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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기쁨 2 - 한국 현대 시인 25인과의 아름다운 만남, 그 두번째
정효구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1월
평점 :
누구나 마음속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시상이 조금씩 숨어 있습니다. 다만, 정신없이 돌아가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이 소중한 감성을 잊고 지낼 뿐이죠. 그러므로 순수한 동심을 간직했던 모든 사람은 어렵지 않게 시를 즐길 수 있습니다. 머리 아프게 'A는 B다.' 식의 법칙, 밑줄 친 단어에 숨겨진 상징적 의미를 분석할 필요도 없고 한 가지 정답이 있는 시험도 아니므로 그저 느끼는 대로 시인이 전하는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면 됩니다. 분명히 우리 모두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노하고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 읽는 기쁨> 같은 책을 읽으며 맑은 영혼을 깨울 필요가 있습니다. 생기 넘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무미건조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한 일이니 말이죠. 마음의 창을 열고 생각을 깊게 가져가며 하루에 한 편씩 시를 읽어간다면 반드시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삶은 변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시 읽는 기쁨 2>에서는 1편에 이어 25명의 한국 현대 시인을 소개합니다. 왕비가 되지 말고 여왕이 되라고 한국 사회 여성들에게 외치는 문정희,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박노해, 독자 놈들을 길들이려고 얼차려를 주는 기인 박남철...
이번에도 역시 다양한 시인들의 숨겨진 이야기와 시대적 상황, 시를 읽고 지은이 정효구 씨가 느낀 자신만의 생각을 읽어보며 공감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정치권이 혼란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며 감동을 주는 대통령을 그려본 임보 시인의 <우리들의 대통령>도 특히 인상 깊었고 죽음이라는 두려운 순간을 마지막 공부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홍윤숙 시인의 <마지막 공부 : 놀이 9>도 가슴 깊이 울림을 전해주었죠. 그중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 내 마음을 붙잡아 두었던 시는 윤승천 시인의 '아버지의 편지'였습니다.
'행여 니 하늘 같은 꿈에 금이라도 갈까봐'
한 문장의 글이 아무 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던 제 가슴을 방망이질했습니다. 자나 깨나 자식을 먼저 생각하며 항상 고생하시고 힘들어도 한 언제나 웃으시는 아버지. 무뚝뚝하고 애정표현에 서툰 전형적인 한국 40~50대 남성으로 슬픔도 기쁨도 크게 내색하지 못하시는 아버지. 그런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떠올라 시를 읽으며 깊은 그리움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의 내용은 농부 아버지가 도시로 공부하러 떠난 아들을 향해 보내는 편지글입니다. 어마어마한 재산과 권력을 지닌 막강한 아버지가 아닌 우리 곁에 흔히 볼 수 있는 헌신적이고 순하고 착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자식이 성공하기를 바라며 가뭄이 계속되고 뒷바라지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언제나 자식의 생활을 먼저 생각하시고 기대와 애정을 담아 글을 마무리하죠.
'아무 걱정하지 말고 다른 학생들에 비시받히지 않도록 하면서 환절기에 특히 감기 조심하고 부디 몸성히 잘 있거라.'
우리는 예전에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빠듯한 상황에서도 집 팔고 소 팔고 학비를 마련해 자식을 대학교에 보내고 기쁨의 눈물이자, 자기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부모님의 모습이 담긴 슬프고도 아련한 단어이죠.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상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백만 원이나 되는 등록금은 더욱 치솟고 20대의 젊은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당신들은 자기가 고생하더라도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대학이라는 하나의 관문을 통해 자녀가 더욱 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부모님은 자식이 당신보다 잘살게 되기를 희망하고 기대합니다. 헌신적이고 맹목적이며 한없이 큰 사랑. 아무리 탯줄을 잘 잡고 태어나는 게 최고의 재테크라며 부러워하는 현실이지만 진정한 행복이란 이러한 사랑에 있습니다. 이런 따뜻하고 진심이 담긴 사랑은 돈으로도 살 수 없거든요.
저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쑥스러워서 절대 펜을 잡고 정성스레 글을 적으실 아버지가 아니시거든요. 그 대신 현대 기술의 배려로 짧지만, 감동적인 문자를 받아본 적은 있습니다. 대학에 떨어지고 어두운 미래를 걱정하며 흔들릴 때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문자가 한 통 도착했습니다. '?' 버튼도 잘 찾지 못하셔서 의문문인지 평서문인지 모르게 딱딱한 문자 메시지를 돋보기를 쓰시고 보내시던 아버지가 붉은 하트까지 담아서 보내신 문자.
"괜찮다. 열심히 했잖아. 한 해만 더 고생하자 우리 아들. 사랑한다♡'
저는 행복합니다. 남 부럽지 않은 재산을 물려받지도, 부유한 가정에서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하지는 못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들이니 말이죠. 재수를 성공하고 제법 괜찮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도 제가 느낀 자부심이나 기쁨은 오롯이 부모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힘들었던 젊은 시절 더 배우지 못한 부모님의 꿈을 대신 이루어 드렸고 어디 가서 자식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부모님을 보면 유일하게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이 뿌듯해지곤 했죠. 이제 시작입니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무기력하지만, 그 타인이 부모님이라면 저는 조금은 더 오기가 생기고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따뜻하게 안아 드리며 사랑한다고 말해야겠습니다.
목마
윤승철
풀이 없다고 이 도시에서
목마를 타는 것은
슬픔을 삭히는 일일까
광화문이나 시청 앞을
목마를 타고 한바퀴 돈다고
서울의 표정없는 얼굴이 변할까
갈기없는 말을 타고 말 탄 양 하는 것은
과연 서럽지 않는 일일까
앞발을 치켜들고 하늘로 통할 수도 없고
천리를 단숨에 달리며 천하를 누르지도 못하는
목마를 타고 이 도시를 돌아보면
얼마나 확 트인 기분이 될 수 있을까
목마는 주인의 말도 잘 듣고
적당히 이끌기만 하면
서울쯤은 하루에도 몇 바퀴씩 돌 수 있지만
말의 용트림이 주는 살아있음을 알까
몸부림치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비정한 최후의 말울음을 들을 수 있을까
아무리 목마를 타고
죽는 날까지 말잔등을 때린들
근엄한 위엄을 갖추고 금빛 휘장을 날린들
무표정한 서울의 모습들이
단 한 번이라도 변하기나 할까.
인생의 길은 어디에도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길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으나 어디에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로를 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자신만의 오솔길 하나쯤 고요하게 간직하십시오. 그곳에서 진정한 자아를 만날 수 있으니까요. 오솔길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대로가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그곳에서 인간들이 만드는 대세의 힘을 느낄 수 있을 터이니까요. 하지만 대로를 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세속에 길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오솔길을 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습니다. 오솔길 속에 보석이 숨어 있고 오솔길도 그대에게는 대로나 마찬가지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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