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록집해 1
주희. 여조겸 편저, 엽채 집해, 이광호 역주 / 아카넷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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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동양 철학 vs 돈 되는 서양 과학?

 

자녀나 가족이 철학을 전공하겠다는 데 대해서는 말리겠다는 의견이 33%, 국민 5명 중 1명은 '철학' 하면 점 · 운세 · 관상 등을 떠올리고, 10명 중 8명은 철학은 공부하기 어려운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올해부터 2017년까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에 투자할 비용은 총 52000억 원으로 책정됐다. 이는 2009년 수립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종합계획'에서 제안한 35000억 원보다 17000억 원이 증액된 것이다."

 

가볍게 신문을 펼쳐 봐도 현재 동양철학과 과학의 빛과 그림자, 현대인의 인식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다. '사변적, 재미없다, 고리타분하다, 골방 철학이다, 외톨이다.' 등등 어렵고 다가가기 어려운 골방에 갇힌 가난한 동양 철학. 반대로 우리에게 자연을 이해하고 완벽한 부와 명예를 선물해줄 실용성의 진수, 이성의 최고점 과학. 과연 이런 편견이 동서양을 수만 년 동안 지탱해 온 인간의 신념, 학문의 본질을 정확하게 관통하는 것일까? 과학은 발달하고 인간 삶은 예전에 비해 훨씬 발전하고 편리해졌지만 동시에 공허해졌다. 웰빙(well-being)을 추구하려 발버둥치지만, 인간 본연의 가치와 존엄성이 훼손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며 사회는 진정한 발전을 이룬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과연 돈이나 단순한 통계 수치로 정의될 수 없는 동양철학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고 후손에게 물려줄 터전에서 인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면 이것을 말릴 힘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아는 것이 힘이다.' : 과학의 진리관

 

우선 과학적 인식에 기초한 서양의 대다수 학문은 사실 세계를 그 자체로 진리 세계로 바라본다. 그리스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시작된 논리정연한 서양 철학의 탄탄한 흐름 역시 대상을 객관화하고 탐구해야 할 타자로 치환시켜 진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발전했다. 그 예로 프랑스에서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는 경험론을 좀 더 세련되게 하기 위해 유사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른바 실증주의라는 철학적 방법을 확립했다. 실증주의에 의하면 우리는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지 않는 어떠한 탐구도 거부해야 한다. 반성적 거울의 역할을 담당하는 철학의 한 축을 담당하는 생각도 이러한데 엄격하고 오차가 없는 진리 성, 반복 가능성, 반증 가능성을 주된 동기로 삼는 과학을 말할 것도 없다. 과학에 진리란 정복 가능하며, 언젠가 정복해야 할 마지막 단계일 뿐이다. 이러한 맹목적이고 거침없는 과학의 탐구는 입체적이며 개체성과 전체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오묘한 자연, 그 속의 진리를 실험, 직관, 경험에 의해 파악 가능한 단순한 개체로 떨어뜨려 버렸다.

 

이원론적 사고에 기초한 과학은 사실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며 현상을 거듭 쪼개서 이해하려고 하며 인간의 이성을 맹신하며 자연적 진리까지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물론 전체성을 진리로 보는 현대 물리학의 사조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지만, 그간의 전체적 흐름은 이러하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터전인 자연 역시, 하나의 대상에 불과할 뿐 그 이상 그 이하의 가치를 지닌 무한한 존재가 아니므로 인간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말처럼 객관화된 자연을 소유하고 이용하려고 도전한다. 하지만 과연 과학적 진리관의 극단적인 추구가 진정한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일까? 나날이 늘어나는 자살률과 이혼율, 상상할 수 없이 끔찍한 패륜 범죄, 끊임없이 들려오는 생태계의 파괴와 멸종 위기의 동물을 바라보며 느끼는 바가 없다면 그것은 인간 된 도리가 아니고 어떤 결실을 이루더라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인간이 가진 이성의 가장 큰 힘은 '반성'이다. 자연스레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자연 파괴를 불러온 오만한 과학적 진리관을 보완해줄 반성하는 동양철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체감하며 다양한 논의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 동양철학의 자연관

 

반대로 동양철학은 편견과 달리 이론의 학문이 아닌 실천의 학문이다. 현실적인 삶의 공간을 유학 인식의 장으로 삼았던 동양철학자들은 오히려 더욱 삶에 밀접한 위치에 있으며 실용적이고 깨달음을 주는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우주 자체를 생명 성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며 현실적인 삶의 공간 속에서 유학적 인간은 자기 수양을 시작으로 나아가 가족, 사회, 국가, 전체 자연에까지 온전한 힘을 발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관조, 해탈, 깨달음을 통한 진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모든 존재가 엉켜 있는 삶 속에서 인간은 주인이 아닌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이 속에서 진리란 주체적 삶에서 시작하며 마음, 주체의 문제에 집중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변화무쌍하며 만물 속에 녹아있는 가치적 대상이다. 동양철학의 진리란 오직 한 가지 정답만이 존재하는 개체가 아닌 태극(太極)으로 대표되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지닌 오묘한 존재이며 인간과 함께 전일성, 통일성을 지닌 존재다. 이에 따라 인간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본성에 따르며 실천적 삶을 통해 도()에 도달하며 천명지본성(天命之本性)을 회복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양철학의 진리관에 비추어 자연은 단순히 개체 이상의 전일자(全一者)이자 음양오행(陰陽五行)이 끊임없이 교감하며 운동하는 삶의 터전이므로 무분별한 개발할 대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 유가의 자연관은 곧 타자 관이며 타자 관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유학에 있어서 타자는 그 자체가 목적성을 갖는 것이며 이러한 논리는 애기(愛己)로부터 애인(愛人)과 애물(愛物)로 자연스럽게 확대되어가는 기초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왕수인은 대개 천지만물은 사람과 한 몸(一體)이다. 바람과 비, 이슬과 번개, 해와 달과 뭇별들, 금수와 초목, 산과 내, 흙과 돌 모두가 원래 사람과 한 몸일 따름이다.”고 말하였을 정도로 인간과 천지 만물은 어느 한 쪽의 우위가 있는 것이 아닌 공존 해야 하는 성질이다.

 

'더불어 삶' : 동양의 대안적 자연관

 

그렇다면 방향을 상실한 채 그저 빠르게만 달리고 있는 현대인의 한계, 자연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보완해줄 동양철학의 진리관, 대안적 자연관은 무엇이 있을까? 유학의 인간중심주의는 천지자연과의 합일을 인간의 궁극적 경계로 묘사하고 천지의 화육에 참여하는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 파괴를 야기한 서양적 인간중심주의와는 그 맥락이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의 기본이 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마음속에 새기고 자연의 아픔에 공감하며 생태계와 나의 합일을 거듭 생각해야한다. 자연은 타자가 아닌 우리 자신이 사는 터전이자 우리 삶 그 자체다. 서양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연을 도구적으로 바라보게 했지만, 유학은 비록 인간중심주의이기는 하지만 자연과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합일적 관계를 궁극적인 이상으로 추구한다는 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할 때 자연을 도구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생태파괴도 행해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은 성()을 오롯이 가진 존재이며 인간은 인()과 지()를 통해 전체성에서 진리를 추구하며 사실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넘어 더 깊은 통찰을 기반으로 그 뿌리까지 도달하며 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상호 교감, 음양오행이 충만한 상태에서 감응하며 감사하며 사는 인간은 자연을 소유하려는 생각은 오만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과학이 전적으로 틀렸고 배제해야 할 대상이며 철학이 만물의 진리이자 정당한 학문이라는 믿음 역시 정답은 아니며 올바르지 못하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정확하고 타당하게 분석하여 발전적인 방향으로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데 큰 이바지를 한 과학도 분명 중요하고 그 성과를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과학적 진리의 극단으로 지나치게 치우쳐 경쟁적으로 제 살 깎아 먹기를 일삼는 현 세태에 잠시 쉬어가는 동양철학적 중용(中庸)의 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경제적 가치, 실질 파급효과에 목멜 필요 없이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한 당위성은 충분하다. 이미 수천 년 전 자연에 부여받은 본질적인 원리를 온전하게 발현하는 수양에 주목한 맹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촘촘한 그물코를 사용하지 말고 시기에 맞게 벌목하라."

 

우리 모두 왕도(王道)를 실현하며 자연과 더불어 올곧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반성하고 생각하고 행동하자.

만물과 모든 일은 각기 올바른 위치에 있다. 올바른 위치를 얻으면 편안하고, 올바른 위치를 잃으면 어긋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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