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기쁨 2 - 한국 현대 시인 25인과의 아름다운 만남, 그 두번째
정효구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나 마음속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시상이 조금씩 숨어 있습니다. 다만, 정신없이 돌아가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이 소중한 감성을 잊고 지낼 뿐이죠. 그러므로 순수한 동심을 간직했던 모든 사람은 어렵지 않게 시를 즐길 수 있습니다. 머리 아프게 'A는 B다.' 식의 법칙, 밑줄 친 단어에 숨겨진 상징적 의미를 분석할 필요도 없고 한 가지 정답이 있는 시험도 아니므로 그저 느끼는 대로 시인이 전하는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 됩니다. 분명히 우리 모두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노하고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 읽는 기쁨> 같은 책을 읽으며 맑은 영혼을 깨울 필요가 있습니다. 생기 넘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무미건조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한 일이니 말이죠. 마음의 창을 열고 생각을 깊게 가져가며 하루에 한 편씩 시를 읽어간다면 반드시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삶은 변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시 읽는 기쁨 2>에서는 1편에 이어 25명의 한국 현대 시인을 소개합니다. 왕비가 되지 말고 여왕이 되라고 한국 사회 여성들에게 외치는 문정희,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박노해, 독자 놈들을 길들이려고 얼차려를 주는 기인 박남철...

 

이번에도 역시 다양한 시인들의 숨겨진 이야기와 시대적 상황, 시를 읽고 지은이 정효구 씨가 느낀 자신만의 생각을 읽어보며 공감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정치권이 혼란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며 감동을 주는 대통령을 그려본 임보 시인의 <우리들의 대통령>도 특히 인상 깊었고 죽음이라는 두려운 순간을 마지막 공부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홍윤숙 시인의 <마지막 공부 : 놀이 9>도 가슴 깊이 울림을 전해주었죠. 그중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 내 마음을 붙잡아 두었던 시는 윤승천 시인의 '아버지의 편지'였습니다.

 

'행여 니 하늘 같은 꿈에 금이라도 갈까봐'

 

한 문장의 글이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던 제 가슴을 방망이질했습니다. 자나 깨나 자식을 먼저 생각하며 항상 고생하시고 힘들어도 한 언제나 웃으시는 아버지. 무뚝뚝하고 애정표현에 서툰 전형적인 한국 40~50대 남성으로 슬픔도 기쁨도 크게 내색하지 못하시는 아버지. 그런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떠올라 시를 읽으며 깊은 그리움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의 내용은 농부 아버지가 도시로 공부하러 떠난 아들을 향해 보내는 편지글입니다. 어마어마한 재산과 권력을 지닌 막강한 아버지가 아닌 우리 곁에 흔히 볼 수 있는 헌신적이고 순하고 착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자식이 성공하기를 바라며 가뭄이 계속되고 뒷바라지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언제나 자식의 생활을 먼저 생각하시고 기대와 애정을 담아 글을 마무리하죠.

 

'아무 걱정하지 말고 다른 학생들에 비시받히지 않도록 하면서 환절기에 특히 감기 조심하고 부디 몸성히 잘 있거라.'

 

우리는 예전에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빠듯한 상황에서도 집 팔고 소 팔고 학비를 마련해 자식을 대학교에 보내고 기쁨의 눈물이자, 자기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부모님의 모습이 담긴 슬프고도 아련한 단어이죠.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상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백만 원이나 되는 등록금은 더욱 치솟고 20대의 젊은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당신들은 자기가 고생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대학이라는 하나의 관문을 통해 자녀가 더욱 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부모님은 자식이 당신보다 잘살게 되기를 희망하고 기대합니다. 헌신적이고 맹목적이며 한없이 큰 사랑. 아무리 탯줄을 잘 잡고 태어나는 게 최고의 재테크라며 부러워하는 현실이지만 진정한 행복이란 이러한 사랑에 있습니다. 이런 따뜻하고 진심이 담긴 사랑은 돈으로도 살 수 없거든요.

 

저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쑥스러워서 절대 펜을 잡고 정성스레 글을 적으실 아버지가 아니시거든요. 그 대신 현대 기술의 배려로 짧지만, 감동적인 문자를 받아본 적은 있습니다. 대학에 떨어지고 어두운 미래를 걱정하며 흔들릴 때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문자가 한 통 도착했습니다. '?' 버튼도 잘 찾지 못하셔서 의문문인지 평서문인지 모르게 딱딱한 문자 메시지를 돋보기를 쓰시고 보내시던 아버지가 붉은 하트까지 담아서 보내신 문자.

 

"괜찮다. 열심히 했잖아. 한 해만 더 고생하자 우리 아들. 사랑한다'

 

저는 행복합니다. 남 부럽지 않은 재산을 물려받지도, 부유한 가정에서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하지는 못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들이니 말이죠. 재수를 성공하고 제법 괜찮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제가 느낀 자부심이나 기쁨은 오롯이 부모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힘들었던 젊은 시절 더 배우지 못한 부모님의 꿈을 대신 이루어 드렸고 어디 가서 자식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부모님을 보면 유일하게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이 뿌듯해지곤 했죠. 이제 시작입니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무기력하지만, 그 타인이 부모님이라면 저는 조금은 더 오기가 생기고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따뜻하게 안아 드리며 사랑한다고 말해야겠습니다.

 

 


목마

                                               윤승철

 

 

  풀이 없다고 이 도시에서
  목마를 타는 것은
  슬픔을 삭히는 일일까
  광화문이나 시청 앞을
  목마를 타고 한바퀴 돈다고
  서울의 표정없는 얼굴이 변할까
  갈기없는 말을 타고 말 탄 양 하는 것은
  과연 서럽지 않는 일일까
  앞발을 치켜들고 하늘로 통할 수도 없고
  천리를 단숨에 달리며 천하를 누르지도 못하는
  목마를 타고 이 도시를 돌아보면
  얼마나 확 트인 기분이 될 수 있을까
  목마는 주인의 말도 잘 듣고
  적당히 이끌기만 하면
  서울쯤은 하루에도 몇 바퀴씩 돌 수 있지만
  말의 용트림이 주는 살아있음을 알까
  몸부림치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비정한 최후의 말울음을 들을 수 있을까
  아무리 목마를 타고
  죽는 날까지 말잔등을 때린들
  근엄한 위엄을 갖추고 금빛 휘장을 날린들
  무표정한 서울의 모습들이
  단 한 번이라도 변하기나 할까.


 

인생의 길은 어디에도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길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으나 어디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로를 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자신만의 오솔길 하나쯤 고요하게 간직하십시오. 그곳에서 진정한 자아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오솔길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대로가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그곳에서 인간들이 만드는 대세의 힘을 느낄 수 있을 터이니까요. 하지만 대로를 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세속에 길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오솔길을 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오솔길 속에 보석이 숨어 있고 오솔길도 그대에게는 대로나 마찬가지이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눈에 읽는 현대 철학 - 30개의 키워드로 현대 철학의 핵심을 읽는다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0인의 철학자, 30개의 개념.

무의식, 기표와 기의, 헤게모니, 계몽, 포스트모던, 패러다임.

'한눈에 읽는 현대철학'은 현대사상을 대표하는 30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철학적 논의들을 정리해 놓은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여동생이 한창 대학 입학을 위해 속성 논술용(!) 책을 읽어볼 때 추천받았던 책인데 제가 대학교에 들어와 교양 삼아 부담 없이 읽어보니 간략하지만, 대략적인 흐름을 잡기에는 적절해 보였죠. (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딱딱한 책이 재밌게도 읽히고,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나 몰라요.) 지은이는 겸손하게도 '철학 혹은 사상을 사전식으로 공부하거나 핵심어로 요약해서 읽는다는 것은 사실 옳은 방법도 아닐 뿐더러 어딘가 모르게 입시 공부를 다시 하는 것 같아 대단히 불쾌한 생각도 듦 직하다.'라며  이야기했지만 어려운 개념을 쉽게 설명했기에 저는 지은이의 책이 훌륭하다고 느꼈습니다. 미셀 푸코, 장 폴 사르트르, 루이 알튀세르,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등 현대 철학에서 주목받는 프랑스 철학자부터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까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친 그들의 사유를 접할 수 있는 책이니 짬짬이 교양을 쌓고 싶은 독자에게도 추천해 드립니다.

 

이성의 눈으로 어둠을 밝히자.

사실 철학에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새로운 개념이란 찾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 현상이나 개념에 대한 수많은 철학자의 해석과 재해석이 돌고 도는 식이죠. 이렇듯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은 철학사를 지배해 온 이성은 매우 커다란 존재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실체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불안, 초조, 망상이 결국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전락시켜버리죠. 그때 한 줄기 빛처럼 등장한 것이 바로 '이성'입니다. 이성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보이지 않았던 실체들이, 예를 들면 봉건 시절 절대왕정이나 종교적 지배 같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질서들의 부조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이성'은 (모든 것이 그렇듯) 절대적으로 옳은, 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도르노는 '반성적 기능을 상실한 이성',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이다.'라며 '도구적 이성'을 무기로 타락한 이성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도구적 이성이 인간을 소외시키다.

"흥분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흔히들 올바른 판단을 권유하고 이끌어낼 때 '이성적'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현대 사회에 팽배한 '이성'은 빠르기는 했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죠. 해방의 무기 역할을 했던 이성이 이제는 속박의 무기로 인간들을 다시 옥죄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지배하기 편하도록 자연을 양화 시켜 계산과 측정만이 가능한 존재로 치부했던 인간은 이제 같은 인간 스스로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잣대를 들이밀었고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파시즘'입니다. 스스로 질적인 측면보다 양적인 측면에 집중하여 인간을 하나의 대체 가능한 부속품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죠. 글쓴이의 표현대로 '사유에 대한 사실의 우위를 강조하는 실증주의에 오염되어 반성의 기능을 상실한 도구적 이성은 초창기 계몽의 이념이었던 자유, 평등, 정의 등의 도덕을 낡은 이념으로 간주하고, 지배를 위해 파괴와 공격을 정당화하는 무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왜 히틀러에 열광했는가?

파시즘과 독재를 구분 짓는 기준은 대중의 지지에 있습니다. 압도적인 지지와 광기 어린 열광 속에 히틀러는 독일의 신으로 등장했고 너무나도 '이성적'이었던 천재 철학자 하이데거도 나치즘을 논리적으로 찬양했죠. 그들 모두는 충분히 이성적이었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자신과 동일성을 지니지 못한 타자를 제거해나갔습니다. 아도르노가 전체주의를 경멸하고 개인의 특수성을 지키고자 노력한 것은 아마 그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을 수도 있을 유태인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치즘에 물든 파시스트가 동일성에 대한 '이성'적이며 '비이성'적인 욕망을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유태인은 '교환 불가능' 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유태인이라는 주홍 글씨를 새긴 채 '특수성'을 가진 개체는 말살되고 '일반성'으로 묶인 전체만이 남았을 뿐이죠. 그래서 상상을 초월하는 수의 인간을, 같은 인간이 기계적이고 매우 합리적으로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판적 이성의 눈으로 문제의 핵심을 바라보자!

무지에서 오는 공포를 해결하는 힘은 이성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무지에서 오는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도 이성입니다. 아도르노는 결국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문제 자체에서 찾았습니다. '이성은 대상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비출 수 있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라는 비판적 이성 개념을 이용해서 말이죠. 그는 헤겔 철학에서 뒤편에 밀려났던 '비 개념적인 것'을 재해석하며 개인을 '교환 가능한 것'으로 보는 사유를 뒤집습니다. '단독적인 것'의 특징을 존중하고 '우리는 하나'라는 신화와 같은 주장을 의심해보고 비판적 이성의 눈으로 날카롭게 성찰해야 합니다. 히틀러는 죽었지만, 파시즘은 언제든 더욱 강력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무작정 유학생에게 집단 폭행을 퍼붓는 네오나치, 외국인 선수에게 모욕적인 조롱을 날리며 인격적, 신체적 피해를 주는 훌리건. 극단적이고 눈에 보이는 전체주의만이 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뿌리 뽑기 어렵고 무서운 것은 바로 우리 주변에 알게 모르게 퍼져 있는 파시즘의 불씨들이죠.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르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상대를 평가해버리고 편견으로 대한다는 것. '한' 민족, '한' 가족, '한' 핏줄, '한' 나라. 아무런 의심 없이 주입되어왔던 관념들에 이끌려 우리도 모르게 타인을 대체 '가능한' 부속품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이성적인 행동일까요?

예전에는 철학의 문제는 철학자의 문제였으며, 철학은 철학자의 분야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문학, 미술, 음악, 영화, 만화, 매체 등등 현대 문화의 모든 장르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철학적이라고 말해도 좋은 지적 배경을 등에 업고 전개되고 있다. 지금 시대의 지적 흐름은 이제 철학자 사회의 문턱을 넘어 일상생활의 공간 속으로 흘러 넘치고 있는 것이다.

( ……)

여기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토론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서로의 책을 그다지 열심히 읽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동시대성을 보여 주고 있다. 비록 그들 각각은 동시대성을 부인할지 몰라도, 그리그 그들 각각은 자신의 철학적 내용이 고유한 것이라고 항변할지 몰라도, 그들을 읽는 우리로서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동시대성으로 읽는 일일 것이다. 적어도 이 점에 관한 한 다양성보다 공통점을, 차이보다 동일성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요일 4시간 - 내 인생의 숨은 기적을 찾는 즐거운 프로젝트
신인철 지음 / 리더스북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무한도전>으로 시작해 <1박2일>로 끝나는 허무한 주말? 무한도전을 놓치고 싶지 않은 무도빠로서 매우 눈에 확 띄는 부제를 가진 책이었습니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무한도전을 까는 거냐는 심보로 토요일 내 시간 네 시간을 투자해 오고 가는 지하철에서 읽어보았죠. 생각만큼 뻔한 내용이었지만 생각보다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토요일 4시간을 음악, 그림, 스포츠, 요리, 인문학, 여행, 자연 과학 같은 다양한 양질의 취미 생활에 투자하여 조금 더 높은 삶의 질을 확보하자는 내용입니다. 

 

뉴욕 카네기홀에서 3,000여 청중을 앞에 두고 연주를 하기도 하고, 수많은 기자 틈에서도 왼손으로 자신의 바이올린을 꽉 쥔 음악가는?

 

No.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입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덴마크 요트 국가대표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조그만 섬 출신 부동산 회사 직원 메리 도널드슨과 결혼한 운동선수는?

 

No. 왕세자 안드레 헨리크 크리스티안의 이야기입니다.

 

1957년 북미 지역에서 성황리에 순회전시를 하였고 홀마크란 이름으로 크리스마스카드를 히트시킨 화가는?

 

No.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이야기입니다.

 

모두 자기 분야에서 정상을 달리면서도 취미 생활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고 이를 발전시켜 명예로운 자리에까지 올라간 이들입니다. 우리가 이들처럼 엄청난 재능이나 부, 여유를 가진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죠. 하지만 말 그대로 우리가 투자할 '내 시간 4시간'은 '취미'를 위한 시간이지 '직업'을 위한 시간이 아닙니다. 반드시 국가대표가 되어 메달을 딸 필요도, 엄청난 관중 앞에서 찬사를 받으며 연주를 할 의무도 없으며 누구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1등이란 성과가 아닌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한 재충전이기 때문이죠.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 꿈꾸던 일을 열심히 노력해서 조금씩 이루어나가는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한 법이죠. 자기계발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 미래의 더 나은 자신을 위한 투자입니다. 

 

외국에서 온 친구들이 부러운 점이 있다면 악기 하나 쯤은 다룰 수 있고, 어릴 때부터 운동 하나쯤은 꾸준히 해온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스포츠는 조금 다른 환경이죠. 기본적인 소양 교육도 잊은 채 운동에 올인해버리는 엘리트 체육이 근간인 우리나라 현실이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물론 요즘에는 공부하는 운동부, 주말 동아리 축구 리그 등 기분 좋은 변화가 나타나기에 기쁩니다.) 같은 양의 공부를 해도 취미 생활로 휴식하고 하는 이와 무작정 책상 위에 앉아 묵묵히 있는 이는 분명히 능률 면에서 차이가 있는 법이죠. 모두가 빠르게 살아가고 효율성을 철저하게 따지는 스펙 경쟁 시대에 '그깟 공놀이, 그깟 악기'에 투자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진정한 효율성은 쉴 때 쉬어주며 조금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순간 높아지는 법이니 말이죠. 게다가 언제 어디서 나와 취미를 공유하는 반가운 이를 만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미래를 위한 보험이란 개념도 얼추 맞아 보입니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직장 상사와 복식 경기를 함께하며 직장 생활에 필요한 실질적인 조언을 자연스레 들을 수 있다면? 외국 거래처 임원과의 중요한 계약 전에 딱딱한 분위기를 월드컵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인간이란 원래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법이죠.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아니죠. 길동무가 좋으면 길도 가까운 법입니다!

 

일과 취미 사이 균형을 위해 제안한 컨버터 개념 부분에서는 그다지 큰 공감을 얻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으로 다양한 취미의 길을 알려주어 유익했습니다. 항상 축구, 테니스에 주말을 쏟아부으며 어느 정도 부지런하고 꾸준히 '토요일 내 시간 4시간'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는 더욱 욕심이 생겼습니다. '의욕과 태도는 훌륭하나 박자 감이 부족함'이란 수행 평가 점수를 받은 제가 기타를 손에 잡아볼 생각을 처음으로 했고, 뭐든지 맛있게 먹고 설거지하는 데 소질이 있는 제가 직접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워볼까 마음먹었으니 말이죠. 아직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조금 더 나은 내 삶을, 무료하고 무기력한 노년을 보내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지 간에 새로운 만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 책 덕분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정신없고 빠르게 지나간다고 하지만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아직 훨씬 더 많은 나이니깐요.

뭔가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우리가 비록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적인 두뇌를 갖지는 못했지만, 알베르 왕자나 앤 공주처럼 왕가의 혈통을 타고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리고 하퍼 총리처럼 성격이 다른 서너 가지의 일을 한꺼번에 완벽하게 처리해내는 엄청난 능력이 없는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고 싶다는 욕심과 열정이 있다면, 그러기 위해 어느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의욕이 있다면, 그리고 그런 노력을 이 책을 덮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하겠다는 굳은 의지만 잇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물을 보고 시인과 철학자는 정반대의 언어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정리합니다. 시가 빨간색으로 대표되는 따뜻한 차라면, 철학은 파란색이 떠오르는 차가운 얼음이랄까요? 시인이라면 함축적, 감각적, 독창적, 주관적인 단어를 통해 사물을 자신만의 색깔로 다시 그려내며 독자의 심금을 울리겠죠. 시적인 언어는 서정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주관적인 리듬을 지니고 있으며 시는 '정서'를 상징합니다. 반대로 철학자라면 논리적, 이성적, 분석적, 객관적인 단어를 가지고 사물이 지니고 있는 법칙을 날카롭게 재정립하여 독자에게 선물합니다. 철학적인 언어는 타당성을 추구하며 개념을 창조하여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뽑아내는 역할을 하며 철학은 '사유'를 의미하죠.

 

이렇게 양 극단에 자리 잡고 있다고 여겨지는 철학과 시는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곁에서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언을 말투가 다를 뿐이지 항상 해주는 친구 같은 존재랄까요? 둘 다 사람을 향하고 있는 인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익숙한 모든 것을 낯설게 바라보며 신선한 충격을 우리에게 선물한다는 공통점이 있죠. 글쓴이의 말대로 '시는 가장 주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보편적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철학은 가장 보편적인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주관적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정서적인 사유가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며 이성과 감성, 객관과 주관의 조화로운 힘이 가장 필요하죠.

 

이제 시라는 날실과 철학이라는 씨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포근한 스웨터 같은 이 책을 읽어볼 시간입니다. '네그리와 박노해',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 '푸코와 김수영', '니체와 황동규', '벤야민과 유햐' 등 시인 21명과 철학자 21명의 반가운 만남이 담겨 있는 이 책은 한 편씩 읽기도 좋고 참고 문헌과 시 출처를 보기 좋게 모아두어 더 많은 생각거리를 얻고 싶은 이들에게 매우 좋은 지침서가 될 것입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찻잔에 얼음이 적당히 녹아내린, 은은한 향이 풍기는 차 한 잔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죠?

 

 

○ '사유의 의무 - 아렌트와 김남주'

 

어떤 관료

-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는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김남주 시인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도 오래도 살아남은 '개' 같은 관료를 조롱합니다. 식인종이 쳐들어와도 관리생활을 할 거라고 말하는 정도이니 관료에 대한 시인에 생각은 단호하고 비판적이죠. 그리고 역사적으로 우리 주변에는 그런 관료가 수두룩합니다. 일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다가올 줄 알았지만 약자를 괴롭히던 자의 이름이 '나카무라 OOO'에서 '김XX'로 바뀌었을 뿐이죠. '근면, 정직, 성실, 공정'이라는 매우 긍정적이고 훌륭한 덕목을 지녔지만, 관료는 시인에게,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비판을 받는 존재입니다. '거짓, 나태, 게으름, 불공정'이라는 누가 봐도 부정적인 덕목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궁금증에 대한 자세한 실마리는 여성 철학자 아렌트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따뜻한 '감성'과 차가운 '이성'이 결여된 채 '무사유'로 일관했던 관료의 행동 때문이죠.

 

유대인 아렌트가 나치즘을 연구하고 철학적으로 그 문제점과 기원을 밝혀내려고 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이성'이 가진 동일성에서 시작된 거라고 주목하였듯이 아렌트는 '무사유'에서 그 원인을 찾았죠. 1963년 <전체주의의 기원>을 펴냈던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전체주의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밝혔습니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아렌트의 책 속에서 유대인 학살 책임자 아이히만은 영화나 책에서 악랄하게 그려지는 철저한 악의 결정체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이히만은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라고 묘사되며 평범한 독일인일 뿐이었죠. 그렇다고 그가 수백만 명을 아무 이유 없이 학살한 파렴치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렌트는 그에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의 책임을 물어 그의 악함을 꼬집습니다. '근면, 정직, 성실, 공정' 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아이히만은  그의 선택 때문에 다른 사람이 겪을 불행에 공감하지 못했고, 자신이 서명한 한 장의 서류가 불러온 비극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았죠. "말과 타자의 현존을 가로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는" 아이히만은 타인과 소통하지 못했고 공감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책임이 있다는 논리입니다. 기계적으로 내려온 명령에 복종하고, 앵무새처럼 지시상황을 주절거리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지시자가 누구냐에 따라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반대의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지시를 내린 이가 히틀러였다는 게 문제죠. 문득 글을 읽고 나니 '정치인이 가장 다루기 쉬운 대중은 열광적인 찬성도, 격렬한 반대의 뜻도 아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다.'란 말이 떠오르네요.

 

○ '사유'는 권리인가 의무인가?

 

"그냥..... 평범하게 생겼어요."

 

영화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범이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하는 어린 꼬마의 한마디로 마무리됩니다. 우악스럽거나 악랄하고 무섭게 생긴 게 아니라 그저 길을 걷다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얼굴. 이렇게 악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평범한' 모습을 하고 숨어 있으며 어느샌가 진짜 모습을 드러낼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무서운 법입니다. 우리가 그저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모든 사건을 바라본다면 '착하고 평범하며 모범적인' 우리도 전대미문의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죠.

 

현대 사회는 철저히 분업화, 전문화가 진행되어 개인적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닭장같이 빽빽한 아파트에서 자신만의 삶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죠. 요즘은 철저히 계산적으로 내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판단을 하며 관련 없다고 여겨지는 일에는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쿨함'이 대세입니다. 이러한 사유는 '아이히만'의 것과 다를 바 없는 매우 위험하고 무책임한 생각이죠. 주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태에 한발 물러나 내 책임이 아니라고 고개 돌릴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리를 높이며 관심을 둬야 합니다. 만약 내가 약자의 처지에서 고통받을 때 모두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쿨함'이 아니라 '비겁함'이라 울부짖겠죠?

 

우리는 조금 더 따뜻해질 필요가 있고 조금 더 똑똑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항상 반성하며 비판적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며 이 일로 인해 누군가가 겪게 될 고통, 불행에 공감해야 합니다. 내 작은 행동 하나, 아니 근면하고 성실한 행동이 어마어마한 파장으로 타인을 고통의 나락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죠. 이왕이면 나의 기쁨은 타인과 함께 배가 되고, 나의 슬픔은 타인과 함께 반이 된다면 모두가 행복하지 않을까요? 항상 따뜻한 마음, 차가운 머리를 기억하며 능동적으로 살아갑시다. 우리는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책을 읽으며 공감 갔던 부분을 새기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의 책임을 부과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코나투스의 윤리학을 기쁨의 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기쁨을 위해서 내가 마주친 타자를 슬픔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한 그 타자가 슬픔에 빠진다면, 나의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아 슬픔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타자의 기쁨을 위해서 나 자신의 슬픔을 그냥 인내해서도 안 됩니다. 나 자신의 슬픔으로 인해 결국 타자의 일시적인 기쁨마저도 언젠가는 반드시 슬픔으로 변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기쁨의 윤리학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쁨을 지향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자유라는 개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나의 기쁨을 가로막는 타자와 힘써 싸우고, 또한 동시에 타자의 기쁨을 가로막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의 진정한 의미일 테니까요. 그래서 마침내 기쁨의 윤리학은 이제 자유의 정치학으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량 가족 레시피 - 제1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
손현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고급(?) 불량 가족! 콩가루 집안 여울이네.

 

도덕 꼴통이 내준 자서전을 써오라는 수행평가에 여울이는 코웃음을 칩니다. 하지만, 코스튬플레이를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이때 장학금을 위해 잠시나마 가정사를 써볼까 생각하지만. 어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을 포기하고 여울이는 오늘도 "완벽한 출가를 위한 지침서"를 적어봅니다. 용이 사는 집에서 피오나 공주로 살아가는 여울이의 가족은 조금 다릅니다. '부모, 자식과 같이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이 '가족'의 사전적 정의라면 여울이에게는 벗어나야 할 걸림돌이 바로 가족이고 식구랍니다. "밥 먹기 위해 유대 관계를 맺고 집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뭉쳐 사는 것 같은" 가족. 여울이의 곁엔 누가 있을까요?

 

여울이는 항상 '사랑으로 이어나가는 가족의 화목함'보다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살아가는 가족의 불평'이 익숙합니다.

양로원에 들어가 남이 차려 준 밥상을 받는 게 꿈인 잔소리쟁이 슈퍼 할매, 채권추심 하청 일로 집안을 꾸려나가며 손찌검과 고함이 특기인 불곰 아빠, 저주받은 입으로 고자질과 욕설을 일삼는 고3 언니,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기저귀를 차고 다녀야 하는 신세인 전문대생 오빠, 평생 주식만 바라보다 뇌경색에 걸려 한순간에 무너져내린 삼촌. 그리고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언제나 여울이의 상상 속에서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나이트클럽 댄서 엄마. 제대로 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최고급(?) 불량 재료로 만들어진 가족이 부끄러운 여울이. 하지만, 이렇게 가족을 깎아내리고 '쪽팔려하는' 여울이도 사실 학교에서 식권을 복사하다 걸리고, 하지만 '30장밖에 복사를 하지 않았다.'라며 억울해하는 흔히 말하는 문제아입니다.

 

여울이가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은 (경제적인 사정상 재탕하는 캐릭터지만) 피오나 공주가 되어 코스튬플레이를 할 때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눈꼴 사나운 일투성이네요. 코스튬플레이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친하지만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공간에서 숨쉬고 있습니다. 외고에 다니는 범생이면서 화려한 바니 걸로도 변신할 수 있는 류은이,  여울이가 좋아하는 공부도 잘하고 주먹도 센 세바스찬. 용기를 내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햄버거를 앞에 두고 여울이가 고백하는 순간! 마법이 풀리는 듯 어색하게 세바스찬은 사실 류은이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네요. 게다가 마리아 천사 복장을 한 오이장아찌처럼 늙은 아줌마는 부끄럽게 싸온 김밥을 같이 먹자고 달라붙네요.

집안은 흔들리고, 사랑은 깨지고, 학교에선 찍히고....... 그래서인지 여울이는 "슐 좀 마시고" 토하며 잠들어버립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이 피어오르나......?

 

여울이가 간절히 바라던 출가 계획은 의도치 않게 이루어집니다. 물론 삼류 인생 집합소를 먼저 박차고 나가는 가족들의 가출 때문에 혼자가 되어버리지만 말입니다. 두꺼비 같은 아빠의 손찌검을 받아 내며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서서 행동하는 언니가 아빠와 싸우고 집을 나가버리죠. '썩어 뒤질 문딩이 놈' 삼촌도 고함을 치며 떠나고 계단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피우며 오빠도 소리를 지르고 가출해버립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리하게 채권추심 정보를 다른 거래처에 유출한 죄목으로 아빠마저 구속됩니다. 마지막 가족, 늘 집을 떠나 양로원에 가고 싶어 떼를 쓰던 할머니는 이제 이모할매네로 떠나가기로 합니다.

 

그렇게도 얼른 어른이 되어 독립하고 싶어 안달하던 여울이는 한순간에 혼자가 됩니다. 압류 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집에서지만 여울이는 늘 꿈꾸던 독립을 이루게 된 거죠. 하지만, 생각보다 행복하거나 유쾌하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며 여울이는 가족의 소중함(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하지만), 아니 적어도 가족을 조금은 이해하게 됩니다. "알고 보면 다들 자기 앞에 놓인 일들이 감당이 안 되어 본의 아니게 서로를 괴롭혔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생각하며 말이죠.

 

모두가 흩어지고 나서야 최고급 불량 가족들은 서툰 사랑을 자기 방식대로 표현합니다. 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이 맞나 봅니다. 삼촌은 미국에 사는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주유소에서 일하고 월급으로 홍삼 엑기스 1팩을 무뚝뚝하게 선물합니다. 불곰 아빠는 손수 순댓국을 뜨겁게 데워 할매 에게 살갑게 내놓기도 하죠. 그리고 여울이는 미운 할매를 위해 죽을 조심스레 끓이는 전혀 '권여울답지' 않은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역시 할매는 물을 쬐매 더 부야 된다며 잔소리를 하지만 짜증이 나기보다는 잔소리가 잠잠했을 때 느꼈던 불안감이 가시고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인생은 불공평한 개뼈다귀 같은 곳!

 

마리아 아줌마는 따끈한 보리차 한 잔을 건네며 여울이에게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어보라고 추천합니다. 하지만, 여울이는 '구라를 너무 잘 치는' 톨스토이에 멀미하거 '그놈의 사랑이 결핍되면 문제아가 된다는 것처럼 들린다.'리며 한숨을 쉴 뿐이죠. 그리고 17년간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며 깨달은 교훈을 토대로 답을 내리고 책을 덮어버립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욕심이며,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서 얻은 답이다. 모두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지,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한 명도 없다. 미하일이나 세몬은 책 속에나 등장할 법한 인물들이다. 이런 인간이 진짜 있다면 매점 식권을 복사하는 일이나 아빠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허접한 일 따위는 결코 안 할 것이다."

 

출가에 성공하면 행복의 파랑새를 찾을 거라 꿈꾸던 여울이는 이제 조금 생각이 달라졌을까요?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슈렉 세바스찬의 애틋한 키스를 받고, 딸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마리아 아줌마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여울이는 한 걸음씩 자라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갑니다. 비록 소중한 이들이 곁에 없을 때 비로소 소중함을 알게 되지만 진짜 용기를 내 출가한 사람처럼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고 마음먹습니다. 지금까지 여울이에게 '내일'이란 두려움과 초조함이 가득 찬 절망의 늪이었다면 최악의 상황에 부닥친 지금. 여울이에게 '내일'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우리 가족의 주인공이 되고 말 하나의 희망의 숲이 되었습니다.

 

 "나도 네 나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지. 근데 어른 되니까 책임감만 있고 별 재미가 없어. 여울아, 흥미가 가는 건 뭐든지 해 봐. 그러고 나서 천천히 어른이 돼도 늦지 않으니까."

 

본의 아니게 가정의 가장으로 거듭나고 어른이 되어버린 여울이.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장애물이 결코 어린 여울이에게 만만치 않기에 걱정이 됩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갖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투성이인 열입곱 나이에 가난과 씨름해야 할 고통이 호락호락 해 보이지는 않기에 말이죠. 사실 책이 여울이의 당찬 결심으로 끝나버려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선입견인지 몰라도) 제가 생각하는 '청소년문학'의 일반적인 마무리라면 희망의 빛이 드리우며 밝게 끝나야 하는데 지금 닥친 상황이 절대 희망적이지 않기 때문이죠.

 

손현주 작가는 더없이 위태로운 불량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을 깨달은 것 자체가 가장 큰 여울이의 변화이자 성장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긴, '일확천금 로또에 맞아 가족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 식의 허무맹랑한 결론은 소설은 결국 허구란 생각만 가득하게 할 뿐이죠. <불량가족 레시피>처럼 (무섭도록 현실적이지만) 정말 소중한 가치를 깨달은 여울이의 마지막이 독자들에게 더 큰 힘과 따뜻한 격려로 다가올 거라 믿고 응원합니다. 여울이는 거침없이 흔들리고 슬퍼하고 괴로워하지만, 성장통을 겪고 있을 뿐인거죠. 사실 애정과 관심이 없다면 화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무시하고 남일 이라고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말죠. 결국, 최고급 불량 가족들 모두 마음속 한 구석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표현의 방법이 서툴고 날이 서 서로에게 정확히 전달되지 못했을 뿐이죠.

 

시련은 사람을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대부분 사람이 그렇듯 포기하고 슬퍼하고 남을 탓하거나. 혹은 시련을 이겨내 많은 이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당당하게 웃거나. 가장 안전한 제태크의 '태'는 부모님 탯줄을 잘 잡는 것을 뜻하는 안타까운 현실. 냉정히 말해 날 때부터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경쟁 구도에서 100m 앞에서 출발하는 경쟁자를 뛰어넘기는커녕 따라잡기는 버거운 게 사실입니다. 당연히 이러한 환경에서 불공평한 차별을 이겨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반대로 불공평한 현실을 극복하고 바꾸어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그 수가 적을 뿐이죠.) 사람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랑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희소하기 때문이죠. 부디 여울이가, 그리고 여울이처럼 조금은 다른 길을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소년이 다가올 시련을 이겨내 진정 밝게 빛나는 보석 같은 사람으로 자라났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네 나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지. 근데 어른 되니까 책임감만 있고 별 재미가 없어. 여울아, 흥미가 가는 건 뭐든지 해 봐. 그러고 나서 천천히 어른이 돼도 늦지 않으니까."

"쉬지 않고 쫑알대는 참새를 바라보며 이 세상에는 딱 두 가지 부류가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관리 받는 년과 방해 받는 년. 참새나 류은이 같은 아이들을 보면 가끔 화날 때가 있다. 아무리 똑같이 놀았다 해도 본질적으로 그 아이들과 나는 삶의 질부터가 다르다. 그 아이들은 마음 놓고 놀아도 최소한 안전망이라도 있지만, 나 같은 아이는 그물망조차 없어 바닥을 지나 지하 3층까지 떨어질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는 개뼈다귀 같은 소리는 누가 지껄였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 인간이 내 눈앞에 있다면 머리를 죄다 쥐어뜯어 놓고 싶다. 절대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이건 내가 십칠 년간 세상을 겪으면서 깨달은 진리다. "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은 욕심이며,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서 얻은 답이다. 모두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지,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한 명도 없다. 미하일이나 세몬은 책 속에나 등장할 법한 인물들이다. 이런 인간이 진짜 있다면 매점 식권을 복사하는 일이나 아빠의 호주머니를 뒤지는 허접한 일 따위는 결코 안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