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물을 보고 시인과 철학자는 정반대의 언어를 이용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정리합니다. 시가 빨간색으로 대표되는 따뜻한 차라면, 철학은 파란색이 떠오르는 차가운 얼음이랄까요? 시인이라면 함축적, 감각적, 독창적, 주관적인 단어를 통해 사물을 자신만의 색깔로 다시 그려내며 독자의 심금을 울리겠죠. 시적인 언어는 서정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주관적인 리듬을 지니고 있으며 시는 '정서'를 상징합니다. 반대로 철학자라면 논리적, 이성적, 분석적, 객관적인 단어를 가지고 사물이 지니고 있는 법칙을 날카롭게 재정립하여 독자에게 선물합니다. 철학적인 언어는 타당성을 추구하며 개념을 창조하여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뽑아내는 역할을 하며 철학은 '사유'를 의미하죠.

 

이렇게 양 극단에 자리 잡고 있다고 여겨지는 철학과 시는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곁에서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언을 말투가 다를 뿐이지 항상 해주는 친구 같은 존재랄까요? 둘 다 사람을 향하고 있는 인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익숙한 모든 것을 낯설게 바라보며 신선한 충격을 우리에게 선물한다는 공통점이 있죠. 글쓴이의 말대로 '시는 가장 주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보편적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철학은 가장 보편적인 것 같지만 실은 가장 주관적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정서적인 사유가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며 이성과 감성, 객관과 주관의 조화로운 힘이 가장 필요하죠.

 

이제 시라는 날실과 철학이라는 씨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포근한 스웨터 같은 이 책을 읽어볼 시간입니다. '네그리와 박노해',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 '푸코와 김수영', '니체와 황동규', '벤야민과 유햐' 등 시인 21명과 철학자 21명의 반가운 만남이 담겨 있는 이 책은 한 편씩 읽기도 좋고 참고 문헌과 시 출처를 보기 좋게 모아두어 더 많은 생각거리를 얻고 싶은 이들에게 매우 좋은 지침서가 될 것입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찻잔에 얼음이 적당히 녹아내린, 은은한 향이 풍기는 차 한 잔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죠?

 

 

○ '사유의 의무 - 아렌트와 김남주'

 

어떤 관료

- 김남주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는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김남주 시인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도 오래도 살아남은 '개' 같은 관료를 조롱합니다. 식인종이 쳐들어와도 관리생활을 할 거라고 말하는 정도이니 관료에 대한 시인에 생각은 단호하고 비판적이죠. 그리고 역사적으로 우리 주변에는 그런 관료가 수두룩합니다. 일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다가올 줄 알았지만 약자를 괴롭히던 자의 이름이 '나카무라 OOO'에서 '김XX'로 바뀌었을 뿐이죠. '근면, 정직, 성실, 공정'이라는 매우 긍정적이고 훌륭한 덕목을 지녔지만, 관료는 시인에게,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비판을 받는 존재입니다. '거짓, 나태, 게으름, 불공정'이라는 누가 봐도 부정적인 덕목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궁금증에 대한 자세한 실마리는 여성 철학자 아렌트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따뜻한 '감성'과 차가운 '이성'이 결여된 채 '무사유'로 일관했던 관료의 행동 때문이죠.

 

유대인 아렌트가 나치즘을 연구하고 철학적으로 그 문제점과 기원을 밝혀내려고 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이성'이 가진 동일성에서 시작된 거라고 주목하였듯이 아렌트는 '무사유'에서 그 원인을 찾았죠. 1963년 <전체주의의 기원>을 펴냈던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전체주의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밝혔습니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아렌트의 책 속에서 유대인 학살 책임자 아이히만은 영화나 책에서 악랄하게 그려지는 철저한 악의 결정체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이히만은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라고 묘사되며 평범한 독일인일 뿐이었죠. 그렇다고 그가 수백만 명을 아무 이유 없이 학살한 파렴치한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렌트는 그에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의 책임을 물어 그의 악함을 꼬집습니다. '근면, 정직, 성실, 공정' 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아이히만은  그의 선택 때문에 다른 사람이 겪을 불행에 공감하지 못했고, 자신이 서명한 한 장의 서류가 불러온 비극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았죠. "말과 타자의 현존을 가로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싸여 있는" 아이히만은 타인과 소통하지 못했고 공감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책임이 있다는 논리입니다. 기계적으로 내려온 명령에 복종하고, 앵무새처럼 지시상황을 주절거리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지시자가 누구냐에 따라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반대의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지시를 내린 이가 히틀러였다는 게 문제죠. 문득 글을 읽고 나니 '정치인이 가장 다루기 쉬운 대중은 열광적인 찬성도, 격렬한 반대의 뜻도 아닌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다.'란 말이 떠오르네요.

 

○ '사유'는 권리인가 의무인가?

 

"그냥..... 평범하게 생겼어요."

 

영화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범이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하는 어린 꼬마의 한마디로 마무리됩니다. 우악스럽거나 악랄하고 무섭게 생긴 게 아니라 그저 길을 걷다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얼굴. 이렇게 악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평범한' 모습을 하고 숨어 있으며 어느샌가 진짜 모습을 드러낼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무서운 법입니다. 우리가 그저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모든 사건을 바라본다면 '착하고 평범하며 모범적인' 우리도 전대미문의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죠.

 

현대 사회는 철저히 분업화, 전문화가 진행되어 개인적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 채 닭장같이 빽빽한 아파트에서 자신만의 삶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죠. 요즘은 철저히 계산적으로 내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판단을 하며 관련 없다고 여겨지는 일에는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쿨함'이 대세입니다. 이러한 사유는 '아이히만'의 것과 다를 바 없는 매우 위험하고 무책임한 생각이죠. 주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태에 한발 물러나 내 책임이 아니라고 고개 돌릴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리를 높이며 관심을 둬야 합니다. 만약 내가 약자의 처지에서 고통받을 때 모두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쿨함'이 아니라 '비겁함'이라 울부짖겠죠?

 

우리는 조금 더 따뜻해질 필요가 있고 조금 더 똑똑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항상 반성하며 비판적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며 이 일로 인해 누군가가 겪게 될 고통, 불행에 공감해야 합니다. 내 작은 행동 하나, 아니 근면하고 성실한 행동이 어마어마한 파장으로 타인을 고통의 나락에 빠트릴 수 있기 때문이죠. 이왕이면 나의 기쁨은 타인과 함께 배가 되고, 나의 슬픔은 타인과 함께 반이 된다면 모두가 행복하지 않을까요? 항상 따뜻한 마음, 차가운 머리를 기억하며 능동적으로 살아갑시다. 우리는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책을 읽으며 공감 갔던 부분을 새기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의 책임을 부과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코나투스의 윤리학을 기쁨의 윤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기쁨을 위해서 내가 마주친 타자를 슬픔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한 그 타자가 슬픔에 빠진다면, 나의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아 슬픔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타자의 기쁨을 위해서 나 자신의 슬픔을 그냥 인내해서도 안 됩니다. 나 자신의 슬픔으로 인해 결국 타자의 일시적인 기쁨마저도 언젠가는 반드시 슬픔으로 변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기쁨의 윤리학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쁨을 지향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자유라는 개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나의 기쁨을 가로막는 타자와 힘써 싸우고, 또한 동시에 타자의 기쁨을 가로막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의 진정한 의미일 테니까요. 그래서 마침내 기쁨의 윤리학은 이제 자유의 정치학으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