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니체전집 13
프리드리히 니체 / 책세상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결국 미쳐버린 철학자, 자기 민족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한 당당한 독일인, 쇠망치로 하나하나 부패한 관념을 깨부순 용기있는 선구자, 신이 죽은 사회에 초인이라는 개념으로 등장한 자기 찬미의 일인자. 니체를 처음 만난 나는 온전히 그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에 대한 환상은 부끄러울 정도로 무지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 나는 니체의 사상이 아닌 니체의 이미지를 좋아했었나 보다. 초인 개념을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선구자로 이해했고, 단순히 그의 사상을 느끼지 않고 외우려 했다. 마치 쇼펜하우어 - 염세주의자, 니체 - 니힐리즘, 허무주의처럼 달달 외우는 고등학교식 암기에 익숙해져 나는 정작 니체가 제시한 낙타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철학적 의미를 곱씹으며 읽어본 니체의 저작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무척 술술 읽히면서도 무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남겨준 니체 철학의 진수가 담긴 난해한 책이었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로 출발하여 의지의 과잉 상태를 진단하며 이를 극복하려 한 것처럼 니체 또한 사전적 의미의 허무주의자는 아니었다. 쇼펜하우어의 소극적인 허무주의와는 달리 니체는 양가성을 지닌 허무주의를 추구했다.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허무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삶의 긍정 단계로 나아갈 힘을 지닌 개념이었다. 그러면서 함께 등장하는 영원회귀, 위버멘쉬 개념은 바로 니체 스스로 극찬한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방대하게 담겨있다.

 

그의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초인개념이었다. 단순히 타인보다 강한 인간, 그래서 그들에게 진리를 설파하고 지도하는 인간의 뉘앙스가 풍기는 단어의 외면에만 너무 집중했다. 하지만 극복인, 넘어가는 인간, 혹은 위버멘쉬(Übermensch)로 번역된 니체가 하고 싶은 말은 전혀 달랐다. 벗어나며 동시에 이행하는 위버멘시는 하나의 메타포적인 개념이었고 니체가 거듭 주장한 디오니소스적 인간, 힘에의 의지 개념이 응축된 성질이었다. 삶의 허무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긍정을 통해 창조하는 과정 중의 인간. 그것이 진정한 위버멘쉬, 니체가 자신의 그림자로 내세운 차라투스트라의 등장 이유였다.

 

주인공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와 대중에게 설교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최우의 인간들은 초인을 비웃으며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권위라는 무서운 벽에 가로막혀 더 나아가기를 주저하는 세계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확고한 진리, 영원불멸한 가치, 절대적인 도덕을 단호하게 거부한 니체는 정신의 3단계 변화를 제시한다. 우선 낙타의 단계는 무거운 짐을 잘 견디며 모든 시련을 견뎌낸다. 대표적으로 내세를 강조하는 이란 가치를 등에 업은 낙타는 사막에 도착해 사자 단계로 나아간다. “너는 해야 한다는 가치를 부르짖는 용을 맞아 사자는 비록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창출한다. 하지만 니체는 약탈하는 사자가 다시 마지막 아이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며 망각이다. 새로운 시작이며 유희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자기 자신의 의지에 대한 긍정을 설명하며 니체는 아이 단계를 통해 영원 회귀, 그가 주장하는 긍정 철학의 힘을 제시한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아찔했다. 시험 기간에 찾아온 과제와 조모임의 압박이 영원히 돌고 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나는 장난스러운 생각이지만 삶과 밀접한 철학자 니체가 가지는 의미를 여기서 제일 많이 느꼈다. 위와 같은 니체의 생각을 따르면 현재의 고통 혹은 행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수십 년, 수백 년, 혹은 수천수만 년이 지나도 영원히 반복된다. 생각해보면 영원회귀 개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르침을 받았던 기본 통념과 상당히 상충한다. 교회에서는 지금 지금의 고통과 수난을 인내하고 기도하면 행복이 넘치는 천국이 우릴 기다린다고 말한다. 비종교인인 나는 들을 일이 없는 이야기지만 학교에서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고등학교 시절 모든 것을 제쳐놓고 대입이라는 하나의 달콤한 목표를 위해 책상 위에만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낭만이 넘친다는 대학교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학 입학이란 목표가 대기업 취직이란 글자로 바뀌었을 뿐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로 하는 일은 그대로였다. 아프고 슬프고 답답하고 괴로운 현실을 애써 미래에 다가올 성공을 그리며 자위하는 듯했다.

 

과연 지금 내 눈앞에 삶을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포기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지금까지 모르면 물었고, 참으라면 참았다. 하지만 고통이 가득한 현실에 그만 무릎 꿇고 낙타처럼 더 무거운 짐을 요구하며 살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삶, 가치 있는 삶이 과연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꼭 들어맞는가? 아니 들어맞아야만 하는가? 니체처럼 모든 권위에 위풍당당하게 맞설 자신은 솔직히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운명애(amor fati)의 용기를 가지고 삶을 긍정하며 매 순간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야겠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괴로움이 가득한 삶에서 긍정적인 힘을 부지런히 찾으며 미약한 인간에서 나아가는 인간으로 달려야 하지 않겠는가? 짜라투스투라의 충고를 기억하며 나의 목적의식이 흔들릴 때마다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 니체를 만나야겠다.

 

삶은 괴로움일 뿐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데,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삶이 끝나도록 하라! 괴로움일 뿐인 삶이 끝나도록 하라! (.....) 만일 그대들이 좀 더 삶을 믿었더라면 그대들은 자신을 순간에 내맡기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대들은 기다릴 여유도 없고, 게으름을 부릴 만한 여유도 갖고 있지 않다!“

오 인간이여! 주목하라!

깊은 한밤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잠들어 있었다. 잠들어 있었다.

나는 깊은 꿈에서 깨어났다.

세계는 깊다.

낮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다.

세계의 고통은 깊다.

쾌락은 마음의 고뇌보다 더 깊다.

고통은 말한다. 사라져라!

그러나 모든 쾌락은 영원을 원한다. 깊고 깊은 영원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조주의와 그 이후 살림지식총서 289
김종우 지음 / 살림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거듭된 왕따 사건이 터지며 여러 사람이 하나같이 지적하는 원인이 있다. 바로 학교 공교육 ‘구조’의 문제. 왜 우리는 개인의 죽음을 구조 탓으로 돌리는 것일까? 법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그는 자율이 아닌 타율, 사회 구조의 부조리 때문에 이러한 일을 저질렀다고 변호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이성을 지닌 인간의 주체가 핵심이었는데 과연 이러한 논의는 어디부터 시작된 것일까? 1950년대 사르트르가 이끈 실존주의의 빈자리를 채운 구조주의의 논의에서 우리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구조주의는 특정 학파, 철학적 운동이 아니었기에 동질성을 찾기는 어렵지만 동일한 사유 모델을 사용한 방법론이란 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주체의 해체, 분열에 주목하며 현상 뒤에 보이지 않는 구조에 주목하는 특징을 지녔는데 인류학, 정신분석학, 신화학, 역사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명을 이루고 발전해왔다. 모든 것을 전체라는 체계 속에서 보려고 시도한 이들은 표층은 심층의 표현이라 생각했다. 마치 창백한 ‘안색’에서 좋지 않은 ‘건강’을 엿볼 수 있는 인간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언어학의 창시자 소쉬르, 구조주의적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있다.

 

직접 ‘구조’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고 ‘내적 체계’란 단어를 썼지만, 소쉬르는 언어학, 그리고 구조주의의 시작을 알린 언어학자였다. 그는 언어를 하나의 자율적인 체계로 보고 그 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보편문법을 탐색했다. 우선 기존 언어학의 역사성, 어원, 문법, 의미론을 연구한 ‘통시성’ 대신 그는 ‘공시성’을 학문의 법칙으로 삼았다. 언어의 현 상태, 지금 행해지는 결합, 관계, 배열에서 그는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자연스레 ‘랑그는 파롤에 선행한다.’라는 명제가 도출되는데 두 개념은 이와 같다. 랑그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의사소통의 체계, 즉 구조적 규칙, 심층, 언어, 본질로 대표되는 개념이다. 반면 파롤은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발화되는 언어 행위, 표층, 발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소쉬르는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 언어는 기호들의 체계라고 분석했다. 언어 역시 기표, 기의로 구분할 수 있다. 기표는 시니피앙, 음성기호, 즉 표시하는 것이며 예를 들면 우리가 말하는 개, dog, 犬이 모두 이러한 예다. 그리고 기의는 시니피에로 의미, 개념, 표상, 표시되는 것으로 실제 생물 개를 지칭하는 것이다. 기표는 기의의 옷이 아니고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인 결합에서 형성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요소들과 맺는 관계와 차이에 의해서만 기호를 규정 할 수 있다. 마치 상병이 병장과 일병 사이, B0가 B+와 B-사이에서 차이에 의해 규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적 성과를 발전시켜 사유해보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동일성보다는 차이가, 실체보다는 관계가 중요해진다. 바로 기호체계의 닫힘이란 특성 때문이다. 이런 논리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던 인간이 언어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인간의 주인이다. 이러한 생각은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묘하게 일치하지 않는가? 언어 ‘구조’ 속에 갇힌 인간. 하지만 랑그가 과연 인간 주체와 무관한 개념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개’라는 말이 누가 처음 말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인간이 만든 발화는 아닐까? 언어를 뛰어넘는 추상적인 체계에 몰두한 나머지 구체적인 현실에 동떨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언어 활동의 궁극 목적은 소통, 그중에서도 기호의 소통이 아니라 의미의 소통인데 너무 단순화된 이론을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도 가져본다.

 

그리고 레비스트로스는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는 심층에 주목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지질학과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유사성을 드러낸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구조주의는 의식되지는 않지만 여러 집합에 공통으로 작용한다고 본 그는 현상학의 반대편에 선 인류학자다. 특히 자연과 문화를 근친상간으로 구분하며 친족 관계를 연구했고, 나아가 신화 연구에 집중했다. 그가 말한 바로는 신화의 줄거리는 제각각 모두 다르지만, 배후에는 바로 하나의 대립 관계가 불변하는 같은 ‘구조’라고 언급했다. 또 인류학자답게 직접 체험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논의를 전개한 그는 변증법적 이성을 몽상이라고 비판했다. 눈으로 목격한 식민주의, 인종주의의 폭력성은 그에게 회의감을 주었다. 과연 역사는 규칙적 발전 과정을 따르는 것일까? 레비스트로스는 그것 역시 우연에 불과하며 인간 과학은 무질서와 우연한 연속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그는 미개와 문명을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며 ‘초합리적(super-rationalism)'이란 근원적 의식을 아마존 원주민에서 찾았다. 초합리적인 것은 바로 물질문명에 상관없이 모두가 공유하는 성질이며 그는 차가운 사회와 뜨거운 사회의 특징을 언급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구조주의는 반경험주의인 동시에 경험주의다. 표층의 관찰에 머물지 않고 경험을 뛰어넘는 심층에 대한 상상을 시도하는 점에서는 반경험주의다. 하지만 상상력으로 얻은 심층에 대한 가설을 다시 관찰을 통해 표층의 차원에서 재확인한다는 점에서는 경험주의다.

 

렇다면 과연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가 아닌 수동적인 지배를 받을 뿐일까? 마치 중세 시대를 암흑으로 지배했던 ’신‘이란 존재도 어찌 보면 인간에게서 자율적 선택을 지닌 주체란 위치를 빼앗아 간 구조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인간 정신의 역동성과 발전 가능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추상적인 것에 너무 빠져드는 흔적을 구조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창조적인 인간은 결국 스스로 구조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며 혹은 그 구조의 모순과 문제를 깨부수고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니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오로지 실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구조‘라는 하나의 이념은 그저 인간에게 유용한 핑계거리로 전락할 뿐이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면죄부로 악용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척박한 한국 스포츠계에서 난데없이 등장한 김연아와 박태환. 이들은 구조주의의 사유대로 필연적으로 등장한 것이며 언제가 나올 존재였을까? 아니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억압하는 하나의 구조,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일까? 후자가 우리 인간에게 더욱 유용하고 시사 하는 바가 큰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구조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무엇보다도 구조주의가 구조 개념 자체를 순전히형식적인 차원에서만 보려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구조의 형식성에 긴장과 역동성이라는 개념을 덧붙이려 한 뒤랑와 상형구조주의는 인간정신을 이해할 때에 주체와 객체, 기호와 의미, 구조와 현상을 동시에 감싸 안으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근현대 불교사상 탐구
신규탁 지음 / 새문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재 대한민국 불교를 바라보며.

- <한국 근현대 불교사상탐구> 1~4장

 

‘인연, 이판사판, 찰나, 아비규환, 아수라장, 업보’같이 우리가 흔히 쓰는 일상 언어에서도, 소중한 문화유산, 유적지가 가득 담긴 국사책 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는 우리 삶에 매우 깊숙이 녹아있는 존재다. 나는 특히 불교에 묘한 친근함을 느끼곤 했다. 종교적 믿음이나 강한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항상 내 주위에는 불교가 가까이 있었다. 학창시절 개량한복 교복에 바짝 자른 동자승 머리를 하고 우리는 ‘영통사’ 앞에서 은은히 풍겨오는 향냄새에 취해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대학교에 들어와 혼자 사는 자취방도 바로 봉원사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수능 대박 기원 플랜카드가 걸리고 부처님 오신 날이면 사람이 북적거리는 신기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여전히 불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무지에서 오는 경이로운 단계를 벗어나 ‘한국 철학’ 수업을 듣고 책을 읽으며 한 꺼풀씩 불교의 참된 이면과 마주하다 보니 불편한 진실이 너무나도 눈에 보인다. 이권을 잡기 위해 폭행과 살생을 서슴지 않는 악랄한 급조승, 정치판과 다를 바 없는 돈 넣고 돈 먹기 식의 선거 제도, 전통을 제대로 계승하지 않고 멋대로 바뀌어버린 예불문, 일제에 맞서 싸우기만 했다는 거짓된 환상과 달리 근대화의 흐름에 맞추어 변질한 일제강점기 불교. 하지만 날카롭고 신랄한 비판으로 진정한 전통과 마주하는 순간 불쾌함이 아니라 오히려 편안함마저 드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역사를 바로 보는 순간 현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더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책을 한 장씩 넘기며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종단의 출현, 불교 관계 법령, 불경의 한글 번역, 대웅전 예불문에서 엿볼 수 있었다. 한국 불교는 태고사 초대 주지 한암 중원 선사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조계종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사찰령’, ‘불교재산관리법’. ‘전통사찰 보존법’의 영향력 아래 휘둘리는 타율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다. 특히 한국 불교는 중국의 법 전통에 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던 시기 도첩, 선발 시험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조선 시대 선종은 『경덕전등록』,『선문염송』, 교종은 『화엄경』,『십지론』을 시험 과목으로 삼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의 통치를 받으며 정치권력의 개입에 취약한 모습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선교 일치적 요소가 많은 서적을 대상으로 하는 경향성을 보인 경전 번역이나 전문적으로 전통과 단절된 예불을 비교하는 부분도 유익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이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부분은 ‘불교의 민중화 운동’에 앞장선 용성 선사의 노력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산중불교로 중생과 단절된 불교의 한계를 직시하고 일본의 억압을 당당히 거부한 민족대표였다. 특히 어려운 한문으로 진입 장벽이 높은 불경을 익숙한 한글로 번역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의 말을 찾아보니 단순히 불교가 아니라 21C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점도 많았다.

 

“오늘날 철학, 과학, 천문학, 정치학, 경제학 등 배울 것이 많은 시대에 한문만을 가지고 수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문명발달의 장애만 될 것이며, 설사 수십 년 동안 한문 공부를 하여서 큰 문장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종교의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또 중국 사람들은 중국 글을 좋아하나 우리 조선 사람들은 조선 글이 적당할 것이니 내가 만일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전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 연구의 한 나침반을 지으리라.”

 

글로벌을 외치며 단순히 영어 강의 비율에 목메는 대학교가 겹쳐지지 않는가?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기괴한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영어’라는 문턱에 다시 발목 잡히며 진정한 진리에 도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그의 깊은 통찰을 다시 마음속에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용성 선사는 민족 문제에 적극 참여하며 교묘하게 탄압을 이어나가는 일본 불교에 맞서 싸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웠다. 익히 유명한 한용운과 함께 1919년 3.1 독립선언의 대표로 활동했고,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는 일을 허용하는 일제의 전략에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며 한국 불교 정화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런데 과연 현재 한국 불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용성 선사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나가고 있을까? 무소유는커녕 탐욕에 가까운 기업형 사찰의 이해 타산적 경영 전략, 주지 스님의 막강한 권력 속에 무시당하는 승려의 인권은 분명 수십 년 전 불교의 썩은 살을 도려내려 했던 용성 선사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석가탄신일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도 흉흉한 소식이 들려온다. 조계사 주지 토진스님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했는데 사실 백양사 인근 호텔 스위트룸에서 벌어진 밤샘 도박과 관련이 있다고들 본다. 가장 깨끗하고 맑아야 할 일선 승려의 마음에 탁한 먼지가 쌓이고 더럽게 얼룩진 탐욕이 불교 신자가 아닌 내가 보기에도 부끄러울 따름이다.

 

결국, 우리는 용성 선사가 거듭 주장한 ‘법성(法性)’에 주목해야 한다. 법성 사상은 모든 사람은 누구나 본디 선천적인 양심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어리석음에 가려져 우리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는 게 기본 입장인데 어리석음에 따라나오는 욕심을 관찰하기 위해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부질없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리 승려들은 오히려 참된 진리를 거짓된 믿음으로 바꿔치기를 했다. 그들은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 수많은 중생이 자유롭게 불성을 발휘하는 길을 오히려 막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 누구나 품고 있는 양심이란 작지만 강한 힘에 주목하며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당연히 맑은 정신을 품기 위한 건강한 육체를 위한 노력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아프거나 나약한 건강 상태라면 누구나 유혹과 거짓에 쉽게 넘어가는 것이 또 미약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라 심오한 부처의 가르침과 수행 방법에 무지하다. 하지만 절에서 풍기는 이유모를 편안함과 청량함, 포근함이 좋다. 흉흉한 소식이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지만 밝게 웃는 아이를 보며 터져 나오는 맑은 미소도 어찌 보면 법성 사상의 온전한 나타남이 아닐까?

 

피 땀 흘려 한국 불교를 일궈낸 다섯 사람

- <한국 근현대 불교사상탐구> 5~8장

 

용성 진종, 한암 중원, 운허 용하, 운암 성숙, 태허 홍선. 제2부에서는 대한민국 불교를 위해 피 땀 흘려 노력한 위대한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본다. 일본에 의한 타율적인 근대화 과정, 미국 군정, 독재 정권의 억압을 겪으며 대한민국, 그리고 불교는 격동의 시기를 겪는다. 종교로서 주어진 임무보다는 권력과 밀착하여 본래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비구-대처 간 싸움은 끝이 없어 보였다. 급조승으로 종단 권력을 빼앗고 절대 권력으로 부패한 주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다섯 명의 청정한 수행자는 자신의 신념과 종교적 사명감으로 나라를 위해, 나아가 우리 인간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들이 피와 땀으로 지켜낸 우리나라, 우리 불교가 수십 년이 흐른 2012년 과연 어떤 모습인가? 그들이 일궈놓은 밭에 부지런히 새싹을 틔우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최근 (문제 회피식으로 늘어놓는 변명을 들으니 더 황당하고 화나는) 승려 도박, 성매매, 음주 사건을 비롯해 하나의 대기업이나 다름없는 몇몇 사설 사암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세속의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은 수도자의 모습은 사라진 21세기 불교계는 다섯 승려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떠올려야 한다.

 

우선 ‘근대화의 선각자’ 용성 진종은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대각교 운동을 펼치며 법성 사상을 이야기한 스님이다. 그는 깨달음은 화두 참구를 통해서 얻었지만, 그 깨달음에 대한 이론적 설명 작업은 화엄의 법성의 교학사상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런 토대를 가지고 용성 진종은 새 불교 운동을 펼치며 미신적 성격을 철폐하려 노력했다. 자연스레 한국 불교에 수많은 제자를 남기며 영향력을 끼쳤고 남녀평등, 제가 불자 대상 한글 법회를 열며 근대에 걸맞은 불교운동을 이끈 위대한 인물이다.

 

그리고 ‘친절한 간화 선승’ 한암 중원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소통하는 스님이었다. 그는 반조와 간화에 특별한 우위가 없으며 수행 방법상 큰 차이가 없다고 이론적 토대를 다졌다. 일단 ‘반조’는 빛이 반사되어 비치는 일로 마음을 쉬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일상과 인연이 있는 곳에서 그것들을 살피고 또 살피는 일이다. 인간은 6경(색, 성, 향, 미, 촉, 법)을 우리의 의식 작용에 의지해서 지각하지만, 이는 생, 주, 이, 멸하는 것으로 허망하고 영원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허망한 의식 작용을 잠시 멈추고 여래장 자성청정심, 불성, 본성, 자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간화’는 간화선, 즉 화두를 관찰하는 선을 말한다. 선은 당에서 시작했지만 간화선은 남송에서 시작되었다. 쉽게 말해 화두가 제 기능을 하려면 골똘하게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암 중원은 ‘무자’화두 뿐만 아니라 다양한 화두를 인지했고 내가 나를 살펴볼 때 마음이 들뜬 상태가 아니라 차분해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 번째 ‘겸손한 화엄 학승’ 운허 용하는 애국자이자 교육자이며 수행인이자 지식인이었다. 조선 시대, 일제까지 내려오던 법성 불교를 계승 발전시키며 현대식 교육에도 앞장선 인물이다. 동국역경원을 창설해 대장경을 번역하려 했고 중고등학교를 건립하며 바른 가치관 성립에 큰 도움을 준 업적을 남겼다. ‘차 마시고 경전 읽고 번역하던 중’ 운허 용하는 경을 보고 그것을 실천하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바르게 판단 가능하므로 좋은 기운, 습관을 자꾸 쏘여주고 마음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생각이었다. 나아가 우리말로 번역하여 부처님의 본의를 충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며 중생들을 위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다음으로 항일 구국 운동을 펼친 사회주의자, 봉선사 출신 좌파 노선의 ‘민주사회주의 애국자’ 운암 성숙이 있다. 그는 ‘선국가 후이념’을 신조로 계급혁명보다 민족해방을 우선시했다. 사회주의 노선이라 남북 대치상황에서 조금 다루기 까다롭거나 껄끄러운 부분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근대화처럼 역사적 사실로만 마주할 필요가 있다. 그가 남긴 독립을 위한 업적이나 자유와 행복을 위한 노력,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평등하다.’, ‘세속의 영예보다는 보편적 진리추구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불교적 사상을 훗날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승속 일체의 종단 설립장’ 태허 홍선을 기억해야 한다. 승려의 결혼 여부는 중요하지 않고 일본의 영향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는 담대한 태도의 승려였다. 그는 현재 민중들의 요청과 새시대의 감각을 수용하지 못하는 불교 현실을 비판하며 법화경 신앙을 해답으로 들고 나왔다. 그는 법화경의 맥을 찾으려 대각국사 의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정당성을 탐색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수행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태허 홍선은 대한불교불입종, 즉 법화경을 믿는 종단, 승속 혼연일체가 되는 대중의 종단, 자아완성, 생활운동을 전개하는 새로운 길을 닦아놓아다. 이러한 움직임은 겨레 사랑 사상의 고취와 한국 불교의 법맥을 계승하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토대를 굳게 다졌다는 의의를 지녔다.

문득 공부를 마치고 나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공부를 해볼까 생각했다. 신규탁 교수님이 매번 강조한 ‘훈습’, 좋은 향기가 몸에 배어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갖 잡념과 불안, 고민이 조금은 수그러들지 않을까 하며 복을 비는 마음으로 말이다.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생각을 비웠다.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며 차분하게. 하지만.....

 

힘들었다. 5분이라는 시간조차!!!!

 

잠시였지만 스마트폰이 손안에 없다는 생각에 초조해졌고 머릿속은 온갖 잡생각으로 가득 찼다. 조금 지나자 시험 기간에 누적된 피로 탓인지 졸음까지 몰려왔다. 침대에 뒹굴며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외부에서 오는, 그리고 내부에서 오는 훈습에 소홀했는지 한심함을 느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고, 훌륭한 책을 읽으려 애썼지만 김이 제대로 내 마음속에 배어들지 않았나 보다. 아니 지금까지 마주한 것들이 단순히 나의 쾌락을 충족시킨 탁한 기운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러다보니 진실한 마음에서 내 마음속 소리에는 더욱 무관심했단 걸 깨달았다.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이라고 착각하며 항상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했다. 지금 내 몸과 마음속에 배어있는 탁한 기운, 욕망의 향기를 서서히 씻고 내 마음 속 진정한 울림에 귀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쉬지 않고 노력해야한다. 더 나아가 나를 넘어 가까운 가족, 친구, 선생님, 이웃에게 기분 좋은 향기를 전하고 이 세상에 하나 뿐인 자신의 소중함, 무한한 가치를 일깨워줘야겠다. 이게 진정한 불교의 의미가 아닐까? 우리 모두는 부처란 말처럼!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는 연속적이고 중층적이라는 것이다. 겉 토양을 보면 미국식의 현대판인 것 같지만, 그 겉을 한 겹 걷어내면 그 속에 일본 제국주의 흙이 나오고, 이 흙을 한 겹 걷어내면 그 속에는 유교의 봉건성이 나오고, 이 흙을 한 겹 더 걷어내면 그 속에는 불교 사상이 깔려 있다. 바닥을 다시 캐보면 그 속에는 긴 세월 쌓여온 무속적인 삶의 흔적들이 깔려 있다. 때로는 이런 역사의 퇴적물이 한데 뒤섞여 현재에 동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속에서 불교는 ‘유교적 봉건‘의 비판과 극복에도 소홀했고, 일제에 의해 주도된 ‘뒤틀린 근대‘의 비판 극복에도 역시 소홀했다. 역사는 중층적이고 연속적인데도 말이다. 이런 복합적인 공동체의 하나가 현재의 한국불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르주 바타이유 - 저주의 몫. 에로티즘 e시대의 절대사상 20
유기환 지음 / 살림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르주 바타이유는 프랑스 철학계의 아웃사이더, 이단아이자 저주의 철학자이다. 그의 책 저주의 몫, 에로티즘은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쉽지 않다. 단순히 문체적, 철학적 논리를 떠나서 사유 자체의 충격성, 급진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기본적 물음에서 출발하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누구도 꺼내지 않은 금기시된 문제들을 철저하게 까발리는 사유를 했다. 사르트르 이후 인간 의식의 문제를 급진적으로 해석해나간 그는 철학과 문학을 넘나들며 위반의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대표작 저주의 몫에서 소비에 대한 본질적, 포괄적 물음을 던졌다면, 문제작 에로티즘에서 그에 대한 사례를 독창적으로 분석하며 인간이란 금기와 위반의 존재란 것을 논한다. 이 책은 두 책의 연관성을 차분하게 밝혀나가며 그에 따르는 의미, 한계, 결과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었기에 개론서로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 혼란스러운 정신을 추스르고 바타이유라는 매혹적인 한 인간에 다가가는데 이 책만큼 훌륭한 지도는 없을 것이다.

 

바타이유가 주장한 저주의 몫은 쉽게 말해 잉여. 생산과 축적을 미덕으로 삼는 제한 경제와 달리 바타이유는 소비와 대가 없이 주고받는 선물을 중요시하는 일반 경제란 개념에 주목한다. 에로티즘도 일반 경제를 매우 잘 드러내는 한 사례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인간 사회는 무한하게,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태양 에너지 때문에 과잉이란 필연적 부산물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러한 잉여 자원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실되고 소모되어야만 한다. 마치 비만 어린이가 끊임없이 영양을 섭취하고 이를 적절한 방식으로 분출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병에 걸려 죽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생명 보존이나 재생산이 아니라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소비에 씌여진 저주를 지우려고 발버둥쳤다. 즉 과잉 에너지의 지혜로운 파괴로 지구라는 한 제한된 공간에서 현명하게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과거 과잉 에너지에 대한 지혜로운 파괴의 사례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고대 사회의 비생산적 소비를 포틀래치나 쿨라같은 증여교환 체계, 희생제의, 티베트의 라마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굳이 머나먼 고대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올림픽, 월드컵, 미친 듯이 춤추고 노래하는 락 페스티발, 삼바 축제를 보더라도 잉여 에너지를 현명하게 소비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더 가까이는 학창 시절 억압과 규율에 얽매어 있는 학생들에게 체육대회라는 단순한 분출구를 마련해주면 모두가 신 나게 즐기곤 하진 않았는가? 물론 축적 지향의 기획사회 이슬람 사회가 여전히 존재하고 세계 1,2차 대전으로 파국에 이른 결과도 인지하고 있다. 전쟁도 과잉 에너지를 소비하는 방식 중 하나지만 그렇다고 바타이유가 전쟁광이거나 전쟁 옹호론자는 분명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쟁은 축제와 달리 비생산적 소비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혀 개인, 사회, 국가의 이익을 철저하게 따지는 자본의 논리가 진행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모두 소비가 아닌 생산을 주된 쟁점으로 하기에 모순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 바타이유는 지혜로운 소비의 예로 마셜 플랜을 들고 있다.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미국이 과도한 성장을 멈추고 비생산적 소비를 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그는 이러한 정책에 찬성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무상 증여가 진정한 해답이 될까? 최근 경제 흐름, 국제 정세를 보더라도 이는 너무나 이상적이고 허무맹랑하다고까지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강자에게 도덕성이란 잣대를 들이밀며 행동을 강제하고 실현 불가능한 제안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왜일까? 99개를 가진 부자가 자기 몫을 나누기 보다는 1개를 빼앗아 100개를 채우고 싶어하는 것처럼 세계 강대국은 그리 인정이 넘치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냉정하며 이해 타산적이기에 바타이유의 외침은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한편 킨제이 보고서를 비판하며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을 순수한 비생산적 소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일단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 이성적 존재가 아닌 동물적 인간이라고 규정하며 논의를 진행한다. 물론 원숭이나 기타 동물들이 성적 흥분을 느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에로티즘의 유무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규정지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만이 발정기가 아닌 기간에도 쾌락 그 자체만을 위해 섹스를 원하며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간다. 그는 이러한 사유의 기원을 라스코 동굴 벽화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성기를 곧추세운 채 새의 얼굴을 한 남자가 상처 입은 들소 앞에 누워 있는 이 그림. 바타이유는 여기서 금기와 위반의 관능을 엿보았다. 인간 내부에는 강렬한 금기와 위반의 욕망이 상호보완적으로 존재한다. 마치 시소가 오르락내리락하지만 결국 붙어있는 하나인 것처럼 금기가 있기에 위반이 존재하고, 위반이 있기에 금기가 존재한다. 쉽게 우리 주변의 일을 떠올려 보자. ‘손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있기에 더 손이 가고, 그다지 놀 생각도 없었는데 공부 좀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더 게임이 아른거리지 않던가? 내가 간절히 가지고 싶던 50만 원짜리 가방도 정작 내 손안에 50만 원이 생기면 흥미가 시들어버리는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금기는 위반되어서야 비로소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고 위반은 금기란 하나의 경계 없이는 생겨날 수조차 없다. 이렇게 금기와 위반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제가 바로 에로티즘이다. 성에 있어서 보다 자유로운 프랑스에서도 섹스는 일정 수준의 금기를 간직하고 있다. 여전히 폐쇄적인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인간은 불연속성을 지닌 존재로 고독하지만 끊임없이 연속성을 갈망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성을 향한 무한한 사랑은 바로 금기시되는 생식에서 가장 처음 발생한다.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인간을 비로소 존재 가능한 상태가 되며 새로운 연속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연속성을 구현하는 새로운 삶은 정자와 난자의 독립적인 것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작은 죽음, 내적 체험에서 드러나는 죽음의 심연을 맛보는 것이다.

 

이렇게 바타유는 에로티즘은 연속성을 지향하고 이는 육체의 에로티즘, 심정의 에로티즘, 신성의 에로티즘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역설의 진실을 가진 에로티즘. 이성이란 존재를 망각하고 상대방 몸 안에서 완전한 상실이 이루어지는 육체의 에로티즘 순간에 인간은 금기를 위반하는 쾌감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쾌감이 충족되어 연속성을 구현한다고 느끼면 자연스레 심정의 에로티즘이 수반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조금 의아한 느낌을 받았다. 바타유가 말했듯이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이중성, 동물적 특징의 재조명에는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극단화된 사유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 쾌감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완전히 개인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금기를 넘나드는 위반에서 오는 짜릿함을 맛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며 갖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럽히는 행위, 즉 꽃을 꺾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는 단순히 개인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수많은 타자가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사는 곳이다. 금기란 것이 상당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며 관습적이라면 그것은 더욱 사회 구성,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제도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 단순히 육체적 에로티즘을 위해 타인을 수단화하고 순간의 연속성을 맛보고 죄의식에 빠지는 것은 올바른 일일까? 그리고 가능한 일일까? 바타유가 지적했듯이 결혼이란 제도 역시 성행위를 전제로 하며 하나의 금기를 제공한다. (첫날밤을 허락받은 강간이라고 표현한 부분 역시 상당히 남성중심주의적이며 위험한 논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원문을 읽지 않고 단순히 해설서를 읽으며 오해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를 위반할 때 오는 쾌락만이 진정한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혼외정사에 대한 흥분도 존재할 수 있지만, 안정적인 가정에서 느끼는 안락함, 편안함, 그리고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만족감도 분명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육체적 에로티즘이 오히려 심정의 에로티즘에 이어지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단계라고 생각한다. 사람 대부분은 섹스에서 오는 행복을 육체적, 생물학적 오르가즘, 화학반응이 아닌 사랑하는 이와 하나 되는 정신적 느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바타유는 이러한 사유 역시 이미 금기에 길들어 위반의 매력을 애써 모른 체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정신적 사랑이 빠진 단순히 육체적 에로티즘에는 쉽게 공감을 하지 못하겠다. 금기를 위반할 때 수반되는 짜릿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금기를 지킬 때 느끼는 뿌듯한 감정 역시 인간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의 행복을 미루는 것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지금 당장 눈앞에 놓인 대상을 맹목적으로, 그것도 철저히 이기적으로 대하고는 싶지 않다. 개연적, 혹은 직관적이만 더 큰 행복이 숨어있다면 위반의 유혹보다는 금기의 매력이 내게 더 강하게 다가오고, 마침내 언젠가는 진정한 의미의 비생산적 소비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순간이라고?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공을 들인다고 해도 에로티즘도 죽음도 인간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수없이 강조한 대로 성과 죽음, 즉 인간의 삶은 실로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따. 바타이유가 사디즘의 화신과도 같은 질 드 레와 엘리자벳 바토리의 이야기를 눈물 없이 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가해자에 대한 동정 때문도, 희생자에 대한 연민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폭력과 관능이 맺는 엽기적 모순의 관계 때문이다. 인간이란 진정 무엇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의 발견 - KTX에서 찜질방까지 문지푸른책 밝은눈 6
김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내 삶속의 문화 인류학

 

문화인류학의 정의부터 살펴보자면 특정 집단을 장기간(이상적으로는 일년 또는 그 이상)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참여하면서 주민들과 면접과 대화를 통하여 그 집단이 가지고 있는 환경에서부터 관계망과 구조 그리고 의미구조까지 종합적으로 연계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학문의 특성상 현지조사가 많은데 접하는 범위가 다르므로 여행과는 다른 문화충격이 존재하며 함께 생활해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언어장벽이나 주관적인 곡해의 위험성이 있으며 실제로 서구가 일방적으로 비서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조작이나 오해의 문제가 있어 왔다. 단순히 원시는 곧 미개, 야만이라고 규정지으며 문명과는 반대되는 의미로 말이다. 다시 말해 보고 싶은, 혹은 보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이념, 종교와 같은 부수적인 요소에 의해 조작, 연출의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수업시간에는 현지조사를 넘어 좀 더 넓은 의미의 문화인류학을 가지고 수업을 진행해나갔다. 우리네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참신한 시각으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방법을 하나하나 배워 나갔던 것이다. 그 예로 직접 그려보았던 신촌지도는 대학에 따라, 혹은 같은 대학 재학생이라도 통학 수단에 따라, 또한 같은 길을 걸어도 집중하는 분야에 따라 확연하게 달랐다. 그리고 약도를 기억 못해도 길을 가는데 지장이 없고, 또한 키보드 자판을 그리지는 못하지만 능수능란하게 타자를 치는 우리의 모습에 새삼 놀라며 안목지인지지를 깨달았다. 그동안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배운 대로 본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또한 문화인류학은 여러 분과 학문들과 서로 만나는 총체적 접근을 사용하며, 인류의 라이프스타일과 라이프사이클에 일대 변화를 초래한 디지털 신천지 개벽속에서 문화의 중요성과 함께 더욱 각광받는 학문이 되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도 보이 소프라노나 인도, 중남미의 노래, 뮤직 비디오등 다양한 자료들을 보며 문화의 다양성과 가치를 조금이나마 느껴보았다. 인과율과 논리, 반복, 법칙성, 수학에 기반을 둔 자연과는 달리 인간, 특히 인간의 마음은 쉽게 예측이 불과하고, 적용이 힘든 부분이라 심리학이 그 점을 연구하는데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라는 점에서 문화인류학도 유사하다.

 

그밖에도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제품 이미지를 모아서 마음을 분석하는 방법(Metaphor Elicitation Technician)이나, 직원이 소비자와 함께 살며 불편한 점을 체감하고(Living It), 쫒아 다니며 분석(Shadow Tracking)하는 등 소비자의 마음을 읽기 위한 고객 조사 기법에서도 그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누가 핸드폰, 해리포터, MTV등의 성공을 예측했는가? 기본 욕구가 충족되니 욕구가 다양해진 인간 연구는 더욱 까다로워 졌고 그렇기에 인간의 행동과 심리, 그리고 메카니즘에 대해 주목하는 문화 인류학은 더욱 중요하고, 그 필요성이 커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과 늘 함께하는 문화를 타자와 비교하여 익숙한 것들의 문법을 정립하는데 그 맥락 속에서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문화 인류학은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2. 문과대 사물함 사태에 대한 나의 경험

 

10월 맑은 어느 날

수업이 대부분 종합관에 위치해 있는 터라 사실 귀찮기도 했지만, 수원에서 통학하는 내겐 위당관 사물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셈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덕지덕지 더럽게 A4용지가 사물함 앞을 차지하고 있다. 사물함을 철거할 예정이니 미리 책을 빼달라는 내용이었다. “아 귀찮게..... 이 책들을 (비록 전공 책들이 아니라 슬쩍 훔쳐본 옆 사람의 책들보다는 훨씬 적었지만) 그럼 학기 중인데 어디다 보관 하라는 거야?” 투덜대며 책을 옮기고 나서 나는 사물함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106

 

교수님이 오늘따라 살짝 흥분 하신 것처럼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기 원하셨다. 문화인류학 특성상 워낙 다룰 내용도 많고 다양한데 무슨 일이지? 교수님은 지난 주말 겪은 황당한 일이라며 학생들의 의견을 물어보셨다. PPT속 쓰레기 같이 쌓인 책들과 사물함, 그것은 분명 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쓰던 친숙한 사물함이었다. 교수님은 저 책들이 모두 자원 낭비고, 분명 공지를 못보고 책을 빼지 못한 학생들도 있을 것이라며 필요한 사람은 사진도 준다며 연세춘추가 취재하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셨다. 또한 법학과 교수님에게 법적인 문제까지 물어보셨다니 꽤나 큰 충격 이셨던가 보다. 교수님이 저 사진 속의 피해자가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발표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내 마음 속에는 나는 뺐는데 뭐... 그러게 미리미리 좀 빼랄 때 빼지.” 이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1210

문화 인류학 수업을 다 끝내고 마지막으로 한번 모이는 자리에 가서 좋은 말씀을 더 들었다. 그리고 그때 던져진 화두, ‘자기의 삶을 가치 있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문득 사물함 사건이 떠올랐다. ‘나와 네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사회가 좀 더 건강하고, 아니 요즘 그렇게 강조하는 경제성이나 금전적인 부분을 떠나 유쾌한 사회 일 것인데 나는 너무 나 혼자만의 틀에 빠져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단순히 나는 피해 본 거 없는데’, 하는 마음가짐으로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양에서 말하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이기주의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뿐 아니라,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수많은 사물함 주인들, 그리고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뛰어야할 문과대 학생회, 언론의 역할을 하는 연세춘추까지, 모두가 이 사태에 침묵했다. 분명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른 길인데, 남 챙길 시간조차 없이 바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새삼 들었다. 특히 낭만과 에너지가 넘쳐야할 대학 캠퍼스에서 대학 조직이 비대해지고 공간이 변모하면서 모든 관계도 점점 소원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학교 측과 학생들이 조금 더 이야기를 했더라면, 사물함을 비우지 못한 학생들의 물건을 보관하는 식의 유연함을 보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커뮤니케이션 상에 있어서 화자의 존재, 청자에 대한 화자의 태도 등의 문제들이 고려된다면 간극은 메워지고 안타까운 일도 줄어 들 수 있을텐데 말이다.

 

3. 언어와 문화

 

 

+

-

믿음직한, 잘생긴, 멋진, 대범한, 너그러운, 인자한, 따뜻한, 부지런한

부정적인, 게으른, 불만투성이의, 탐욕적인, 간사한, 약삭빠른, 마초적인, 집단주의의

참한, 착한, 귀여운, 지혜로운, 예쁜, 섹시한, 밝은

소심한, 비관적인, 변덕스러운, 된장녀스러운, 시크한

 

인간이 타자를 바라보는 것이 문화라면 그러한 과정 속에서 언어를 통해 사회, 권력이 창출된다. 그만큼 언어는 단순히 의미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의사소통의 과정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실제로 수업시간을 통해 우리는 언어와 관련 지어 두 가지 설문을 받아보았다. 남자, 여자를 지칭하는 단어들과 긍정적, 부정적인 형용사들을 분류해 본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던 단어들이였지만 이렇게 시각적으로 구체화를 시켜보니 또 색다르게 느껴졌고 신기했다.

 

사장님

남편, 바깥양반

사내,

홀아비, 아저씨

산타할아버지

마법사

여인, 여사

마누라, 아내

여편네, 집사람

wife, 부인

안사람, 아줌마

계집,

여고괴담

마녀, 미혼모

미망인, 과부

 

 

첫 번째 표에서 여성을 지칭하는 분류가 더 많고, 그 단어들은 상당 부분 남성의 역할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의 직책에 따라 여인도 될 수 있고 여편네로 불릴 수도 있으며, 마녀, 년 등 욕으로 쓰이거나 부정적인 늬앙스를 띄는 것이 남성에 비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여성의 이미지에 정형화된 의식을 상투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왜곡된 이미지를 강화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와 같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형화된 편견을 반복해서 그대로 보여주게 된다. 이점을 통해 언어를 통해 한국인이 공유하는 의식, 문화, 차별을 알 수 있었다. (비단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남성은 말하지만 여성은 쫑알거린다(스페인), 여성의 입은 악담의 보금자리이다(몽고), 여성은 긴 머리카락과 그것보다 긴 혀를 가진 동물이다(러시아)와 같이 세계적으로도 여성의 수다를 부정적으로 규정짓고 있었다. 다만 남성의 수다는 수다라고 하지 않고 토론혹은 대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말이다.)

 

두 번째 표는 200820대를 통한 조사 결과이다. 21살인 나로서는 자연스레 튀어나온 단어들이 교수님이 느끼기에는 많은 부분 변했다고도 하셨고, 실제로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여쭤보니 상당부분 남성과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을 의미하는 단어도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된장녀스러운, 시크한과 같이 새롭게 등장한 단어들 외에도, 예전 세대에서는 섹시한이란 말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암묵적으로나 사용할 수 있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여성을 칭찬하는데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그리고 예전 같으면 마초적인, 집단주의의남성들이 각광받았다면, 요즘은 가정적이고여성에게 헌신적인따뜻한 남성상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실제로 70,80년대 남성에게 최고의 찬사였다는 박력 있다.’란 말을 대중매체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접한 적이 거의 없다. 이 점을 통해 언어는 늘 변화하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4. 차이와 차별

 

문화 인류학 만큼 차이를 인정하고 공정하게 바라보려고 하는 학문은 없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탐구 속에서 타자를 한마디로 규정지을 때 차별을 할 위험성이 많은 학문은 없다. 합리적인 차별이 아닌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차별적인 요소는 분명 사라져야 한다. , 인종, 외모, 나이, 장애, 질병과 같은 생물학적인 차별에서부터 지역, 학력, 계층, 종교, 민족성과 같은 사회학적인 차별이 있다. 미인의 기준, 장애의 기준, 영남·호남, SKY대학과 같은 하나의 잣대를 대부분 우위에 있는 집단이 규정하고 지속적으로 이것이 이라고 주입한다. (따지고 보면, 안경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장애인을 불쌍하고 도와주워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 예로, 최근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를 통해 새롭게 부각되는 혼인제도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성욕성교임신출산양육으로 단순화되는 인간, 아니 모든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현상 속에서 인간은 결혼 허용 범위인 통혼권을 만들고, 자연스레 종족번식의 목적을 위해 근친상간을 금기시(Incest Taboo) 했다. 그러한 가운데 일부다처, 일처다부, 일부일처등 다양한 혼인 형식들이 발달했고, 한국은 일부일처 사회이다. 일부일처제 하에서 간통의 본질은 부부 간의 성적 성실의무위반이자 정조의무위반이라는 점에 있다. 성실의무나 정조의무는 역사적으로 볼 때 남성중심의 부계혈통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일부일처제를 전제로 한다. 인간사회가 남성중심의 부계혈통주의로 발전하면서 부계혈통의 진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부일처제를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부일처제 아래서의 부부관계는 한편으로 당사자 상호간 혼인의사의 합치라는 계약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호간의 신뢰와 애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밖에도 실제 폴리가미가 불법이긴 하지만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처럼 폴리가미를 금지하는 게 헌법에 규정된 인간의 기본권에 위배된다며 묵인하는 현대 사회도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당장 사회 깊숙이 뿌리 박혀 있는 일부일처제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미혼모 가정, 동성 부부, 재혼(‘결혼 마일리지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익숙해진 부분이지만), 다문화 가정과 같은 다양한 혼인 형태를 인정해주는 넓은 시야를 갖고 그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것이다 

 

다른 예로 대중매체에서 드러나는 피부색의 차이에 대한 차별역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KBS <미녀들의 수다> 공식 홈페이지 대문으로 쓰이는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전 세계 다양한 문화를 소개한다면서 등장하는 출연진은 전형적인 서구 미인들이 대부분이다. ‘백인들의 수다라는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제작진은 이국적인 남미 여인들과 친숙한 아시아 문화권인 일본, 중국인 역시 출연 시키고 있다. 물론 제작자의 기준으로 보기엔 미인이 아닌,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없는 흑인은 배제하고 말이다. 물론 검은 피부의 외국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중들에게 주입하는 키 크고, 하얗고, 늘씬한 미녀들의 부족한 한국문화의 이해와 언어를 대신해주는 수다역할이었던 것이다. 이국적인 문화나 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을 이야기하는데 피부색이 중요한 것인가? 이밖에도 이념상 인종주의를 반대하지만, 실제로 백인 북유럽 거주자라는 입장에서 본의와는 무관하게 한국인들의 깊은 화이트 콤플렉스’(백인에 대한 열등감)의 수혜자가 아니냐는 질문에 할 말이 없었다고 하는 귀화지식인 박노자씨의 자조적인 일화 속에도 대중매체의 철저한 상업적 논리와 대중의 인종에 대한 편견을 느낄 수 있다. 식상한 말이지만 우리의 편협한 태도와 잘못된 인식을 꼬집는 말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 말로 끝을 내본다. “우리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입니다.”

 

5. 경제에 목매는 우리 삶의 미래

 

21세기 한국은, 아니 세계는 경제 성장에 목매고 돈에 웃고 돈에 울고 있다. 돈으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고, 선진국에서는 음식을 버리는데 돈을 쓰지만 빈민국에서는 음식을 먹지 못해 죽음까지 맞이한다. 행복=능력/욕망인데, 사람의 욕망은 무한하다. 그래서 늘 과시 소비를 하고, 남보다 더 잘나기 위해, 좀 더 편리하기 위해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낭비한다. 대표적인 예가 에너지 소비에 관련된 우리의 자세이다. 세계 주요 산유국은 45개국이고, 석유 생산정점을 지난 나라는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해 36개국이다. 이를 대체해줄 대형 유전이 발견되지 않은 지금 생산 정점을 지나지 않은 나라는 9개국뿐이다. 이러한 사태에서도 많은 이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보다는 개인 자동차를 선호하며, 불필요한 전력을 낭비하고 있다. 그러면서 경제 성장, 경제 회복을 외치며 단순히 돈이 많은 사회가 분명 앞선 사회가 아닌데도, 금전적인 가치를 진보의 잣대로 삼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다는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나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얻지 못하는 것은?’, ‘돈이 하나도 없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은?’이라는 수업시간의 질문을 통해 우리 마음 속 행복과 만족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시간, 추억, 행복, 기억, 경험, 사랑과 같은 대답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소비가 아닌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는데 있어 돈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양의 돈은 더욱 사람을 탐욕적이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소위 고품격의 재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것처럼 말이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추억, 기억, 시간, 우정, 사람 사이의 정은 분명 세상을 살아가는데 더 큰 힘을 발휘 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살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살림살이의 근본구조를 돈의 논리가 아니라 삶의 논리에, 이윤의 논리가 아니라 필요의 논리에 맞추어야 한다. 돈의 논리는 양의 논리이지만, 삶의 논리는 질의 논리다.

 

수업 자료 중에서 대안 경제와 공동체 사회속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중 일화 부분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대량 구입을 통해 할인을 받고자 한 서구식 경제 개념에 입각한 질문에 시장의 노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 나와 있는 거요. 그런데 한꺼번에 다 몽땅 팔면 돈은 벌겠지만 그걸로 내 하루는 끝이요.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소.’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려가는 21세기에 이러한 삶의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쁜 가운데 리듬을 찾고 참된 인생을 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합리성이 아닐까?

속도 혁명으로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묶어내는 KTX에서부터 드넓은 밀실에서 심신을 나른하게 이완하는 찜질방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현장은 우리가 늘 부딪히고 목격하는 대상이다. 그 하나하나가 문화 읽기의 생생한 텍스트들이다. 왜 생활공간에 주목하는가 1990년대 이후 문화 연구가 활발해졌지만, 외국 이론 위주의 추상 담론으로 치우치면서 정작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을 읽어내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고 본다. 난해한 개념의 과잉 속에서 사회와 문화를 정밀하게 포착하는 언어는 오히려 점점 빈곤해져왔다. 우리는 해석되지 않은 변화들에 정신없이 휩쓸리며 살아간다. 생각하는 힘을 키우려 도입한 논술에서도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는 영역은 비좁은 편이다. 이 책은 생활세계의 다양한 현장들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방문하면서 나를 만나는 기행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