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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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집행인이었다. 2004년 9월 12일 새벽은 내가 아버지 편에 서 있었던 마지막 시간이었다.

 많은 작가들은 첫문장 쓰기를 매우 어려워한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기도 하고, 엄청난 궁금증을 유발하며 독자를 책상 앞으로 붙잡아두는 엄청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휴대폰과 인터넷에 (인정하기 싫지만) 중독된 요즘 독자들을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강렬한 한마디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7년의 밤>은 분명히 성공적이다. 첫 문장만으로도 미스터리한 소설의 분위기가 그려지고, 앞으로 펼쳐질 세령호 살인 사건의 전말을 엿볼 거란 기대에 부푼다. 물론 처음의 기대감에 못미치고, 내용이 흐지부지 마무리된다면 아무리 멋진 첫 문장이라도 그럴듯한 낚시에 그친다하지만 책장을 열면 폭발적인 사건과 비밀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7년의 밤>을 읽고나면 첫 문장이 엄청난 명문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기대만큼 강렬하고, 기대보다 더 생생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한 남자는 딸의 복수를 꿈꾸고, 한 남자는 아들의 목숨을 지키려 한다'.
한 문장으로 요약될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은 광기 어린 세령호의 사건을 파헤친 스릴러물이다. '살인마의 아들'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아온 세원은 세령마을에서 함께 지냈던 승환을 가족처럼 따르며 자랐다. 소설가이자 보안업체 직원, 잠수부인 승환에게 잠수를 배우며 알음알음 대중의 눈초리를 피하며 커왔지만 잊고 지냈던, 아니 잊으려고 노력한 아버지의 사형 집행 소식을 전해듣는다. 등대마을에서 조용히 지내며 세상에서 지워지길 바랬던 서원은 7년 전 세령호의 재앙이 낱낱이 쓰여진 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 그의 아버지 최현수는 실패한 프로야구선수이자 세령호를 물에 잠기게 하고 어린 여자아이를 죽인 살인마다. 어린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엘리트로 자라온 치과의사 오영제. 하지만 그는 겉보기와 다르게 아내와 아이에게 훈육이란 이름으로 학대를 가해온 공격적인 성향이었고, 최현수에게 어마어마한 복수를 계획한다. 차로 아이를 치고 살아있는 채로 호수로 던져버린 살인마와 아이를 잃은 슬픔에 괴로워하며 굿으로라도 영혼을 달래려는 아버지. 단순히 두 사람의 갈등으로 일단락하기에는 사실과 진실 사이에 간극이 너무나 크다. 그리고 <7년의 밤>은 그날 있었던 세령호의 비극을 다시 따라가보며 사실과 진실을 파헤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그러나’에 관한 이야기다.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파멸의 질주를 멈출 수 없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자, 누구에게나 있는 자기만의 지옥에 관한 이야기며, 물러설 곳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 <작가의 말>

 매스컴, 그리고 그들이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기사를 받아들이는 대중은 무엇이 진실인지가 궁금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따라다니는지다. 그들은 파편적인 사실을 명백한 진실이라 믿어버리고, 그런 진실은 그저 빠르게 휘발되어버린다. 나중에 밝혀질 사건의 전말이나 억울한 누명 따위는 재미가 없으면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서원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계속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지옥속에서 커간다. 세령호는 추억이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라 그저 비극의 무대이며, 가족을 잃어버린 잊고 싶은 기억일 뿐이다. 책을 읽다보면, 그리고 살인사건의 전모가 하나씩 밝혀질 수록 더욱 모호해진다. 선과 악의 대립이라고 결론짓기에는 너무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실수는 사고가 되고, 사고는 범죄가 되어버린다. 피해자의 복수는 억울한 딸을 위함인지, 아니면 훈육으로 길들인 딸의 상실한 데 대한 책임을 물기 위함인지 모르겠다. 실수에서 파멸로 이어지는 지옥같은 이야기가 뒤섞이니 지켜보는 긴장감이 쏠쏠하다. 과연 영화로 나왔을 때 원작 소설의 맛을 살릴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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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
히노 에이타로 지음, 이소담 옮김, 양경수 그림 / 오우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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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다행히도 독서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경영, 자기계발 서적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는데, 마치 회사 업무의 연장선상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종종 무료로 나눠주는 동종 업계 관련 책 역시 정말 필요하면 보고서로 보고 말지, 굳이 시간을 내서 읽고 싶지 않았다. 업무능력 배양은 개나 주고, 그저 퇴근 후에는 회사를 잊고 편하게 쉬고 싶은 게 정상적인 마음이더라. 그래도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직장 관련 서적 중 인상 깊은 게 일년에 한 권씩은 남았다. 1~2년차에는 직장인의 애환을 현실적으로 그랜 만화 <미생>. (지금 보면 판타지만화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훌륭한 상사들이 많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어영부영하다 보면 오는 3년차를 그린 <삼년차 직장인>. (이 책을 제주도 독립서점에서 사온 동생 역시 이젠 직장인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 어느덧 진급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앞둔 4년차 올해는 <, 보람따윈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쉽게 꺼내지 못하는 이 말이 제목인 것부터 요즘 흔히 말하는 사이다였다. , 그러고보니 회사에 너무 목매지 말라는 지혜를 전하는 이 책 역시 회사 도서관에서 빌렸다는 게 묘하다.
 
'과로사', '넵병', '월요병', '일하기싫어증'.
21세기 한국 직장인에게 너무나 익숙한 병명들이다. 과연 이런 비합리적인 직장인들의 병명을 그 맛을 제대로 살려서 영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는 너무 건조하고, ''은 너무 가볍고, ''은 군대같고. 그래서 적당히 절도있고 깔끔하고 건조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고 뭔가 확실한 인상을 주는 것 같아서 ''으로 답변을 한다는 것이다. 무심코 업무 카톡방을 보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적당히 '~!, !, 알겠습니다.'를 섞어가며 지시 전달을 확인하는 걸 보니 나도 넵병에 100% 걸린 상태다. 저자 히노 에이타로 역시 수직적이고 경직된 조직문화를 자랑하는 일본 직장 생활을 경험한 이다. 경영자와 회사원 모두의 입장을 경험해보고 현대 노동 현실의 모순을 깨닫고 '탈사축 블로그'를 통해 그 문제점을 꼬집었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주세요>는 이런 그의 현실적이고 공감되는 노동에 관련된 철학이 적절하게 정리된 책이다각종 SNS에서 '그림왕 양치기'란 필명으로 재치있는 그림을 선보이는 양경수의 공감 100% 일러스트와 함께하니 책장이 술술 넘어가더라. (사실 SNS에 올라온 일러스트만 보고 가볍게 읽을 책인줄 알았다. 하지만 일러스트만 모여있는 책은 <실어증입니다, 일하기싫어증>이었다.)
 
야근은 태반이고, 퇴근 후 카톡 업무 지시는 일상이다. 월차를 사용하는 것도 팀장의 눈치를 봐야하며, 회사에서 지원하는 자기 계발 역시 농땡이가 아님을 적극 해명해야한다. 그렇다고 추가 수당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명감', '팀워크'따위로 포장해버리고, 이를 어기는 사람은 배신자로 낙인찍는다. 저자는 다른 범법자는 비난하면서, 유독 노동법에는 관대한 기준을 내세우는 현 세태를 비판한다. 과로사로 사람이 진짜 죽어나가도 그저 적당한 추모와 위자료로 떼우고 별도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 산재를 인정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혹시나 회사의 압박으로 세상을 떠난 이가 있다면 과로사로 인정하기는커녕, 애초에 부적응자로 욕한다. 따지고 보면 야근도 응당 줘야할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개인의 노동력을 훔치는 행위다. 그저 회사 사정이 어려우니 임직원들의 하나된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말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이런 비합리적인 사회가 만연한 이유를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사축'(회사에 매인 가축)으로 자라는 세뇌교육을 받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장래희망은 번듯한 직업을 적도록 강요하고, 불합리의 연장선상에서 과잉 충성, 보람 만능 주의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운다.
 
따지고 보면 온갖 직장생활백서는 자발적으로 사축이 되라고 은연중에 부추긴다. 생존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CEO 마인드로 일해야한다는 꼰대질에 저자는 유쾌하게 답한다.

"그럼 경영자 마인드로 일할 테니 경영자의 월급을 주세요."

내가 입사 때부터 항상 생각했던 것들이 명쾌하게 정리된 기분이다. 일과 인생을 동일시한 예전 꼰대 시대들의 마인드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본인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고(정년 보장), 적당히 연차가 쌓이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보상이 나오는 구조(연공 서열)를 지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IMF를 필두로 이제 세상이 달라졌는데, 여전히 옛날 추억에 잠겨 있으면 그건 노스탤지어가 아니라 정신병이다. 가족, 취미, 여행 등 중요한 가치들이 얼마나 많은데 확실하게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못하는 회사에 모든 걸 거는 건 불확실한 도박일 뿐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일의 보람'을 깎아내리거나, 또라이라고 꾸짖는 건 아니다. 일의 보람을 존중하고, 워커홀릭을 인정하면서도 굳이 일에서 보람을 찾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많으니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업무 시간 외에도 일에 매달리며, 거기서 인정받으려는 욕구로 충만한 이들이 또라이라고 여긴다. 대체로 그런 사람들은 상대를 존중하기보다는 자기같지 않은 사람들을 이기적이고, 팀워크가 부족하며 월급 루팡이라고 욕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면서. 같은 노예 신분인데!
 
4년차가 되니 제법 많은 동기들이 회사를 떠났다. 로스쿨, 이직, 사업. 다양한 이유로 회사를 떠나고, 나는 또 다른 삶을 부러워하며 신기해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여전히 꾸역꾸역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들을 보며 자위하고, 격월로 나오는 보너스로 지름신을 영접하면서. 여러모로 생각해도 현 직장이 매우 짜증나고 불합리하긴 해도 차악이긴 하다. 선뜻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해서 지금보다 낫다는 보장이 없기에 그저 신포도처럼 애써 합리화한다. 하지만 <,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 수당이나 주세요>를 보면서 일의 보람을 그닥 느끼지 못하는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동질감에 흐뭇했다. 아울러  회사가 월급을 거저 주는 게 아니라 최대한, 아니 그 이상으로 직원을 착취하려는 조직이란 성격에 주목했다. '사축'으로 내 건강과 청춘을 날려버리지 않기 위해 영리하게 행동해야겠다. 회사가 제공하는 복리후생을 최대한 활용하고, 자기 계발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회사 하나만 바라보고 충성한다고, 이들이 내 인생을 책임질 만큼 낭만적이진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눈치야근' '뻥군기'가 몸에 베어있다. 조기 퇴근을 권장하는 스마트데이에 관련된 업무를 업무 시간 외에 쓰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여전하다. 그래도 적어도 이런 마음가짐 변화만으로도 경직된 조직생활에 약간의 균열이 시작될 거라 믿는다.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곳이 절망적이라면 너무나 슬프지 않은가!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일 뿐이며, 돈 받은 만큼만 일하겠다는 것은 결코 이기적인 생각이 아니다. , 야근 따윈 됐으니 보람을 보너스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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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 (반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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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들에게 가장 두려운 상황은 스마트폰 배터리 부족 알람이 깜빡이는 순간이다. 21세기는 정보의 홍수를 넘어 정보의 과잉 시대로 변질됐다. LTE 속도로 클릭 한번이면 온갖 정보들이 쏟아지고, 궁금한 게 있으면 최고의 지성집단 '지식인'을 먼저 찾기 마련이다. 옛날처럼 도서관 대출에 목맬 필요도 없고, 힘들게 물어물어 그 분야의 대가를 찾아갈 것도 없다. 하지만 정보의 접근성이 높아진만큼 오히려 신뢰도는 떨어지고 논리는 빈약해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페이크뉴스와 허위 루머가 한번 퍼지면 쉽게 바로잡기 힘들고, 내용의 구성이 조악한 발표나 PPT가 판을 친다. (얼마나 심하면 대학 강의 발표시 지식인, 위키백과처럼 오픈소스 라이브러리 정보는 사용하지 말라고 미리 말하는 경우도 있다.) 정보의 과잉 시대에 필요한 고급 정보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훌륭한 결과물로 빚어내는 건 '편집'의 힘이다. 그리고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이자 문화심리학자인 괴짜 김정운 교수가 펴낸 <에디톨로지>는 이런 문제를 콕 짚어낸 책이다. 

'에디톨로지는 다시 말해 '편집학'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끊이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나는 한마디로 '편집'이라 정의한다.'-24페이지

'융합형 인재, 크로스오버, 통섭.' 정보 과잉 시대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과 비슷한 개념인 '에디톨로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새로운 생각을 창조해내는 지혜와 힘은 결국 에디톨로지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남자의 물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 다른 저서들과 비슷하게 유쾌하면서도 (마음먹고 논문투로 글을 쓸 정도로) 진중하고 묵직한 느낌도 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경 구약처럼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다른 편집이다. 그럴듯한 짜깁기, 표절과 묘하게 다른 영역에 있는 구체적이고 주체적인 편집 행위에 대한 분석이 다양한 사진, 그림 자료와 함께 있다. 그대로 차용하는 게 아니라 한단계 발전시키고 심화시키는 게 편집학의 매력이자 진정한 힘이다. 역사상 위대한 천재라 불리는 이들도 아예 새로운 걸 창조해낸 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독일의 통일이 단순한 우연의 결과였다는 에피소드, 스티브 잡스의 창조성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니라 누누이 본인이 주장했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흥미롭고 색다른 관점이었다. (한편으론 자기 자랑같이 느껴졌지만, 이렇게 대놓고 하는 건 오히려 적대감이 덜하다.)

뭔가 새로운 것을 손에 쥐려면, 지금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 지금 손에 있는 것 꽉 쥔 채 새로운 것까지 손에 쥐려니, 맘이 항상 그렇게 불안한 거다. -377쪽

사실 MBC 간판 예능 <무한도전>을 보면 얼마나 편집의 힘이 큰지 알 수 있다. 여기저기 멘트가 맞물리는 상황을 빅재미로 살리는 건 PD의 자막과 특수효과 등이다. 아울러 PD의 생각까지 자막으로 상황에 덧붙이며 질적으로 다른 색다른 형식의 예능으로 거듭났다. 결국 비슷비슷한 재료를 가지고 얼마나 훌륭하게 빚어내는 가는 편집자의 몫이다. 직접 편집자가 되는 경우도 많지만 편집되어 나온 결과물을 융통성있게 받아들이는 것도 능력이요, 실력이다.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것도 에디톨로지의 영역이다. 가장 알맞은 예로 김정운 교수는 빌게이츠와 스티브잡스를 비교한다. 빌게이츠의 교장 선생님 훈화말씀과 비슷한 친절한 연설은 기부와 교육의 기회 제공 등 훌륭한 내용을 일관되게 이어진다. 하지만 'Stay hungry, Stay foolish'로 요약되는 스티브 잡스는 듣는 이에게 해석의 장을 열어준다. 그렇기에 괴팍하지만 매력적이고 거듭 회자되는 연설이란 것이다. 이밖에도 독일, 일본 거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다양한 에피소드, 축구 이야기, 프로이트 신랄하게 까기 등 전방위를 넘나드는 화려한 편집술은 독자의 흥미를 끌기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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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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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라면 으레 피라미드. 에펠탑같은 유적이 박살나거나 워싱턴 시내가 대혼란에 빠지는 장면부터 떠오른다. 하지만 한국에서 <컨택트>로 개봉한 드뇌 빌뇌브의 영화에는 언어, 시간 등 다양한 생각할 거리가 가득 담긴 차분한 SF영화였다. 12개의 외계 비행 물체가 세계 각지에 등장했고, 정체 모를 햅타포드와 소통하기 위해 언어학 전문가가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면서 햅타포드가 보기에는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기억인줄 알았는데 미래의 일일 수도 있고,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이해할 수도 있다. 목적론적 세계관이 중심인 <컨택트>의 원작 소설은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 최고의 과학소설에 수여되는 네뷸러상, 휴고상, 로커스상, 스터전상, 캠벨상, 아시모프상, 세이운상, 라츠비츠상까지 8개상을 모두 석권한 테드 창 작가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총 8개의 SF 소설이 담겨있다.

-만약 성서 속의 그 탑을 쌓아올려 실제로 ‘하늘의 천장’에 닿는다면 어떻게 될까? _「바빌론의 탑」
-만약 인간의 지능이 인공적으로 계속 강화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원하게 될까? _「이해」
-만약 외계의 생명체가 지구를 방문하고 지구의 언어학자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_「네 인생의 이야기」
-만약 한 수학자가 수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증명을 도출해내게 된다면? _「영으로 나누면」
-만약 일흔두 글자만으로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된다면? _「일흔두 글자」
-만약 인류과학자들의 지성이 인류의 과학 발전을 따라갈 수 없게 된다면? _「인류 과학의 진화」
-만약 전능한 신과 그의 천사들이 정기적으로 지구를 방문하여, 사람들에게 축복과 고난과 응징을 배분한다면? _「지옥은 신의 부재」
-만약 외모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끼는 뇌의 기능을 임의로 차단할 수 있다면, 당신의 선택은? _「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 다큐멘터리」
- 출판서 서평 中

삶의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색다른 상상을 이어가는 8가지 소설은 그 자체로 경이롭고 신비하다. 전형적인 문과생 출신으로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과학도 테드 창의 소설이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과학이 줄 수 있는 지적 상상력의 극한을 살짝 엿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신비했다. (배경지식이 조금 더 폭넓었다면 이야기에 몰입도가 달라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영으로 나누면>은 거의 이해하지 못한채 책장을 넘겼으니.) 이야기를 읽고 테드 창의 창작 노트를 읽어보니 인간의 '감정'이 중심이고 과학은 훌륭한 소재이자 배경이더라. 읽는 내내 할리우드 영화로 구현하면 무척 화려하고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이 자주 들었다. 천사의 등장과 영험함을 체험해 천국을 가기 위해 기다리는 인간들의 행렬이 그려지는 <지옥은 신의 부재>, 인간 두뇌를 극한으로까지 끌어올렸을 때 벌어지는 두뇌 싸움이 기대되는 <이해>, 성서속의 탑이 하늘의 천장을 닿는 웅장한 규모의 <바빌론의 탑>. 각각 소설이 영화화할 거리가 무척 넘쳐나는 소설이었다. 특히 인간의 지능을 인위적으로 향상시켜 한차원 위의 세상에서 사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해>는 실제 영화화가 결정되었다. (머리를 밀어야한다는 것만 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캐릭터다.) 과연 내 기억이 과거가 아닌 미래의 일이라면? 온 세상의 패턴을 읽어낼만한 엄청난 지능을 가진다면? 즐거운 상상만으로도 이미 SF 소설의 묘미는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그나저나 만약 내가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과 절대 반복될 수 없는 추억을 위해 끌어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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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의 용기 - 베어 그릴스에게 영감을 준 진짜 영웅 이야기
베어 그릴스 지음, 하윤나 옮김 / 처음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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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내 점심이죠.", "훌륭한 단백질원이죠.", "하지만 맛이 중요한가요, 무조건 열량만 있으면 돼요."악어, , 전갈, 들개. 평범한 인간이라면 소스라치게 놀랄만한 야생의 포식자지만 베어그릴스에게는 훌륭한 열량 보충 식사거리다. 영국 특수부대 SAS 출신으로 '생존왕'으로 불리는 베어 그릴스는 TV 프로그램 <인간과 자연의 대결(Man vs. Wild)>로 유명해졌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산악, 해저, 사막 등 극한의 공간에서 살아남고 탐험하며 용기와 감동을 주는 그가 쓴 책 역시 그와 꼭 닮았다. <살아남은 자들의 용기>는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위대한 25명의 생존자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존하지 못한 케이스도 있다. 이야기의 끝이 죽음이나 실종으로 마무리되는 인물이 있으니 말이다. 특히 남극 도착 경쟁에서 밀려난 이의 도전 다룬 것을 보면 1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도전하는 그 행동 자체가 숭고한 것이다.
 
친구들의 살을 먹으며 목숨을 이어간 파라도, 바위에 낀 팔을 스스로 절단하고 살아난 랠스(영화 <128>의 실제 모델), 남극탐험에 기어이 성공한 아문센, 탈레반 총성을 피해 극적으로 탈출한 러트렐. 이들의 이야기는 기상천외하며 활자만으로도 놀랍다. 포기할법한 순간에도 끈기와 정신력으로 기지를 발휘하고, 용기있게 행동으로 옮겼다. 마치 평범한 인생, 안정적인 삶, 안전한 하루를 꿈꾸는 일반인과는 DNA 자체가 다른듯 그들은 극한의 순간을 이겨내고도 다시 도전하다. 다리를 잃고도 극한 마라톤에 도전하거나, 겨우 살아났는데 다시 전쟁터로 뛰어드는 것처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삶의 목표처럼 여겨졌다. 어떻게 그런 고문이나 고난 속에서도 침착을 유지할 수 있을지 놀랍기도 하고, 그만큼 철저한 반복 훈련, 연습이 중요하다는 것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게다가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 '실패를 준비하지 않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는 여러 명언의 유래도 알 수 있었다.
 
기승전'탐험' 전도사 베어 그릴스의 글은 언제나 '그릿'(Grit)을 강조하면 끝맺는다. 원제가 <The Grit>인 것처럼 25개의 이야기가 일관되게 그릿(한국어로 하면 기개, 모험 정신이 비슷한 단어일듯)을 강조한다. 때론 이야기의 흐름과 상관없이 마지막에 교훈을 전파하기 위해 명언과 용기, 도전을 거듭 칭송한다. 그러다보니 다소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전쟁 이야기는 크게 공감이 가지 않기도 했다. 전장에 홀로 남겨져 결국 고난을 이겨내 나치를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여러번 등장하니 딱히 감동적이지도 않았다. '스물살'이란 오타로 시작하는 책의 구성 역시 조금은 허술한 인상도 주더라. 그래도 저자가 주는 신뢰감, 일관된 신념은 제법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탐험이라 해봤자 고작 훈련소 행군이나 등산 살짝이 전부인 방구석 탐험가에게는 이런 대리만족도 훌륭한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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