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바타이유 - 저주의 몫. 에로티즘 e시대의 절대사상 20
유기환 지음 / 살림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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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이유는 프랑스 철학계의 아웃사이더, 이단아이자 저주의 철학자이다. 그의 책 저주의 몫, 에로티즘은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쉽지 않다. 단순히 문체적, 철학적 논리를 떠나서 사유 자체의 충격성, 급진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기본적 물음에서 출발하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누구도 꺼내지 않은 금기시된 문제들을 철저하게 까발리는 사유를 했다. 사르트르 이후 인간 의식의 문제를 급진적으로 해석해나간 그는 철학과 문학을 넘나들며 위반의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그는 대표작 저주의 몫에서 소비에 대한 본질적, 포괄적 물음을 던졌다면, 문제작 에로티즘에서 그에 대한 사례를 독창적으로 분석하며 인간이란 금기와 위반의 존재란 것을 논한다. 이 책은 두 책의 연관성을 차분하게 밝혀나가며 그에 따르는 의미, 한계, 결과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었기에 개론서로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 혼란스러운 정신을 추스르고 바타이유라는 매혹적인 한 인간에 다가가는데 이 책만큼 훌륭한 지도는 없을 것이다.

 

바타이유가 주장한 저주의 몫은 쉽게 말해 잉여. 생산과 축적을 미덕으로 삼는 제한 경제와 달리 바타이유는 소비와 대가 없이 주고받는 선물을 중요시하는 일반 경제란 개념에 주목한다. 에로티즘도 일반 경제를 매우 잘 드러내는 한 사례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인간 사회는 무한하게,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태양 에너지 때문에 과잉이란 필연적 부산물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러한 잉여 자원은 어떤 방식으로든 상실되고 소모되어야만 한다. 마치 비만 어린이가 끊임없이 영양을 섭취하고 이를 적절한 방식으로 분출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병에 걸려 죽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생명 보존이나 재생산이 아니라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소비에 씌여진 저주를 지우려고 발버둥쳤다. 즉 과잉 에너지의 지혜로운 파괴로 지구라는 한 제한된 공간에서 현명하게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과거 과잉 에너지에 대한 지혜로운 파괴의 사례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고대 사회의 비생산적 소비를 포틀래치나 쿨라같은 증여교환 체계, 희생제의, 티베트의 라마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굳이 머나먼 고대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올림픽, 월드컵, 미친 듯이 춤추고 노래하는 락 페스티발, 삼바 축제를 보더라도 잉여 에너지를 현명하게 소비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더 가까이는 학창 시절 억압과 규율에 얽매어 있는 학생들에게 체육대회라는 단순한 분출구를 마련해주면 모두가 신 나게 즐기곤 하진 않았는가? 물론 축적 지향의 기획사회 이슬람 사회가 여전히 존재하고 세계 1,2차 대전으로 파국에 이른 결과도 인지하고 있다. 전쟁도 과잉 에너지를 소비하는 방식 중 하나지만 그렇다고 바타이유가 전쟁광이거나 전쟁 옹호론자는 분명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쟁은 축제와 달리 비생산적 소비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혀 개인, 사회, 국가의 이익을 철저하게 따지는 자본의 논리가 진행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모두 소비가 아닌 생산을 주된 쟁점으로 하기에 모순을 안고 있다고 지적한 바타이유는 지혜로운 소비의 예로 마셜 플랜을 들고 있다.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미국이 과도한 성장을 멈추고 비생산적 소비를 해야 한다는 논리에서 그는 이러한 정책에 찬성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무상 증여가 진정한 해답이 될까? 최근 경제 흐름, 국제 정세를 보더라도 이는 너무나 이상적이고 허무맹랑하다고까지 생각이 든다. 지나치게 강자에게 도덕성이란 잣대를 들이밀며 행동을 강제하고 실현 불가능한 제안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왜일까? 99개를 가진 부자가 자기 몫을 나누기 보다는 1개를 빼앗아 100개를 채우고 싶어하는 것처럼 세계 강대국은 그리 인정이 넘치는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냉정하며 이해 타산적이기에 바타이유의 외침은 공허하게만 느껴진다.

 

한편 킨제이 보고서를 비판하며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을 순수한 비생산적 소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일단 인간이 사유하는 존재, 이성적 존재가 아닌 동물적 인간이라고 규정하며 논의를 진행한다. 물론 원숭이나 기타 동물들이 성적 흥분을 느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에로티즘의 유무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규정지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만이 발정기가 아닌 기간에도 쾌락 그 자체만을 위해 섹스를 원하며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간다. 그는 이러한 사유의 기원을 라스코 동굴 벽화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성기를 곧추세운 채 새의 얼굴을 한 남자가 상처 입은 들소 앞에 누워 있는 이 그림. 바타이유는 여기서 금기와 위반의 관능을 엿보았다. 인간 내부에는 강렬한 금기와 위반의 욕망이 상호보완적으로 존재한다. 마치 시소가 오르락내리락하지만 결국 붙어있는 하나인 것처럼 금기가 있기에 위반이 존재하고, 위반이 있기에 금기가 존재한다. 쉽게 우리 주변의 일을 떠올려 보자. ‘손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있기에 더 손이 가고, 그다지 놀 생각도 없었는데 공부 좀 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에 더 게임이 아른거리지 않던가? 내가 간절히 가지고 싶던 50만 원짜리 가방도 정작 내 손안에 50만 원이 생기면 흥미가 시들어버리는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금기는 위반되어서야 비로소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고 위반은 금기란 하나의 경계 없이는 생겨날 수조차 없다. 이렇게 금기와 위반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제가 바로 에로티즘이다. 성에 있어서 보다 자유로운 프랑스에서도 섹스는 일정 수준의 금기를 간직하고 있다. 여전히 폐쇄적인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인간은 불연속성을 지닌 존재로 고독하지만 끊임없이 연속성을 갈망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성을 향한 무한한 사랑은 바로 금기시되는 생식에서 가장 처음 발생한다.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인간을 비로소 존재 가능한 상태가 되며 새로운 연속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연속성을 구현하는 새로운 삶은 정자와 난자의 독립적인 것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작은 죽음, 내적 체험에서 드러나는 죽음의 심연을 맛보는 것이다.

 

이렇게 바타유는 에로티즘은 연속성을 지향하고 이는 육체의 에로티즘, 심정의 에로티즘, 신성의 에로티즘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역설의 진실을 가진 에로티즘. 이성이란 존재를 망각하고 상대방 몸 안에서 완전한 상실이 이루어지는 육체의 에로티즘 순간에 인간은 금기를 위반하는 쾌감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쾌감이 충족되어 연속성을 구현한다고 느끼면 자연스레 심정의 에로티즘이 수반된다고 하는데 여기서 조금 의아한 느낌을 받았다. 바타유가 말했듯이 인간 내면에 감추어진 이중성, 동물적 특징의 재조명에는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극단화된 사유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든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 쾌감만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완전히 개인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금기를 넘나드는 위반에서 오는 짜릿함을 맛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며 갖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럽히는 행위, 즉 꽃을 꺾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는 단순히 개인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수많은 타자가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사는 곳이다. 금기란 것이 상당히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며 관습적이라면 그것은 더욱 사회 구성,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제도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 단순히 육체적 에로티즘을 위해 타인을 수단화하고 순간의 연속성을 맛보고 죄의식에 빠지는 것은 올바른 일일까? 그리고 가능한 일일까? 바타유가 지적했듯이 결혼이란 제도 역시 성행위를 전제로 하며 하나의 금기를 제공한다. (첫날밤을 허락받은 강간이라고 표현한 부분 역시 상당히 남성중심주의적이며 위험한 논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원문을 읽지 않고 단순히 해설서를 읽으며 오해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를 위반할 때 오는 쾌락만이 진정한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혼외정사에 대한 흥분도 존재할 수 있지만, 안정적인 가정에서 느끼는 안락함, 편안함, 그리고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만족감도 분명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육체적 에로티즘이 오히려 심정의 에로티즘에 이어지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단계라고 생각한다. 사람 대부분은 섹스에서 오는 행복을 육체적, 생물학적 오르가즘, 화학반응이 아닌 사랑하는 이와 하나 되는 정신적 느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바타유는 이러한 사유 역시 이미 금기에 길들어 위반의 매력을 애써 모른 체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정신적 사랑이 빠진 단순히 육체적 에로티즘에는 쉽게 공감을 하지 못하겠다. 금기를 위반할 때 수반되는 짜릿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금기를 지킬 때 느끼는 뿌듯한 감정 역시 인간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의 행복을 미루는 것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지금 당장 눈앞에 놓인 대상을 맹목적으로, 그것도 철저히 이기적으로 대하고는 싶지 않다. 개연적, 혹은 직관적이만 더 큰 행복이 숨어있다면 위반의 유혹보다는 금기의 매력이 내게 더 강하게 다가오고, 마침내 언젠가는 진정한 의미의 비생산적 소비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순간이라고?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공을 들인다고 해도 에로티즘도 죽음도 인간도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수없이 강조한 대로 성과 죽음, 즉 인간의 삶은 실로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차 있따. 바타이유가 사디즘의 화신과도 같은 질 드 레와 엘리자벳 바토리의 이야기를 눈물 없이 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가해자에 대한 동정 때문도, 희생자에 대한 연민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폭력과 관능이 맺는 엽기적 모순의 관계 때문이다. 인간이란 진정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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