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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히노 에이타로 지음, 이소담 옮김, 양경수 그림 / 오우아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대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다행히도 독서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경영, 자기계발 서적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는데, 마치 회사 업무의 연장선상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종종 무료로 나눠주는 동종 업계 관련 책 역시 정말 필요하면 보고서로 보고 말지, 굳이 시간을 내서 읽고 싶지 않았다. 업무능력 배양은 개나 주고, 그저 퇴근 후에는 회사를 잊고 편하게 쉬고 싶은 게 정상적인 마음이더라. 그래도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직장 관련 서적 중 인상 깊은 게 일년에 한 권씩은 남았다. 1~2년차에는 직장인의 애환을 현실적으로 그랜 만화 <미생>. (지금 보면 판타지만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훌륭한 상사들이 많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영부영하다 보면 오는 3년차를 그린 <삼년차 직장인>. (이 책을 제주도 독립서점에서 사온 동생 역시 이젠 직장인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어느덧 진급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앞둔 4년차 올해는 <아, 보람따윈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쉽게 꺼내지 못하는 이 말이 제목인 것부터 요즘 흔히 말하는 ‘사이다’였다. 아, 그러고보니 회사에 너무 목매지 말라는 지혜를 전하는 이 책 역시 회사 도서관에서 빌렸다는 게 묘하다.
'과로사', '넵병', '월요병', '일하기싫어증'.
21세기 한국 직장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병명들이다. 과연 이런 비합리적인 직장인들의 병명을 그 맛을 제대로 살려서 영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네'는 너무 건조하고, '넹'은 너무 가볍고, '넷'은 군대같고. 그래서 적당히 절도있고 깔끔하고 건조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고 뭔가 확실한 인상을 주는 것 같아서 '넵'으로 답변을 한다는 것이다. 무심코 업무 카톡방을 보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적당히 '네~!, 네!, 알겠습니다.'를 섞어가며 지시 전달을 확인하는 걸 보니 나도 넵병에 100% 걸린 상태다. 저자 히노 에이타로 역시 수직적이고 경직된 조직문화를 자랑하는 일본 직장 생활을 경험한 이다. 경영자와 회사원 모두의 입장을 경험해보고 현대 노동 현실의 모순을 깨닫고 '탈사축 블로그'를 통해 그 문제점을 꼬집었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주세요>는 이런 그의 현실적이고 공감되는 노동에 관련된 철학이 적절하게 정리된 책이다. 각종 SNS에서 '그림왕 양치기'란 필명으로 재치있는 그림을 선보이는 양경수의 공감 100% 일러스트와 함께하니 책장이 술술 넘어가더라. (사실 SNS에 올라온 일러스트만 보고 가볍게 읽을 책인줄 알았다. 하지만 일러스트만 모여있는 책은 <실어증입니다, 일하기싫어증>이었다.)
야근은 태반이고, 퇴근 후 카톡 업무 지시는 일상이다. 월차를 사용하는 것도 팀장의 눈치를 봐야하며, 회사에서 지원하는 자기 계발 역시 농땡이가 아님을 적극 해명해야한다. 그렇다고 추가 수당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명감', '팀워크'따위로 포장해버리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배신자로 낙인찍는다. 저자는 다른 범법자는 비난하면서, 유독 노동법에는 관대한 기준을 내세우는 현 세태를 비판한다. 과로사로 사람이 진짜 죽어나가도 그저 적당한 추모와 위자료로 떼우고 별도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 산재를 인정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혹시나 회사의 압박으로 세상을 떠난 이가 있다면 과로사로 인정하기는커녕, 애초에 부적응자로 욕한다. 따지고 보면 야근도 응당 줘야할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개인의 노동력을 훔치는 행위다. 그저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임직원들의 하나된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말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이런 비합리적인 사회가 만연한 이유를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사축'(회사에 매인 가축)으로 자라는 세뇌교육을 받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장래희망은 번듯한 직업을 적도록 강요하고, 불합리의 연장선상에서 과잉 충성, 보람 만능 주의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다.
따지고 보면 온갖 직장생활백서는 자발적으로 사축이 되라고 은연중에 부추긴다. 생존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CEO 마인드로 일해야한다는 꼰대질에 저자는 유쾌하게 답한다.
"그럼 경영자 마인드로 일할 테니 경영자의 월급을 주세요."
내가 입사 때부터 항상 생각했던 것들이 명쾌하게 정리된 기분이다. 일과 인생을 동일시한 예전 꼰대 시대들의 마인드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본인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고(정년 보장), 적당히 연차가 쌓이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보상이 나오는 구조(연공 서열)를 지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IMF를 필두로 이제 세상이 달라졌는데, 여전히 옛날 추억에 잠겨 있으면 그건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정신병이다. 가족, 취미, 여행 등 중요한 가치들이 얼마나 많은데 확실하게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못하는 회사에 모든 걸 거는 건 불확실한 도박일 뿐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일의 보람'을 깎아내리거나, 또라이라고 꾸짖는 건 아니다. 일의 보람을 존중하고, 워커홀릭을 인정하면서도 굳이 일에서 보람을 찾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많으니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업무 시간 외에도 일에 매달리며, 거기서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충만한 이들이 또라이라고 여긴다. 대체로 그런 사람들은 상대를 존중하기보다는 자기같지 않은 사람들을 이기적이고, 팀워크가 부족하며 월급 루팡이라고 욕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같은 노예 신분인데!
4년차가 되니 제법 많은 동기들이 회사를 떠났다. 로스쿨, 이직, 사업. 다양한 이유로 회사를 떠나고, 나는 또 다른 삶을 부러워하며 신기해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전히 꾸역꾸역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들을 보며 자위하고, 격월로 나오는 보너스로 지름신을 영접하면서. 여러모로 생각해도 현 직장이 매우 짜증나고 불합리하긴 해도 차악이긴 하다. 선뜻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해서 지금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기에 그저 신포도처럼 애써 합리화한다. 하지만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주세요>를 보면서 일의 보람을 그닥 느끼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동질감에 흐뭇했다. 아울러 회사가 월급을 거저 주는 게 아니라 최대한, 아니 그 이상으로 직원을 착취하려는 조직이란 성격에 주목했다. '사축'으로 내 건강과 청춘을 날려버리지 않기 위해 영리하게 행동해야겠다. 회사가 제공하는 복리후생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기 계발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회사 하나만 바라보고 충성한다고, 이들이 내 인생을 책임질 만큼 낭만적이진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눈치야근'과 '뻥군기'가 몸에 베어있다. 조기 퇴근을 권장하는 스마트데이에 관련된 업무를 업무 시간 외에 쓰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여전하다. 그래도 적어도 이런 마음가짐 변화만으로도 경직된 조직생활에 약간의 균열이 시작될 거라 믿는다.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곳이 절망적이라면 너무나 슬프지 않은가!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일 뿐이며, 돈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생각이 아니다. 아, 야근 따윈 됐으니 보람을 보너스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