만 흥미로운 이야기가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에 가득했다. 그중에도 특히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자를 위한 안내문'은 특히나 유용했다. '가족여행은 가족이 다함께 고립되는 과정'임을 밝히며 가족여행은 필연적으로 싸움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며 차분하게 조언한다. 화장실은 일단 보이면 무조건 들어가라, 피곤해하는 사람이 생기면 무조건 커피숍이든 호텔이든 들어가서 쉬게 하라, 그리고 부모님의 다음 여행 질문에 영리하게 대답하는 법까지 마치 전수해져 내려오는 비기처럼 실려있다. (얹혀 있기의 기술 역시 유용했다. 호의가 계속되어 권리인줄 아는 민폐 손님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심해야한다.)
구어체가 절묘하게 섞여있는 이다혜 작가의 에세이는 일단 읽기 쉽고 재밌다. 곳곳에 차분한 유머가 숨어있고, 여행에 대한 고민과 기대가 글에 묻어난다. (물론, 차분하지 않은 적나라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음란마귀들 같으니. 성당 제단 뒤편 벽에 그려졌다 해도 뭘 보고 있는가 말이다. '남자☆나체★대폭주☆꺄핫★모두가☆벗고★있다☆여기도★페니스☆저기도★페니스'같은 생각을 한 모양." 처럼.) 무엇보다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에는 '떠남'의 소중함만큼이나 '돌아옴'에 대한 감사함이 섞여있는 여행책이다. 책 초반에 밝혔듯이 저자의 여행은 근본적으로 주말여행이고 체류형 여행이나 세계일주와는 명확히 다른 색깔이다. 떠났을 때만 진정한 나를 찾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의 삶을 위한 떠나기'를 추구하는 모습에 대공감했다. 그리고 패키지 여행자를 무시하거나, 특이한 경험이 없으면 은연중에 무시하는 다른 종족으로 느껴지는 여행자와 달리 저자는 지극히 평범하고 겸손한 태도다. 결국 작가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에 여행의 소중함을 알고, 더욱 부지런히 또 열심히 낯선 곳으로, 혹은 익숙하지만 새로운 것과 마주치는 곳으로 떠난다.
지금도 두달 후에 여행을 기다리고 있다. 홍콩과 마카오. 가깝지만 이국적이고 색다른 경험이 넘칠 것만 같은 곳이다. 겨우 크리스마스를 껴서 ('매우'라고 믿고싶지만) 제법 합리적인 가격에 항공권과 숙박을 예약하는 순간부터 설렘이 시작됐다. 사실 지금은 그리 와닿지가 않는 게 사실이다. 꼬박꼬박 새벽에 일어나 비몽사몽 출근 준비를 하고, 땀에 쩔어 만원 지하철에 낑겨서 퇴근을 하고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 뻥 뚫린 도로에서 140km로 달리며 당직을 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잠깐 쉬어갈 수 있는 여행이 기다리고 있기에 흐뭇하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틈틈이 맛집이나 추천 여행지를 둘러보며 상상속의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누군가는 여행을 많이 가면 사치스럽다고, 여행을 가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욕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해외에서 가장 가지고 싶은 점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세다. 여행가는데 돈을 보태주지 않을 거면 비아냥과 충고는 그저 꼰대질, 훈장질에 불과하기에 쿨하게 씹어버리자. 내 돈, 내 시간을 들여서 하는 건데 눈치보지 말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설렘으로, 돌아온 후에는 여운을 안고 살아가는 게 일상이다. 그렇기에 여행에서만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말고 하루하루 맞이하는 일상을 여행처럼 행복하게 보내야겠다. '여'기가 '행'복하기 위해 떠나는 게 바로 여행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