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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ㅣ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3
게리 윌스 지음, 김창락 옮김 / 돋을새김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사실 바울에 대해 안다고 말 할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비기독교 인으로서 솔직히 말하면 뜬구름 같이 바울의 이미지만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을 뿐 그의 복음서나 행적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그런 내가 성서와 기독교 수업시간 과제로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예수와 제국’, ‘예수’등 몇몇 권들을 먼저 훑어 봤지만 왠지 모를 딱딱함과 어려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란 비판적이고 자극적인 어조의 제목과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미국 기독교인의 필독서란 거창한 수식 어구에 끌려 이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선 나는 바울에 대해 이 책을 읽어나가며 좀 더 올바른 이해를 위해 지인들에게 조금씩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배경 지식이 얕은 내겐 그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야기들의 대다수는 바울은 그리스도교 최대의 전도사, 큰 영향을 끼친 인물, 그리스도교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신학자라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내게 흥미를 준 대목은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평등주의를 앞서서 외쳐야 할 것 같은 신학자 바울이 여성 차별주의자라는 말이었다. 원래 인간 이라는 존재가 수많은 장점 보다 단 하나의 단점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는가? 책에서는 바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좀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최초로 오염 시킨 자”, “예수의 정신에 바울 정신의 결점들이 덧씌워진 것보다 더 꼴사나운 덧씌우기가 여태 저질러진 적이 없다”, “나쁜 소식 전달자”, “증오심을 부추기는 데 천재적”등등 내가 익히 알고 들어왔던 바울의 헌신적이고 선구자적인 이미지와는 너무나 달랐던 것이다. 그것도 니체와 같은 이름 있는 학자의 입장이라 더욱 더 놀라움을 느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바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해 저자는 단호하게 근거를 들어가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저자는 13개의 서신 가운데 바울이 직접 확실하게 썼다고 인정되는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에 기초를 두고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그의 주장은 왜곡되지 않은 본래 바울을 통해 예수를 바라보는 것만큼 올바른 방법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바울의 서신속의 예수가 복음서의 예수보다 앞선 것이며, 신약 성경 중 맨 처음 작성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만큼 살아있는 예수의 모습, 정신을 이해하는데 올바른 방법인 것이라고 말하며 논리적이고 역사적인 사료들을 통해 바울을 다시 바라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책에서도 상당 부분 누가복음서가 등장하며 바울의 믿음과 비교를 하며 분석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누가복음서가 등장한 시기는 이미 초기 기독교 교회의 맹아가 탄생하는 시점이라 신학이란 이론적 판단이 상당 부분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옮긴이와의 인터뷰에서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만해도 제도적인 교회는 물론 목사나 장로도 없었고,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논리를 기반으로 실제로 바울은 여성을 전혀 차별하지 않았으며 예수를 왜곡시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재차 언급했다. 오히려 저자는 보수적인 학자들과 바울, 예수가 대립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이들의 오류 때문에 생긴 이미지라고 말한다. 결국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과 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었으며 사랑을 최우선이란 메시지인 것이었다.
나는 사실 과제라는 강압적인 의도 탓에 어렵게 읽어 나갔지만 다 읽고 나니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해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내가 언제 시간을 내서 바울의 일생에 대해 조사해 보고, 그의 복음서를 읽어 보겠는가? 짧은 구절과 일정한 순서대로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자의 역사적 논증을 위해 등장한 다양한 바울의 서신의 내용을 한번쯤 읽어볼 가치가 있고 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또 옮긴이와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 느낀 것인데 비기독교인인 내가 오히려 이 책을 부담 없이 흥미롭게 읽어나가는데 수월 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13개중 7개의 서신만이 바울이 썼다는 견해만 하더라도 한국교회 풍토에서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거북할 정도로 진보적이라니 이 책이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하겠다고 느꼈다. 기독교인으로서 좀 더 폭넓은 배경 지식을 가지고, 또 다른 견해를 가진 (하나의 견해가 진리라는 생각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친구들에게도 꼭 읽어보라고 권해 주고 싶은 책이었다. 게다가 이 책에서 탁월하다고 느낀 부분은 옮긴이의 노력 부분이었다. 인문학이나 신학과 같이 언어의 다의성이 많은 부분 존재하는 학문에서, 즉 단어 하나의 뉘앙스로도 이해의 차이를 보일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하는데 부록으로 단어 하나하나 번역의 의미를 되새겨 준 노력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렇듯 저자와 옮긴이의 학문적 노력과 용기로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내가 얻어가는 점이 있어서 힘들었던 만큼 뿌듯하다. 마지막으로 나는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은 부분에 밑줄을 치는 버릇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자연스레 이 부분에 펜이 갔다. “ 바울은 예수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로 그 뜻을 나타냈다. 그것은 곧 사랑이 유일한 법이라는 것이다.”
복음서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본뜻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복음서들을 경건하게 읽는다는 것은 여러 단계의 상징화 작업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한 말과 행동은 진정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 했는가‘를 지속적으로 묻는 것이다. 이 책은 학술서적이 아니라 믿음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합리적인 믿음을 따져보고 합리적인 믿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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