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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발견 - KTX에서 찜질방까지 ㅣ 문지푸른책 밝은눈 6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평점 :
1. 내 삶속의 문화 인류학
문화인류학의 정의부터 살펴보자면 특정 집단을 장기간(이상적으로는 일년 또는 그 이상)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참여하면서 주민들과 면접과 대화를 통하여 그 집단이 가지고 있는 환경에서부터 관계망과 구조 그리고 의미구조까지 종합적으로 연계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학문의 특성상 현지조사가 많은데 접하는 범위가 다르므로 여행과는 다른 문화충격이 존재하며 함께 생활해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언어장벽이나 주관적인 곡해의 위험성이 있으며 실제로 서구가 일방적으로 비서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조작이나 오해의 문제가 있어 왔다. 단순히 원시는 곧 미개, 야만이라고 규정지으며 문명과는 반대되는 의미로 말이다. 다시 말해 보고 싶은, 혹은 보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이념, 종교와 같은 부수적인 요소에 의해 조작, 연출의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수업시간에는 현지조사를 넘어 좀 더 넓은 의미의 ‘문화인류학’을 가지고 수업을 진행해나갔다. 우리네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참신한 시각으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방법을 하나하나 배워 나갔던 것이다. 그 예로 직접 그려보았던 ‘신촌’지도는 대학에 따라, 혹은 같은 대학 재학생이라도 통학 수단에 따라, 또한 같은 길을 걸어도 집중하는 분야에 따라 확연하게 달랐다. 그리고 약도를 기억 못해도 길을 가는데 지장이 없고, 또한 키보드 자판을 그리지는 못하지만 능수능란하게 타자를 치는 우리의 모습에 새삼 놀라며 ‘안목지’와 ‘인지지’를 깨달았다. 그동안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배운 대로 본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또한 문화인류학은 여러 분과 학문들과 서로 만나는 총체적 접근을 사용하며, 인류의 라이프스타일과 라이프사이클에 일대 변화를 초래한 ‘디지털 신천지 개벽’ 속에서 문화의 중요성과 함께 더욱 각광받는 학문이 되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도 보이 소프라노나 인도, 중남미의 노래, 뮤직 비디오등 다양한 자료들을 보며 문화의 다양성과 가치를 조금이나마 느껴보았다. 인과율과 논리, 반복, 법칙성, 수학에 기반을 둔 자연과는 달리 인간, 특히 인간의 마음은 쉽게 예측이 불과하고, 적용이 힘든 부분이라 심리학이 그 점을 연구하는데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라는 점에서 문화인류학도 유사하다.
그밖에도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제품 이미지를 모아서 마음을 분석하는 방법(Metaphor Elicitation Technician)이나, 직원이 소비자와 함께 살며 불편한 점을 체감하고(Living It), 쫒아 다니며 분석(Shadow Tracking)하는 등 소비자의 마음을 읽기 위한 고객 조사 기법에서도 그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누가 핸드폰, 해리포터, MTV등의 성공을 예측했는가? 기본 욕구가 충족되니 욕구가 다양해진 인간 연구는 더욱 까다로워 졌고 그렇기에 인간의 행동과 심리, 그리고 메카니즘에 대해 주목하는 문화 인류학은 더욱 중요하고, 그 필요성이 커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과 늘 함께하는 문화를 타자와 비교하여 익숙한 것들의 문법을 정립하는데 그 맥락 속에서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문화 인류학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2. 문과대 사물함 사태에 대한 나의 경험
○ 10월 맑은 어느 날
수업이 대부분 종합관에 위치해 있는 터라 사실 귀찮기도 했지만, 수원에서 통학하는 내겐 위당관 사물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셈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덕지덕지 더럽게 A4용지가 사물함 앞을 차지하고 있다. 사물함을 철거할 예정이니 미리 책을 빼달라는 내용이었다. “아 귀찮게..... 이 책들을 (비록 전공 책들이 아니라 슬쩍 훔쳐본 옆 사람의 책들보다는 훨씬 적었지만) 그럼 학기 중인데 어디다 보관 하라는 거야?” 투덜대며 책을 옮기고 나서 나는 사물함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 10월 6일
교수님이 오늘따라 살짝 흥분 하신 것처럼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기 원하셨다. 문화인류학 특성상 워낙 다룰 내용도 많고 다양한데 무슨 일이지? 교수님은 지난 주말 겪은 황당한 일이라며 학생들의 의견을 물어보셨다. PPT속 쓰레기 같이 쌓인 책들과 사물함, 그것은 분명 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쓰던 친숙한 사물함이었다. 교수님은 저 책들이 모두 자원 낭비고, 분명 공지를 못보고 책을 빼지 못한 학생들도 있을 것이라며 필요한 사람은 사진도 준다며 연세춘추가 취재하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셨다. 또한 법학과 교수님에게 법적인 문제까지 물어보셨다니 꽤나 큰 충격 이셨던가 보다. 교수님이 저 사진 속의 피해자가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발표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나는 뺐는데 뭐... 그러게 미리미리 좀 빼랄 때 빼지.” 이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 12월 10일
문화 인류학 수업을 다 끝내고 마지막으로 한번 모이는 자리에 가서 좋은 말씀을 더 들었다. 그리고 그때 던져진 화두, ‘자기의 삶을 가치 있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문득 사물함 사건이 떠올랐다. ‘나와 네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사회’가 좀 더 건강하고, 아니 요즘 그렇게 강조하는 경제성이나 금전적인 부분을 떠나 유쾌한 사회 일 것인데 나는 너무 나 혼자만의 틀에 빠져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단순히 ‘나는 피해 본 거 없는데’, 하는 마음가짐으로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양에서 말하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뿐 아니라,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수많은 사물함 주인들, 그리고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뛰어야할 문과대 학생회, 언론의 역할을 하는 연세춘추까지, 모두가 이 사태에 침묵했다. 분명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른 길인데, 남 챙길 시간조차 없이 바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새삼 들었다. 특히 낭만과 에너지가 넘쳐야할 대학 캠퍼스에서 대학 조직이 비대해지고 공간이 변모하면서 모든 관계도 점점 소원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학교 측과 학생들이 조금 더 이야기를 했더라면, 사물함을 비우지 못한 학생들의 물건을 보관하는 식의 유연함을 보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커뮤니케이션 상에 있어서 화자의 존재, 청자에 대한 화자의 태도 등의 문제들이 고려된다면 간극은 메워지고 안타까운 일도 줄어 들 수 있을텐데 말이다.
3. 언어와 문화
| | + | - |
男 | 믿음직한, 잘생긴, 멋진, 대범한, 너그러운, 인자한, 따뜻한, 부지런한 | 부정적인, 게으른, 불만투성이의, 탐욕적인, 간사한, 약삭빠른, 마초적인, 집단주의의 |
女 | 참한, 착한, 귀여운, 지혜로운, 예쁜, 섹시한, 밝은 | 소심한, 비관적인, 변덕스러운, 된장녀스러운, 시크한 |
인간이 타자를 바라보는 것이 문화라면 그러한 과정 속에서 언어를 통해 사회, 권력이 창출된다. 그만큼 언어는 단순히 의미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의사소통의 과정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실제로 수업시간을 통해 우리는 언어와 관련 지어 두 가지 설문을 받아보았다. 남자, 여자를 지칭하는 단어들과 긍정적, 부정적인 형용사들을 분류해 본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던 단어들이였지만 이렇게 시각적으로 구체화를 시켜보니 또 색다르게 느껴졌고 신기했다.
| 男 | 女 |
사장님 남편, 바깥양반 사내, 놈 홀아비, 아저씨 산타할아버지 마법사 | 여인, 여사 마누라, 아내 여편네, 집사람 wife, 부인 안사람, 아줌마 계집, 년 여고괴담 마녀, 미혼모 미망인, 과부 |
첫 번째 표에서 여성을 지칭하는 분류가 더 많고, 그 단어들은 상당 부분 남성의 역할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의 직책에 따라 여인도 될 수 있고 여편네로 불릴 수도 있으며, 마녀, 년 등 욕으로 쓰이거나 부정적인 늬앙스를 띄는 것이 남성에 비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여성의 이미지에 정형화된 의식을 상투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왜곡된 이미지를 강화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와 같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형화된 ‘성’ 편견을 반복해서 그대로 보여주게 된다. 이점을 통해 언어를 통해 한국인이 공유하는 의식, 문화, 차별을 알 수 있었다. (비단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남성은 말하지만 여성은 쫑알거린다(스페인), 여성의 입은 악담의 보금자리이다(몽고), 여성은 긴 머리카락과 그것보다 긴 혀를 가진 동물이다(러시아)와 같이 세계적으로도 여성의 수다를 부정적으로 규정짓고 있었다. 다만 남성의 수다는 ‘수다’라고 하지 않고 ‘토론’ 혹은 ‘대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말이다.)
두 번째 표는 2008년 20대를 통한 조사 결과이다. 21살인 나로서는 자연스레 튀어나온 단어들이 교수님이 느끼기에는 많은 부분 변했다고도 하셨고, 실제로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여쭤보니 상당부분 남성과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을 의미하는 단어도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된장녀스러운, 시크한’과 같이 새롭게 등장한 단어들 외에도, 예전 세대에서는 ‘섹시한’이란 말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암묵적으로나 사용할 수 있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여성을 칭찬하는데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그리고 예전 같으면 ‘마초적인, 집단주의의’ 남성들이 각광받았다면, 요즘은 ‘가정적이고’ 여성에게 ‘헌신적인’ 따뜻한 남성상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실제로 70,80년대 남성에게 최고의 찬사였다는 ‘박력 있다.’란 말을 대중매체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접한 적이 거의 없다. 이 점을 통해 언어는 늘 변화하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4. 차이와 차별
문화 인류학 만큼 ‘차이’를 인정하고 공정하게 바라보려고 하는 학문은 없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탐구 속에서 타자를 한마디로 규정지을 때 ‘차별’을 할 위험성이 많은 학문은 없다. 합리적인 차별이 아닌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차별적인 요소는 분명 사라져야 한다. 성, 인종, 외모, 나이, 장애, 질병과 같은 생물학적인 차별에서부터 지역, 학력, 계층, 종교, 민족성과 같은 사회학적인 차별이 있다. 미인의 기준, 장애의 기준, 영남·호남, SKY대학과 같은 하나의 잣대를 대부분 우위에 있는 집단이 규정하고 지속적으로 이것이 ‘선’이라고 주입한다. (따지고 보면, 안경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장애인을 불쌍하고 도와주워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예로, 최근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를 통해 새롭게 부각되는 혼인제도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성욕→성교→임신→출산→양육’으로 단순화되는 인간, 아니 모든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현상 속에서 인간은 결혼 허용 범위인 통혼권을 만들고, 자연스레 종족번식의 목적을 위해 근친상간을 금기시(Incest Taboo) 했다. 그러한 가운데 일부다처, 일처다부, 일부일처등 다양한 혼인 형식들이 발달했고, 한국은 일부일처 사회이다. 일부일처제 하에서 간통의 본질은 부부 간의 성적 성실의무위반이자 정조의무위반이라는 점에 있다. 성실의무나 정조의무는 역사적으로 볼 때 남성중심의 부계혈통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일부일처제를 전제로 한다. 인간사회가 남성중심의 부계혈통주의로 발전하면서 부계혈통의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부일처제 아래서의 부부관계는 한편으로 당사자 상호간 혼인의사의 합치라는 계약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호간의 신뢰와 애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밖에도 실제 폴리가미가 불법이긴 하지만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처럼 ‘폴리가미’를 금지하는 게 헌법에 규정된 인간의 기본권에 위배된다며 묵인하는 현대 사회도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당장 사회 깊숙이 뿌리 박혀 있는 일부일처제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미혼모 가정, 동성 부부, 재혼(‘결혼 마일리지’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익숙해진 부분이지만), 다문화 가정과 같은 다양한 혼인 형태를 인정해주는 넓은 시야를 갖고 그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것이다.
다른 예로 대중매체에서 드러나는 피부색의 ‘차이’에 대한 ‘차별’ 역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KBS <미녀들의 수다> 공식 홈페이지 대문으로 쓰이는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전 세계 다양한 문화를 소개한다면서 등장하는 출연진은 전형적인 서구 미인들이 대부분이다. ‘백인들의 수다’라는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제작진은 이국적인 남미 여인들과 친숙한 아시아 문화권인 일본, 중국인 역시 출연 시키고 있다. 물론 제작자의 기준으로 보기엔 미인이 아닌,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없는 흑인은 배제하고 말이다. 물론 검은 피부의 외국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들에게 주입하는 키 크고, 하얗고, 늘씬한 ‘미녀’들의 부족한 한국문화의 이해와 언어를 대신해주는 ‘수다’ 역할이었던 것이다. 이국적인 문화나 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을 이야기하는데 피부색이 중요한 것인가? 이밖에도 이념상 인종주의를 반대하지만, 실제로 백인 북유럽 거주자라는 입장에서 본의와는 무관하게 한국인들의 깊은 ‘화이트 콤플렉스’(백인에 대한 열등감)의 수혜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할 말이 없었다고 하는 귀화지식인 박노자씨의 자조적인 일화 속에도 대중매체의 철저한 상업적 논리와 대중의 인종에 대한 편견을 느낄 수 있다. 식상한 말이지만 우리의 편협한 태도와 잘못된 인식을 꼬집는 말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 말로 끝을 내본다. “우리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입니다.”
5. 경제에 목매는 우리 삶의 미래
21세기 한국은, 아니 세계는 경제 성장에 목매고 돈에 웃고 돈에 울고 있다. 돈으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고, 선진국에서는 음식을 버리는데 돈을 쓰지만 빈민국에서는 음식을 먹지 못해 죽음까지 맞이한다. 행복=능력/욕망인데, 사람의 욕망은 무한하다. 그래서 늘 과시 소비를 하고, 남보다 더 잘나기 위해, 좀 더 편리하기 위해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낭비한다. 대표적인 예가 에너지 소비에 관련된 우리의 자세이다. 세계 주요 산유국은 45개국이고, 석유 생산정점을 지난 나라는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해 36개국이다. 이를 대체해줄 대형 유전이 발견되지 않은 지금 생산 정점을 지나지 않은 나라는 9개국뿐이다. 이러한 사태에서도 많은 이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보다는 개인 자동차를 선호하며, 불필요한 전력을 낭비하고 있다. 그러면서 경제 성장, 경제 회복을 외치며 단순히 돈이 많은 사회가 분명 앞선 사회가 아닌데도, 금전적인 가치를 진보의 잣대로 삼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다는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나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얻지 못하는 것은?’, ‘돈이 하나도 없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은?’이라는 수업시간의 질문을 통해 우리 마음 속 행복과 만족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시간, 추억, 행복, 기억, 경험, 사랑과 같은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소비’가 아닌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는데 있어 돈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양의 돈은 더욱 사람을 탐욕적이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소위 고품격의 재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추억, 기억, 시간, 우정, 사람 사이의 정은 분명 세상을 살아가는데 더 큰 힘을 발휘 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살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살림살이의 근본구조를 돈의 논리가 아니라 삶의 논리에, 이윤의 논리가 아니라 필요의 논리에 맞추어야 한다. 돈의 논리는 양의 논리이지만, 삶의 논리는 질의 논리다.
수업 자료 중에서 ‘대안 경제와 공동체 사회’ 속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 중 일화 부분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대량 구입을 통해 할인을 받고자 한 서구식 경제 개념에 입각한 질문에 시장의 노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 나와 있는 거요. 그런데 한꺼번에 다 몽땅 팔면 돈은 벌겠지만 그걸로 내 하루는 끝이요.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소.’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려가는 21세기에 이러한 삶의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쁜 가운데 리듬을 찾고 참된 인생을 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합리성이 아닐까?
속도 혁명으로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묶어내는 KTX에서부터 드넓은 밀실에서 심신을 나른하게 이완하는 찜질방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현장은 우리가 늘 부딪히고 목격하는 대상이다. 그 하나하나가 문화 읽기의 생생한 텍스트들이다. 왜 생활공간에 주목하는가 1990년대 이후 문화 연구가 활발해졌지만, 외국 이론 위주의 추상 담론으로 치우치면서 정작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을 읽어내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고 본다. 난해한 개념의 과잉 속에서 사회와 문화를 정밀하게 포착하는 언어는 오히려 점점 빈곤해져왔다. 우리는 해석되지 않은 변화들에 정신없이 휩쓸리며 살아간다. 생각하는 힘을 키우려 도입한 논술에서도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는 영역은 비좁은 편이다. 이 책은 생활세계의 다양한 현장들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방문하면서 나를 만나는 기행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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