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나의 작사법 - 우리의 감정을 사로잡는 일상의 언어들
김이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작권료 1위 미녀 작곡가'. 김이나를 소개하는 수식어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최근 MBC예능 <라디오스타>를 통해 작사가의 육성을 거의 처음 접했다. 딩크족이 거의 죄인시 취급되는 오지랖 넘치는 한국 문화에서 당당히 육아에 대한 부부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무척 멋져보였다. ('부럽네!'로 우스꽝스럽게 마무리한 김흥국이 예능 치트키인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소신있고 단호하게, 하지만 예의있고 모나지 않게 표현하는 건 매우 어렵고도 대단한 기술이다. 이렇듯 글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사람은 확고한 자신의 신념과 거듭된 실패, 이를 이겨내기 위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걸 엿볼 수 있었다.
 
<김이나의 작사법>은 단순한 작사 스킬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오며 자신이 세운 원칙과 다양한 경험을 들려주려는 책이었다. 음악업계에 종사하고 싶은 이를 위한 매우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조언이 담겨 있었다. '무작정 꿈을 향해 달려라, 노력하고 또 노력해라, 포지하지 말라'는 희망적이기만 메시지가 제일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이제는 이런 솔직한 팁이 더 와닿더라. 화려한 작곡가나 작사가뿐 아니라 생소한 A&R 담당자, 엔지니어 등 다양한 직업군의 협업으로 노래 한곡이 만들어진다는 걸 상세히 소개했다. SM, YG, JYP 등 거대 기획사의 화려한 면에 감춰진 고된 작업 과정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본인이 생각하는 노래가 돋보이기 위한 가사의 중요성을 펼치고, 프로의 기술을 조금씩 선보이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시나 소설이 아닌 가사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어쨌든 노래와 함께 해야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가수의 특징, 캐릭터를 상상하며 최적화된 가사를 짓는 게 어찌보면 히트곡 메이커 김이나의 비법인가보다.
 
글을 읽다보면 작사가 김이나뿐 아니라 인간 김이나도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느꼈다. 좋은 사람의 좋은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찌질한 감성, 내놓지 힘든 속내, 창피한 순간까지도 외면하지 않고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기술은 단순한 짬밥에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덕업일치'에 훌륭한 성공 사례라 그런지 본인이 하는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분명히 있지만, 제법 보람을 느끼는듯해서 부러움도 컸다. 본인이 좋아하고 선망하는 아티스트와 함께 일하며, 어느정도의 보상도 얻으며 즐겁게 일하는 건 축복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부모님과 떨어져 있던 트라우마가 쓸쓸한 <저녁 하늘> 가사로 재탄생했단 걸 털어놓는 과정도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감성에 푹 빠져 아무것도 못보는 건 누구나 겪는 일이다. 하지만 그걸 돌이켜보고 곱씹으며 솔직하게 털어놓고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편, 책에 소개된 노래들을 한번식 들어보고, 가사를 곰곰히 생각하는 일도 재밌었다. 그냥 아이유, 가인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던 때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주의자로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무수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와 다른 타인을 존중해야 하는가. 아니, 최소한 그들을 참아주기라도 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가끔은 내가 양보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 자유를 때로는 자제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타인들과 타협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과 연대해야 하는가.

결국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목적이고 나머지는 방편이다.

-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요약하면 8글자다. 우리가 남이가? 튀는 걸 곧 죄악시하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 제일 부족한 건 관용의 정신이다. 단체를 강조하고 집단주의 문화가 갖는 장점도 분명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결과만 강조하는 구시대적 유물이다. 개인의 희생을 강조하면서 예전 사례를 들먹이는 것은 꼰대가 하는 짓이다. 그런 꼰대를 팩트로 폭격하며 유명세를 얻은 판사 문유석의 개인주의 담론집은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찌 보면 가장 경직된 조직, 수직적인 문화가 팽배한 법조계에서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은 그와 공감하는 성향의 숨은 개인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 역시 기본적으로 이타심이 크지도 않고, 인간애가 넘치는 휴머니스트도 아니라며 고백하며 자신의 고민을 담담히 풀어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자는 그의 인생 모토는 너무나 공감이 되더라. 다양한 사례를 관통하는 그의 메시지 개인주의는 결코 이기주의와 같은 말이 아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이익, 쾌락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이기주의다.

반면 문유석 판사가 꿈꾸는 사회는 어찌보면 개인의 자유를 논하면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되짚어보는 곳이다. 대단한 명판결로 사건을 한번에 해결하는 일보다 억울한 이들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국가가 갖출 최소한의 예의에 대해 고민하는 그는 분명 이기주의가 아닌 합리적 개인주의자다.

법을 다루는 지위의 사람이 어찌보면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공정한 사회의 룰을 강조하는 것은 신기했다. 돈 몇푼에 사람을 쉽게 죽이고, 욕심에 사로잡혀 사기를 치고, 국가적 재난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들과 시스템의 붕괴를 일반인보다 훨씬 낱낱이 지켜볼텐데 그런 스탠스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금세 나약한 인간에 환멸을 느끼고,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에 불만을 갖고 욕하면서도 순응하기 바쁠 것 같은데 문유석 판사는 더 나은 공동체, 그 속에 행복을 찾는 따뜻한 인간을 찾으려 애쓴다. 진짜 문제는 본인이 따뜻한 멘토라 생각하고 결과주의, 단체주의란 허울 아래 폭력을 일삼으면서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문제적 인간들이다.

분명 피곤하고 괴롭고 외로운 시대다. 학교, 직장, 사회, 결혼, 육아, 거주, 살림살이. 뭐 하나 여유있고 더 나아졌다고 확실히 말하기 미안한 게 '헬조선'이다. 타인에게 양보하고 존중하는 것은 패자의 변명이고, 모조리 가로채야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자신이 정글같은 세계에서 왕으로 군림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합리적이고 환영할만한 논리겠지만, 절대 다수는 남은 조각을 가지고 다시 싸워야할 운명이다. 나는 1등으로 살아남을 자신도, 그러고 싶은 욕심도 없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해 묵묵히 일하고 열심히 참고 이겨낼 뿐이다.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를 항상 명심하고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으며 최대한의 행복을 끌어내고 싶다. 이런 마음가짐의 변화만으로도 조금씩은 공동체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도, 바람도 그릴 수 있다면 - 만화와 사진으로 풀어낸 인도여행 이야기, 인도 여행법
박혜경 지음 / 에디터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레, 카스트 제도, 타지마할, IT 강국, 갠지스 강, 비위생적, 여성인권, 19., 요가
인도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니 생각보다 부정적인 단어가 많았다. 악명 높은 사건 사고도 많고, 무엇보다 더러운 거리가 연상되어 '인도'라는 곳 자체에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가야하는 미지의 나라 인도로 떠나기 3주 전 조금이나마 정보를 얻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는 것과 약간의 정보라도 알고 외국에 나가는 것은 천지차이란 걸 여러번 느꼈기 때문이다. 봉사를 목적으로 가는 12일이지만, 오히려 여행지가 아니라 시골 마을에서 실제 인도인의 삶을 살짝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전세계 인구 2, 10억이 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라를 얇은 책으로 과연 얼마나 빠삭하게 알까 싶었다. 하지만 무지의 상태, 혹은 편견에 사로잡혀 인도를 삐딱하게 바라보기 보다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라도 그들의 문화를 이해한다면 조금 더 다가가기 편할 것 같았다.

인도철학 수업을 들었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드는 동시에, 조금 가벼운 책을 읽고 싶었다. 찾아보니 수많은 배낭 여행기와 중국을 뛰어넘을 잠재력을 가진 인도 경제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개인적으로 <마오를 이긴 중국, 간디를 넘은 인도>란 책 제목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힌두어, 영어뿐 아니라 헌법으로 인정한 공용어만 18종이고,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 등 온갖 종교가 공존하는 다양성의 나라를 선뜻 다가가기 힘들었다. 들고다닐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방대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특정 분야에 집중된 내용이기에 고르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만화와 사진으로 인도 배낭 여행을 풀어낸 <인도, 바람도 그릴 수 있다면>을 골라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숙제나 보고서가 아니라 오로지 내 궁금증과 기대를 위한 선택이니 부담을 갖지 않기 위해서다.

 

흔히 인도를 다녀온 이들은 극과 극으로 나뉜다. 극심한 정체, 비위생적 환경, 위험한 치안으로 다시는 인도를 가지 않겠다고 하거나, 인도병에 걸려 다른 편한 여행지는 아예 배제하고 오로지 영혼의 안식에는 인도가 최고라거 찬양하거나. 지은이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두려움보다 호기심에 이끌려 인도로 떠났다. 초반에는 낯선 환경과 사람, 더위에 지쳐 불쾌함으로 여행을 시작했지만 어느덧 매력에 푹 빠져 책 <파이 이야기>, 영화 <네임세이크>와 얽힌 추억도 잔뜩 담았다. 심지어 인도 여행에 불만 가득한 배낭여행자를 만나자 구구절절 인도의 매력을 설명할 정도니 이정도면 완전 푹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여행 내내 느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그리고 기록했다. 상상을 초월한 빈부격차에서 오는 놀라움, 배낭여행자가 갖는 환상과 실제 일상의 간극, 여행을 떠나와서야 배우는 관점의 차이까지 말이다.
 
"인도는 여전히 시끄럽고 더럽고 불친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처럼 작가는 인도의 바람까지 그림으로 담아내고 싶을 정도로 꼼꼼하고 아기자기하게 여행기를 정리했다. 기차표 구하는 방법이나 인도의 라씨 맛집 소개, 나마스떼는 힌두교를 위한 인사라는 것 같은 꿀팁 역시 귀여운 그림으로 술술 읽어 나갈 수 있었다. 무작정 인도를 찬양하기 보다는 불쾌한 경험이나 위험했던 순간도 솔직하게 적었기에 많은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바가지 요금에 실갱이를 하며 불쾌했던 경험, 다리 위에 서서 관광상품처럼 그들의 가난을 구경하며 느낀 오만함, 낯선 이의 친절을 경계했던 경험까지. 책을 읽고 나니 한 국가로 한정 짓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다양한 인도라는 공간에 편견이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인도 사람이 무조건 눈 크고 까맣다는 게 가장 큰 편견이다. 북쪽으로 가면 우리나라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인종도 있었다. 아울러 인도에도 스키장이 있다는 사실까지!) 인도의 악명 높은 더위와 더러움에 여전히 두려움이 크지만, 적어도 <인도, 바람도 그릴 수 있다면>을 읽고 나니 약간 시선이 넓어졌다. 그리고 약간의 기대가 새롭게 생겼다. 현지에서 만날 맑고 초롱초롱 눈망울의 아이들, 땀흘리며 봉사하고 뿌듯해하는 학생들과 함께 만들 추억이 인도병을 빚어내줄 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문장을 잘 쓰고 싶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첫 문장을 썼지만, 여전히 도입부는 어렵다. 김중혁이라면 묘한 비기, 아니 자연스러운 꼼수를 알려줄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작가 중 손꼽히는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이란 부제를 보고도 사실 100% 믿지 않았다. 엄청난 비기를 알려줄 거라 기대하지 않았고, 어마어마한 필력이 책장 몇장으로 요약하진 못하리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중혁 역시 솔직하게 그런 신의 한 수는 없다고 밝히면서, 그나마 비법이라면 일단 무작정 쓰는 행위, 그 자체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대화를 상상하는 힘’이 개성을 만드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소설을 쓸 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모든 글쓰기에 적용되는 말이다. 대화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고, 두 사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고,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화를 상상하다 보면 점점 가상의 인물들이 늘어난다. 처음엔 두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다가 어느 날 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머릿속 가상의 인물이 점점 늘어난다. --- p.108

결과물이 아무리 엉망진창이라도 창작의 세계로 뛰어든 순간 그건 바로 사랑스러운 일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나는 농담이다>, <악기들의 도서관>등을 펴낸 흑임자 김중혁 작가는 김천 3인문(김연수, 문태준)의 한 축을 담당한다. 온갖 잡다한 음악, 그림, 스포츠, 영화, 전자제품, 심지어 공장까지 관심사가 다양한 그의 글솜씨 비결은 역시 다작이다. 단편, 장편, 수필, 심지어 만화를 넘나들며 쉬지 않고 색다른 창작물을 토해내는 김중혁. '성실함'이 훌륭한 작가의 척도 중 하나라면 그는 확실히 훌륭하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그동안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한 그의 자서전이자, 제법 매력적인 창작 노트를 공개하는 기회였다.

책이란, 대화의 시작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오래된 문장을 읽고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대화를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책이 묻고 내가 대답한다.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책 속에 숨어 있다. 글쓰기는 가장 적극적으로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수많은 책들을 읽은 후 자신의 생각을 책에다 적는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내 이야기를 섞는 것이다. --- p.278

그는 쉴새없이 메모를 붙이고, 화이트보드에 관계도를 썼다 지우고, 아이패드, 아이맥, 독서대 등 다양한 사물을 활용해 쓰고 또 쓴다. (증정품 두루마리 포스트잇은 아직 하나도 쓰지 않았다.) 마감에 시달리지 않을 때는 늘어져라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는 것도 좋은 리프레쉬 방법이다. 물론 그냥 지나치는 게 아니라 상세하게 '관찰'하며 익숙한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게 유쾌한 표현과 독창적인 시각의 비결이었다. 세상을 관찰하고, 동시에 세상을 관찰하는 나를 관찰하는 산책은 당연히 좋은 취미다. 힘을 약간 빼야지 진정한 창작이 가능하다는 의미에 무척 공감이 갔다. 방학숙제로 내야만 하는 일기, 20권을 채워야만 하는 독후감 등 글쓰기에 '의무'라는 굴레가 씌어지는 순간 재미는 순식간에 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게 읽은 책을 다시 정리해보는 이런 블로깅은 훌륭한 취미이자 창작 활동의 밑거름이 되는 것 같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자주 우울했다.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이렇게 비상식적인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방법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더 험해지고 거칠어져야만 버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거칠어지다가 우리는 중요한 걸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문득 돌아봤을 때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건 모래뿐이지 않을까. 뭔가 중요한 걸 꽉 움켜쥐고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쩌면 바스라지는 흙덩어리 같은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좀 더 창작에 몰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뭔가 만드는 사람들은, 그렇게 거칠어질 수 없다. 강해질 수는 있어도 험해지지는 않는다. --- p.284~285

뻔한 글을 쓰기 싫어하는 모든 작가의 특성대로 김중혁은 이번 책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했다. 마치 수능 문제를 풀듯이 여러가지 상황에서 이어질 이야기를 꾸며보는 구성도 신선했다. 명쾌한 정답과 재치있는 오답을 오가며 이야기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자연스럽게 설명했다. 볼펜, 샤프, 전자기기 등 자신의 시행착오가 담긴 글쓰기 도구들을 소개하는 코너도 있다. 세심하게 그림으로 구현해낸 제품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뭔가라도 쓰고 싶어진다. (그의 훌륭한 만화는 미처 따라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홍콩 여행 중에 읽으려고 마음 먹었던 책이지만 5시간 연착이라는 비극때문에, 혹은 악몽 덕분에 홍콩에 도착하기도 전에 책을 다 읽어버렸다. 다행히 여행 내내 글을 쓰고 싶단 의욕을 불태웠고, 새해를 (매번 하지만) 굳센 다짐과 함께 맞이할 수 있었다. 나도 언젠가 '글을 쓰듯 말을 하고, 말을 하듯 글을 쓰는' 수잔 손택의 경지에까지 오르길 기대하면서 묵묵히 쓰고 또 써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말그대로 '웃기는' 소설이다. 작품 내내 기존 소설 구성과 문장을 파괴해버리려고 마음 먹었는지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곱씹을 수록 씁쓸한 교훈을 주거나, 메시지를 통해 독자를 훈계하기 보다는 말그래도 천방지축으로 소설을 이어나간다. 서술자인 작가가 최면을 독자인 청자에게 최면을 유도하며 소설을 읽어나가는 독특한 발상으로 탄생한 '나쁜 소설 -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부터 그 맛을 제대로 살리고 있다. 원전 폭발로 아수라장이 된 세상에서 소설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교보문고 시멘트벽을 파헤치는 '수인'은 마치 본인의 자화상 같은 느낌이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갈팡질팡하며 살다 보니 어느덧 소설가가 된 이기호는 독특한 삶을 재조명한다. 흙을 먹다보니 어느덧 어린 소녀에게까지 흙요리를 권하는 주인공, 국기 게양대에 매달려 하나둘 새로운 얼굴을 맞이하는 주인공, 오락가락하는 할머니의 숙면을 위해 도란도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주인공. <토지>의 저자 박경리의 친척임을 사칭해(자의는 아니지만) 공짜술을 먹다 된통 혼나는 주인공. 그리고 시도때도 없이 집단 구타를 당하는 숙명을 지닌 주인공까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비참한 상황에서 진한 웃음을 유발하는 소설의 맥락이 제법 흥미로웠다. 그리 거창하고 비범한, 그리고 어마어마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당위가 주는 압박에서 벗어나 그냥 낄낄거리며, 갈팡질팡, 오락가락 편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던 소설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