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록집해 1
주희. 여조겸 편저, 엽채 집해, 이광호 역주 / 아카넷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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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동양 철학 vs 돈 되는 서양 과학?

 

자녀나 가족이 철학을 전공하겠다는 데 대해서는 말리겠다는 의견이 33%, 국민 5명 중 1명은 '철학' 하면 점 · 운세 · 관상 등을 떠올리고, 10명 중 8명은 철학은 공부하기 어려운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올해부터 2017년까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에 투자할 비용은 총 52000억 원으로 책정됐다. 이는 2009년 수립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종합계획'에서 제안한 35000억 원보다 17000억 원이 증액된 것이다."

 

가볍게 신문을 펼쳐 봐도 현재 동양철학과 과학의 빛과 그림자, 현대인의 인식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 '사변적, 재미없다, 고리타분하다, 골방 철학이다, 외톨이다.' 등등 어렵고 다가가기 어려운 골방에 갇힌 가난한 동양 철학. 반대로 우리에게 자연을 이해하고 완벽한 부와 명예를 선물해줄 실용성의 진수, 이성의 최고점 과학. 과연 이런 편견이 동서양을 수만 년 동안 지탱해 온 인간의 신념, 학문의 본질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것일까? 과학은 발달하고 인간 삶은 예전에 비해 훨씬 발전하고 편리해졌지만 동시에 공허해졌다. 웰빙(well-being)을 추구하려 발버둥치지만, 인간 본연의 가치와 존엄성이 훼손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며 사회는 진정한 발전을 이룬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과연 돈이나 단순한 통계 수치로 정의될 수 없는 동양철학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고 후손에게 물려줄 터전에서 인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면 이것을 말릴 힘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아는 것이 힘이다.' : 과학의 진리관

 

우선 과학적 인식에 기초한 서양의 대다수 학문은 사실 세계를 그 자체로 진리 세계로 바라본다. 그리스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시작된 논리정연한 서양 철학의 탄탄한 흐름 역시 대상을 객관화하고 탐구해야 할 타자로 치환시켜 진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발전했다. 그 예로 프랑스에서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는 경험론을 좀 더 세련되게 하기 위해 유사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른바 실증주의라는 철학적 방법을 확립했다. 실증주의에 의하면 우리는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지 않는 어떠한 탐구도 거부해야 한다. 반성적 거울의 역할을 담당하는 철학의 한 축을 담당하는 생각도 이러한데 엄격하고 오차가 없는 진리 성, 반복 가능성, 반증 가능성을 주된 동기로 삼는 과학을 말할 것도 없다. 과학에 진리란 정복 가능하며, 언젠가 정복해야 할 마지막 단계일 뿐이다. 이러한 맹목적이고 거침없는 과학의 탐구는 입체적이며 개체성과 전체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오묘한 자연, 그 속의 진리를 실험, 직관, 경험에 의해 파악 가능한 단순한 개체로 떨어뜨려 버렸다.

 

이원론적 사고에 기초한 과학은 사실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며 현상을 거듭 쪼개서 이해하려고 하며 인간의 이성을 맹신하며 자연적 진리까지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물론 전체성을 진리로 보는 현대 물리학의 사조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지만, 그간의 전체적 흐름은 이러하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터전인 자연 역시, 하나의 대상에 불과할 뿐 그 이상 그 이하의 가치를 지닌 무한한 존재가 아니므로 인간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처럼 객관화된 자연을 소유하고 이용하려고 도전한다. 하지만 과연 과학적 진리관의 극단적인 추구가 진정한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일까? 나날이 늘어나는 자살률과 이혼율, 상상할 수 없이 끔찍한 패륜 범죄, 끊임없이 들려오는 생태계의 파괴와 멸종 위기의 동물을 바라보며 느끼는 바가 없다면 그것은 인간 된 도리가 아니고 어떤 결실을 이루더라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인간이 가진 이성의 가장 큰 힘은 '반성'이다. 자연스레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자연 파괴를 불러온 오만한 과학적 진리관을 보완해줄 반성하는 동양철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체감하며 다양한 논의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 동양철학의 자연관

 

반대로 동양철학은 편견과 달리 이론의 학문이 아닌 실천의 학문이다. 현실적인 삶의 공간을 유학 인식의 장으로 삼았던 동양철학자들은 오히려 더욱 삶에 밀접한 위치에 있으며 실용적이고 깨달음을 주는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우주 자체를 생명 성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며 현실적인 삶의 공간 속에서 유학적 인간은 자기 수양을 시작으로 나아가 가족, 사회, 국가, 전체 자연에까지 온전한 힘을 발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관조, 해탈, 깨달음을 통한 진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모든 존재가 엉켜 있는 삶 속에서 인간은 주인이 아닌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이 속에서 진리란 주체적 삶에서 시작하며 마음, 주체의 문제에 집중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변화무쌍하며 만물 속에 녹아있는 가치적 대상이다. 동양철학의 진리란 오직 한 가지 정답만이 존재하는 개체가 아닌 태극(太極)으로 대표되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지닌 오묘한 존재이며 인간과 함께 전일성, 통일성을 지닌 존재다. 이에 따라 인간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본성에 따르며 실천적 삶을 통해 도()에 도달하며 천명지본성(天命之本性)을 회복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양철학의 진리관에 비추어 자연은 단순히 개체 이상의 전일자(全一者)이자 음양오행(陰陽五行)이 끊임없이 교감하며 운동하는 삶의 터전이므로 무분별한 개발할 대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유가의 자연관은 곧 타자 관이며 타자 관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유학에 있어서 타자는 그 자체가 목적성을 갖는 것이며 이러한 논리는 애기(愛己)로부터 애인(愛人)과 애물(愛物)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어가는 기초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왕수인은 대개 천지만물은 사람과 한 몸(一體)이다. 바람과 비, 이슬과 번개, 해와 달과 뭇별들, 금수와 초목, 산과 내, 흙과 돌 모두가 원래 사람과 한 몸일 따름이다.”고 말하였을 정도로 인간과 천지 만물은 어느 한 쪽의 우위가 있는 것이 아닌 공존 해야 하는 성질이다.

 

'더불어 삶' : 동양의 대안적 자연관

 

그렇다면 방향을 상실한 채 그저 빠르게만 달리고 있는 현대인의 한계, 자연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보완해줄 동양철학의 진리관, 대안적 자연관은 무엇이 있을까? 유학의 인간중심주의는 천지자연과의 합일을 인간의 궁극적 경계로 묘사하고 천지의 화육에 참여하는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 파괴를 야기한 서양적 인간중심주의와는 그 맥락이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의 기본이 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마음속에 새기고 자연의 아픔에 공감하며 생태계와 나의 합일을 거듭 생각해야한다. 자연은 타자가 아닌 우리 자신이 사는 터전이자 우리 삶 그 자체다. 서양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연을 도구적으로 바라보게 했지만, 유학은 비록 인간중심주의이기는 하지만 자연과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합일적 관계를 궁극적인 이상으로 추구한다는 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할 때 자연을 도구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생태파괴도 행해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은 성()을 오롯이 가진 존재이며 인간은 인()과 지()를 통해 전체성에서 진리를 추구하며 사실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넘어 더 깊은 통찰을 기반으로 그 뿌리까지 도달하며 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상호 교감, 음양오행이 충만한 상태에서 감응하며 감사하며 사는 인간은 자연을 소유하려는 생각은 오만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과학이 전적으로 틀렸고 배제해야 할 대상이며 철학이 만물의 진리이자 정당한 학문이라는 믿음 역시 정답은 아니며 올바르지 못하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정확하고 타당하게 분석하여 발전적인 방향으로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데 큰 이바지를 한 과학도 분명 중요하고 그 성과를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과학적 진리의 극단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경쟁적으로 제 살 깎아 먹기를 일삼는 현 세태에 잠시 쉬어가는 동양철학적 중용(中庸)의 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경제적 가치, 실질 파급효과에 목멜 필요 없이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한 당위성은 충분하다. 이미 수천 년 전 자연에 부여받은 본질적인 원리를 온전하게 발현하는 수양에 주목한 맹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촘촘한 그물코를 사용하지 말고 시기에 맞게 벌목하라."

 

우리 모두 왕도(王道)를 실현하며 자연과 더불어 올곧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반성하고 생각하고 행동하자.

만물과 모든 일은 각기 올바른 위치에 있다. 올바른 위치를 얻으면 편안하고, 올바른 위치를 잃으면 어긋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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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엔진 - 천사, 귀신, 부적, 종교, 징크스, 점성술...... 이성을 뛰어넘는 인간 믿음에 관한 진화론적 탐구
루이스 월퍼트 지음, 황소연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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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축구경기를 보다가 내가 화장실에만 가면 골이 터지는 걸까? 수업에 늦어 급한 마음에 백양로를 뛰어가는 내게 이 아주머니는 왜 자꾸 하나님의 존재를 강요 하시는 걸까?

 

이런 단순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었던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을 거라 기대되는 책을 수업 시간에 추천받았다. 다양한 목록의 추천 책 중에서도 세련된 디자인과 더불어 천사, 귀신, 징크스 등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듯싶어 주저 없이 이 책을 선택했다. 이 책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우리의 다양한 믿음을 진화생물학, 사회심리학에 기반을 두고 분석하며 매우 많은 사례들과 이론을 들어 설명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 했을 때 내가 기대했던 흥미로운 주제가 아닌 딱딱한 말투로 인간과 동물을 비교하며 과학적인 분석을 나열하는 듯해서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수업 시간에 배웠던 바넘 효과(Barnum effect), 인지 부조화 이론(cognitive dissonance theory)이 등장해 느꼈던 반가운 마음과 간간히 나오는 사진의 흥미로움(p.176쪽에 나오는 거울 앞에 거식증 소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신선했다.) 덕분에 계속해서 책을 붙잡고 있게 되었다. 그러다 뒷부분에 가서 UFO, 징크스, 마법 같은 사례들이 나오며 더욱 탄력을 받고 책을 읽게 되었는데 다 읽고 보니 앞부분의 내용이 결코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닌 믿음의 엔진’, 메카니즘을 형성해 나가는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두뇌 속에 형성된 메카니즘, 즉 모든 일에서 인과관계를 찾으려 하고 그 속에서 안정과 행복을 이루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태도가 뒤쪽에서 설명하는 모든 일들을 설명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은이의 주장은 역시 과학자답게 다양한 실험과 사례들로써 타당성을 얻고 있다. 안전벨트 착용과 사망률과의 관계, 포비넬리의 침팬지 실험, 도구제작에 관한 인간의 우수성 등 모두 정확한 수치와 권위 있는 실험을 통해 나온 결과라 더욱 신뢰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치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플라시보 효과의 본질부분에서 더욱 더 지은이의 생각에 동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어린 시절 경험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천식으로 인해 밤마다 호흡곤란에 시달리며 울고 아파했다.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는 재빨리 기관지 확장제와 함께 사탕을 주시며 손가락을 시원하게 눌러주셨다. 그러면 기침을 하며 아파하던 나는 다시 곤히 잠에 들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탕과 손가락을 눌러주시던 아버지의 행동은 천식 증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흥분 상태인 나에게 사탕과 아버지의 따뜻한 손은 내 머리 속에 이미 치료에 대한 믿음을 심어준 것이었다. 이렇듯 나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믿음의 엔진에 대한 체험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의 엔진에 대한 신뢰를 강화 시켜 주었다. 또한 공감했던 부분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메카니즘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해 나가지만 지은이는 종교에 적대적이거나 또는 과학적 설명이 종교적 믿음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 역시 극단적으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신도들을 경멸하고 공격적인 선교활동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무신론자이지만 분명 종교가 지니는 긍정적인 측면 역시 이해하는 점에서 그의 입장에 수긍 했다. 만들어진 신으로 유명한 도킨스는 신앙을 버리라고 대중을 설득하고 선동한다. 그러나 월퍼트는 나는 내 아들이 열성 기독교 신자가 됐을 때도 말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렇듯 지은이는 믿음의 엔진을 기반으로 한 진지한 태도로 현상을 이해하려 하지만 신앙으로 뭉친 이들의 믿음 역시 이해해 준다. 분명 그들 역시 인간 본성의 메카니즘을 통해 형성된 신앙을 통해 행복을 추구해 나가기 때문이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의 믿음을 존중해 주고 하나의 입장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 위주의 소설책과 관심 있는 분야의 자서전을 위주로 독서하던 나에게 분명 이 책은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며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언가 얻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대학생이 된 나에게 좋은 경험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기분 역시 어려운 책을 읽고 나면 그만큼 지적인 향상이 있을 것이란 나의 '믿음의 엔진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에 밑줄을 치는 나의 버릇이 있는데 이 책에선 믿음을 움직이는 건 희망이다.”(p.273) 바로 그 곳 이였다. 대학 새내기로서 모르는 것도 많고 나의 존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분명 존재하지만 긍정적으로 희망을 가지고 내 자신이 성장해 나갈 것이란 믿음으로 움직인다면 분명 훌륭한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을 움직이는 것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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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3
게리 윌스 지음, 김창락 옮김 / 돋을새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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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바울에 대해 안다고 말 할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비기독교 인으로서 솔직히 말하면 뜬구름 같이 바울의 이미지만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을 뿐 그의 복음서나 행적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런 내가 성서와 기독교 수업시간 과제로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예수와 제국’, ‘예수등 몇몇 권들을 먼저 훑어 봤지만 왠지 모를 딱딱함과 어려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란 비판적이고 자극적인 어조의 제목과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미국 기독교인의 필독서란 거창한 수식 어구에 끌려 이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선 나는 바울에 대해 이 책을 읽어나가며 좀 더 올바른 이해를 위해 지인들에게 조금씩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배경 지식이 얕은 내겐 그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야기들의 대다수는 바울은 그리스도교 최대의 전도사, 큰 영향을 끼친 인물, 그리스도교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신학자라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내게 흥미를 준 대목은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평등주의를 앞서서 외쳐야 할 것 같은 신학자 바울이 여성 차별주의자라는 말이었다. 원래 인간 이라는 존재가 수많은 장점 보다 단 하나의 단점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는가? 책에서는 바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좀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최초로 오염 시킨 자”, “예수의 정신에 바울 정신의 결점들이 덧씌워진 것보다 더 꼴사나운 덧씌우기가 여태 저질러진 적이 없다”, “나쁜 소식 전달자”, “증오심을 부추기는 데 천재적등등 내가 익히 알고 들어왔던 바울의 헌신적이고 선구자적인 이미지와는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그것도 니체와 같은 이름 있는 학자의 입장이라 더욱 더 놀라움을 느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바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 저자는 단호하게 근거를 들어가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저자는 13개의 서신 가운데 바울이 직접 확실하게 썼다고 인정되는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에 기초를 두고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그의 주장은 왜곡되지 않은 본래 바울을 통해 예수를 바라보는 것만큼 올바른 방법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바울의 서신속의 예수가 복음서의 예수보다 앞선 것이며, 신약 성경 중 맨 처음 작성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만큼 살아있는 예수의 모습, 정신을 이해하는데 올바른 방법인 것이라고 말하며 논리적이고 역사적인 사료들을 통해 바울을 다시 바라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책에서도 상당 부분 누가복음서가 등장하며 바울의 믿음과 비교를 하며 분석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누가복음서가 등장한 시기는 이미 초기 기독교 교회의 맹아가 탄생하는 시점이라 신학이란 이론적 판단이 상당 부분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옮긴이와의 인터뷰에서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만해도 제도적인 교회는 물론 목사나 장로도 없었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논리를 기반으로 실제로 바울은 여성을 전혀 차별하지 않았으며 예수를 왜곡시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재차 언급했다. 오히려 저자는 보수적인 학자들과 바울, 예수가 대립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이들의 오류 때문에 생긴 이미지라고 말한다. 결국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었으며 사랑을 최우선이란 메시지인 것이었다.

 

나는 사실 과제라는 강압적인 의도 탓에 어렵게 읽어 나갔지만 다 읽고 나니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해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내가 언제 시간을 내서 바울의 일생에 대해 조사해 보고, 그의 복음서를 읽어 보겠는가? 짧은 구절과 일정한 순서대로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자의 역사적 논증을 위해 등장한 다양한 바울의 서신의 내용을 한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고 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 옮긴이와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 느낀 것인데 비기독교인인 내가 오히려 이 책을 부담 없이 흥미롭게 읽어나가는데 수월 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13개중 7개의 서신만이 바울이 썼다는 견해만 하더라도 한국교회 풍토에서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거북할 정도로 진보적이라니 이 책이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하겠다고 느꼈다. 기독교인으로서 좀 더 폭넓은 배경 지식을 가지고, 또 다른 견해를 가진 (하나의 견해가 진리라는 생각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친구들에게도 꼭 읽어보라고 권해 주고 싶은 책이었다. 게다가 이 책에서 탁월하다고 느낀 부분은 옮긴이의 노력 부분이었다. 인문학이나 신학과 같이 언어의 다의성이 많은 부분 존재하는 학문에서, 즉 단어 하나의 뉘앙스로도 이해의 차이를 보일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는데 부록으로 단어 하나하나 번역의 의미를 되새겨 준 노력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렇듯 저자와 옮긴이의 학문적 노력과 용기로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내가 얻어가는 점이 있어서 힘들었던 만큼 뿌듯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은 부분에 밑줄을 치는 버릇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자연스레 이 부분에 펜이 갔다. “ 바울은 예수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로 그 뜻을 나타냈다. 그것은 곧 사랑이 유일한 법이라는 것이다.”

복음서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본뜻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복음서들을 경건하게 읽는다는 것은 여러 단계의 상징화 작업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한 말과 행동은 진정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 했는가‘를 지속적으로 묻는 것이다. 이 책은 학술서적이 아니라 믿음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합리적인 믿음을 따져보고 합리적인 믿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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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듀어든의 거침없는 한국축구
존 듀어든 지음, 조건호 옮김 / 산책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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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타인의 반응에 민감하다. 특히 우리를 평가하는 대상이 푸른 눈의 외국인이라면 두세 배는 귀를 쫑긋 기울이고 마음을 졸인다. 그러다 보니 형식적인 칭찬에도 위상을 높였다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사소한 비판에도 국제적 망신이라며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축구'란 공놀이에도 마찬가지다. 아시아의 맹주를 자랑하면서도 항상 축구 강대국의 평가에 민감하며 외신 보도를 자극적으로 전달하는 언론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다. (한국보다 더 황색저널리즘으로 물든 영국의 기사를 그대로 베껴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유럽파 출전 경기 평점 하나에도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위기설'은 박지성보다 지치지도 않고 쏟아져 나온다. 물론 객관적으로 한국 축구를 바라보는 해외 저널리스트의 칼럼은 몇몇 잡지를 통해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글이 흥미롭다거나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뻔하디뻔한 '서문', '편집 후기'를 읽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대부분 칼럼의 중심은 아시아 축구 전반의 모습, 그 중에서도 탄탄한 J리그에 대한 것이었으니 배알이 꼴리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듀어든은 달랐다.

 

가디언, 포포투, 골닷컴 등에서 아시아 축구 전문 칼럼리스트로 활동한 존 듀어든. 국제적인 언론인이란 칭찬보다는 그저 원더걸스, 소녀시대에 하악거리고 삼겹살에 환장한 평범한 백인 대머리 아저씨란 소개를 그도 더 좋아할 것이다. (이번 시즌 블랙번의 강등에 흥분한 그와 성남의 부진에 '정신승리'만 강조하는 샤다라빠를 비교하면 싫어하겠지만 말이다.) 그의 글에는 한국에 대한 사랑이 묻어난다. 날카로운 비판의 눈초리를 한 그가 엠파스 토탈사커에서 네이트로 옮기고 나서도 꾸준하게 칼럼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곤 했다. 그런 점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그의 K리그, 한국 축구, EPL, 아시아 축구를 바라본 칼럼, 인터뷰를 반가운 마음보다 고마운 마음에 얼른 구매했다. 그의 노력으로 실제 유럽 이적 시장에서 한국 선수의 경쟁력은 재확인되었다. 또 한국 축구팬은 스스로 알지 못했던 우리나라 축구의 허점과 강점을 돌아볼 수 있었다. 단순히 활자 하나로 축구계, 특히 한국 축구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이가 있을까?

 

우선 그가 남긴 칼럼에는 전문성이 드러난다. 난 4~5년이 흐른 지금 책을 다시 보니 더 놀랐다. 축구계 승부 조작, 내셔널리그 승강제, K리그 아시안쿼터제, 해외리그 진출 등에 관한 칼럼을 읽으면서 그의 탁월한 전문성을 느꼈다. 대부분 몇 년 사이 한국 축구를 강타한 큰 사건이 아닌가? 축구의 본고장 영국에서 자라 아시아 전문 기자로 수많은 경기장을 누볐던 듀어든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베어벡, 아드보카트, AFC 회장 등 거물급 감독, 축구계 인물과 나누는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인터뷰는 고리타분한 질문&대답 형식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특히 오일 머니를 무기로 발전하는 중동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J리그, K리그의 비교 분석은 한국인이라면 할 수 없는 영역의 글이었다. 이방인의 공정한 눈으로 바라본 문제점은 상당히 불편한 진실이었지만 분명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국적만으로 진정 이방인이라 할 수 있을까? 2002년 월드컵 때 처음 한국을 찾은 이후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그는 이미 한국 문화에 푹 빠졌다. 심지어 블랙번 팬인 그는 칼럼에서 한국의 경기를 보며 '우리'라는 표현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닝, 한국 음식 (특히 삼겹살!)을 이용한 참신한 비유는 놀라운 수준이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듀어든의 글을 읽다 보면 K리그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올스타전에 대한 제안, 이적 시나리오, 숨겨진 명승부, 안타까운 중계 현실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걸 보고 있으면 속이 다 시원하다. 최근에는 호주, 일본 선수의 이적에 관련해 쉽게 접하기 어려운 비하인드 스토리나 냉정한 실력 평가는 눈여겨볼 만하다. 물론 축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100%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개인적 축구 가치관이나 좋아하는 플레이 스타일에 대한 특별한 개념은 자라면서 차근차근 형성된 것이기에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천수에 대한 동정론이나 안정환에 대한 야박한 평가는 나와 100% 반대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듀어든이 쓴 이 책은 흥미롭다. 한국 축구 전반은 물론 세계 축구 흐름, 특히 EPL을 둘러쌓고 돌아가는 권력의 이동을 쉽고 재미있게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편파적이지 않고 혹은 편파적으로 (K리그에 관련해서는!)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좀 더 관중에게 다가가며 선진 축구 시스템을 마련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협회 관계자는 듀어든이 제안한 여러 가지 마케팅, 외교 전략, 대표팀-리그 운영에 관련한 사항을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축구와 나아가 한국을 사랑하는 만큼 따끔한 충고와 제언을 아끼지 않는 푸른 외국인이 항상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가 늘 EPL, 라리가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한국 특유의 친근하며 가족적이고 열정적인 분위기는 그 누구의 평가 대상이 아닌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다. 조금 더 자신 있게 어깨를 펴고 TV 속에서 펼쳐지는 남의 나라 축구만을 부러워하지 말자. 축구 종주국 영국 출신 듀어든도 말하지 않았는가? K리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그리고 충분히 매력적이고 경쟁력 있으며 팬과 멀리있지 않다고! 발걸음을 옮기면 열정의 놀이터 K리그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명승부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다!

경기장에 늦게 도착했을 때 아무 대가도 없이 출입구로 들여보내주던 사람들, 돈을 건넷 것도 아닌데 반갑다며 차가운 맥주캔을 손에 쥐어주던 팬들, 몇 골을 먹고 대패 중인데도 끝없이 노래 부르던 열정적인 젊은이들, 관중석에서 통닭 한 마리를 뜯으며 축구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 나는 이러한 것들로 인해 한국 축구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유럽의 강팀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4강까지 진출한 월드컵도 즐겁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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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지식인마을 37
김선희 지음 / 김영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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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철학을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칭하며 세상과 동떨어진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오해며 철학적 근본 개념에 대한 심각한 무지다. 소크라테스가 ‘무지’를 최선의 덕으로 생각했다지만, 삶의 고뇌와 번민에 주목하며 근원적인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철학은 억울할 만하다. 사유를 통하여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 차분하고 깊은 성찰을 반복했던 수많은 철학자. 그중에서도 인간 삶의 고통에 특히 주목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단순히 ‘염세주의’, ‘허무주의’로 단정 짓기 어려운 자들이다. 기본적으로 낙관론을 주장한 헤겔과 달리 쇼펜하우어, 니체 모두 비관론의 입장이었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다르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가 삶의 부정으로 나아가며 해탈에 집중했다면 니체는 삶의 긍정을 선택하며 디오니소스적 삶을 추구했다.

 

“고통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철학의 중심 물음으로 가지고 있던 쇼펜하우어는 20대 초반에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철학의 과제이자 그의 삶의 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은 불쾌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인생에 대하여 사색하며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헤겔과 같은 시간에 강의를 열었다가 5명의 수강생을 받고 심통이 잔뜩 나 있는 듯한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를 보라!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 아버지의 자살, 콜레라 등 쇼펜하우어를 둘러싼 세계는 고통과 좌절로 가득 차있었다. 인도의 베다 철학과 플라톤의 이데아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서구를 지배하던 칸트적 세계관에 날카롭게 반기를 들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란 유명한 말로 시작하는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는 그의 철학적 사상을 응축하고 있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물자체와 현상을 중점으로 한 칸트를 비판했다. 물자체와 현상이 원인-결과의 관계가 아니고 물자체는 결코 인식영역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쇼펜하우어는 표상/의지 개념을 만들었다. 우리가 보는 표상 세계의 원인이 바로 의지인데 이것은 목적을 알 수 없는 욕망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맹목적 삶의 의지’로 세상은 굴러가는데 인간은 끝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부족의 상태를 두려워하며 욕구의 충돌에서 허우적거린다. 자연스레 그는 자아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위해 무욕구의 상태, 즉 의지가 부정되고 모두 무(無)로 돌아가는 열반의 상태를 추구했다. 이 밖에도 그는 예술의 순수 정관 역할, 마야의 베일이 걷힌 후 등장하는 동고(同苦)를 잠시나마 고통의 치료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니체에 있어서 예술의 진정한 과제는 의지의 마취가 아니라 의지의 고취이자 삶의 자극이다. 이 지점이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극적인 분기점이다. 예술의 도덕화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펼쳐지는 니체의 예술론은 예술을 도덕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정식이 환기하듯이 예술을 목적으로 위치시킨다.”

 

영원회귀, 위버멘시, 디오니소스적인 것, 힘에의 의지, 관점주의 등 형식은 체계적이지 않지만, 영향은 엄청나게 큰 개념을 들고 19C 말 사유 태도를 바꾼 계몽주의자 니체. 그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그의 개념과는 다르게 ‘의지’의 가치에 다른 방향으로 집중했다. 더 강한 힘이 되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에 주목한 그는 무의욕, 허무주의, 데카당스, 권태와 같은 근대 인간의 고질적 병폐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그는 ’쇠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답게 기존 권위, 우상의 그늘을 자유롭게 공격하며 하나씩 파괴하기 시작했다. 내세적 세계를 상정하여 현재에 희생을 강요한 기독교부터 의지를 부정한 (사실적 차원이 아니라 당위적 차원에서) 쇼펜하우어, 가장 독일적인 작곡가이자 초기와 달리 서서히 사이가 멀어진 바그너까지. 니체는 예술이 삶을 위하는 기여도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에우리피데스가 죽인 디오니소스적인 그리스 비극을 긍정적인 예로 들기도 했다. 더 나아가 위버멘쉬 개념을 가지고 낙타-사자-어린이 단계로 나뉘는 인간 정신을 분석하며 힘들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매 순간 새로 생성하는 사건을 삶의 긍정적 요소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영원회귀’를 가지고 현재 삶에 충실하고 의지가 고양되어 노예도덕이 아니라 주인도덕을 지닌 인생을 권하고 있다.

 

이 책은 철학을 넘어 문학, 심리학, 음악 등 다양한 영역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두 철학자를 비교 분석하며 재조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초대-만남-대화-이슈’ 4가지 단계를 거치며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두 철학자의 대략적인 주장과 둘 사이의 공통분모, 대척점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 신의 빈자리를 이성이, 아니 이제는 돈이 차지한 21세기에도 쇼펜하우어, 니체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삶은 고통과 비극으로 가득 차있고 이 속에서 의미를 스스로 찾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란 사실에 깊이 공감하는 터라 둘의 논리가 약간의 위로를 전해주었다. 오직 나만 슬픈 것이 아니구나,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구나, 나만 아픈 것이 아니구나! 관점주의자 니체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어찌 보면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고통스럽게 보는 것 같다. 나는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단계에서 망각과 창조를 거듭하며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그것이 내 것이 아닌지 착각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이게 바로 철학의 존재 이유이자 인간을 좀 더 행복할 수 있게 해주는 철학적 사고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어떠한 철학자도 우리의 고통을 대신 치료해줄 수 없다. 우리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철학자는 바로 이와 같은 자기 치료를 돕는 이들이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철학과 철학자의 도움으로 자신의 문제와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고 치료해야만 한다. 이때 우리는 마치 칸트가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모토로서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질 것’을 촉구했던 것처럼 사유의 힘을 사용하여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고 고통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며, 스스로의 의지 없이는 그 어떤 치료적 도움도 성공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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