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지식인마을 37
김선희 지음 / 김영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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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철학을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칭하며 세상과 동떨어진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오해며 철학적 근본 개념에 대한 심각한 무지다. 소크라테스가 ‘무지’를 최선의 덕으로 생각했다지만, 삶의 고뇌와 번민에 주목하며 근원적인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철학은 억울할 만하다. 사유를 통하여 물음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 차분하고 깊은 성찰을 반복했던 수많은 철학자. 그중에서도 인간 삶의 고통에 특히 주목했던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단순히 ‘염세주의’, ‘허무주의’로 단정 짓기 어려운 자들이다. 기본적으로 낙관론을 주장한 헤겔과 달리 쇼펜하우어, 니체 모두 비관론의 입장이었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다르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가 삶의 부정으로 나아가며 해탈에 집중했다면 니체는 삶의 긍정을 선택하며 디오니소스적 삶을 추구했다.

 

“고통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철학의 중심 물음으로 가지고 있던 쇼펜하우어는 20대 초반에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철학의 과제이자 그의 삶의 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은 불쾌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인생에 대하여 사색하며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헤겔과 같은 시간에 강의를 열었다가 5명의 수강생을 받고 심통이 잔뜩 나 있는 듯한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를 보라!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 아버지의 자살, 콜레라 등 쇼펜하우어를 둘러싼 세계는 고통과 좌절로 가득 차있었다. 인도의 베다 철학과 플라톤의 이데아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서구를 지배하던 칸트적 세계관에 날카롭게 반기를 들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란 유명한 말로 시작하는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는 그의 철학적 사상을 응축하고 있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물자체와 현상을 중점으로 한 칸트를 비판했다. 물자체와 현상이 원인-결과의 관계가 아니고 물자체는 결코 인식영역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쇼펜하우어는 표상/의지 개념을 만들었다. 우리가 보는 표상 세계의 원인이 바로 의지인데 이것은 목적을 알 수 없는 욕망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맹목적 삶의 의지’로 세상은 굴러가는데 인간은 끝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부족의 상태를 두려워하며 욕구의 충돌에서 허우적거린다. 자연스레 그는 자아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위해 무욕구의 상태, 즉 의지가 부정되고 모두 무(無)로 돌아가는 열반의 상태를 추구했다. 이 밖에도 그는 예술의 순수 정관 역할, 마야의 베일이 걷힌 후 등장하는 동고(同苦)를 잠시나마 고통의 치료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니체에 있어서 예술의 진정한 과제는 의지의 마취가 아니라 의지의 고취이자 삶의 자극이다. 이 지점이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극적인 분기점이다. 예술의 도덕화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펼쳐지는 니체의 예술론은 예술을 도덕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정식이 환기하듯이 예술을 목적으로 위치시킨다.”

 

영원회귀, 위버멘시, 디오니소스적인 것, 힘에의 의지, 관점주의 등 형식은 체계적이지 않지만, 영향은 엄청나게 큰 개념을 들고 19C 말 사유 태도를 바꾼 계몽주의자 니체. 그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그의 개념과는 다르게 ‘의지’의 가치에 다른 방향으로 집중했다. 더 강한 힘이 되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에 주목한 그는 무의욕, 허무주의, 데카당스, 권태와 같은 근대 인간의 고질적 병폐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그는 ’쇠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답게 기존 권위, 우상의 그늘을 자유롭게 공격하며 하나씩 파괴하기 시작했다. 내세적 세계를 상정하여 현재에 희생을 강요한 기독교부터 의지를 부정한 (사실적 차원이 아니라 당위적 차원에서) 쇼펜하우어, 가장 독일적인 작곡가이자 초기와 달리 서서히 사이가 멀어진 바그너까지. 니체는 예술이 삶을 위하는 기여도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에우리피데스가 죽인 디오니소스적인 그리스 비극을 긍정적인 예로 들기도 했다. 더 나아가 위버멘쉬 개념을 가지고 낙타-사자-어린이 단계로 나뉘는 인간 정신을 분석하며 힘들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매 순간 새로 생성하는 사건을 삶의 긍정적 요소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영원회귀’를 가지고 현재 삶에 충실하고 의지가 고양되어 노예도덕이 아니라 주인도덕을 지닌 인생을 권하고 있다.

 

이 책은 철학을 넘어 문학, 심리학, 음악 등 다양한 영역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두 철학자를 비교 분석하며 재조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초대-만남-대화-이슈’ 4가지 단계를 거치며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두 철학자의 대략적인 주장과 둘 사이의 공통분모, 대척점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다. 신의 빈자리를 이성이, 아니 이제는 돈이 차지한 21세기에도 쇼펜하우어, 니체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삶은 고통과 비극으로 가득 차있고 이 속에서 의미를 스스로 찾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란 사실에 깊이 공감하는 터라 둘의 논리가 약간의 위로를 전해주었다. 오직 나만 슬픈 것이 아니구나, 나만 외로운 것이 아니구나, 나만 아픈 것이 아니구나! 관점주의자 니체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어찌 보면 세상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고통스럽게 보는 것 같다. 나는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단계에서 망각과 창조를 거듭하며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그것이 내 것이 아닌지 착각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반성을 해본다. 이게 바로 철학의 존재 이유이자 인간을 좀 더 행복할 수 있게 해주는 철학적 사고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어떠한 철학자도 우리의 고통을 대신 치료해줄 수 없다. 우리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철학자는 바로 이와 같은 자기 치료를 돕는 이들이다. 우리는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철학과 철학자의 도움으로 자신의 문제와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고 치료해야만 한다. 이때 우리는 마치 칸트가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모토로서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질 것’을 촉구했던 것처럼 사유의 힘을 사용하여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고 고통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며, 스스로의 의지 없이는 그 어떤 치료적 도움도 성공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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