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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와 그 이후 ㅣ 살림지식총서 289
김종우 지음 / 살림 / 2007년 6월
평점 :
최근 거듭된 왕따 사건이 터지며 여러 사람이 하나같이 지적하는 원인이 있다. 바로 학교 공교육 ‘구조’의 문제. 왜 우리는 개인의 죽음을 구조 탓으로 돌리는 것일까? 법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그는 자율이 아닌 타율, 사회 구조의 부조리 때문에 이러한 일을 저질렀다고 변호하는 경우가 많다. 서양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이성을 지닌 인간의 주체가 핵심이었는데 과연 이러한 논의는 어디부터 시작된 것일까? 1950년대 사르트르가 이끈 실존주의의 빈자리를 채운 구조주의의 논의에서 우리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구조주의는 특정 학파, 철학적 운동이 아니었기에 동질성을 찾기는 어렵지만 동일한 사유 모델을 사용한 방법론이란 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주체의 해체, 분열에 주목하며 현상 뒤에 보이지 않는 구조에 주목하는 특징을 지녔는데 인류학, 정신분석학, 신화학, 역사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명을 이루고 발전해왔다. 모든 것을 전체라는 체계 속에서 보려고 시도한 이들은 표층은 심층의 표현이라 생각했다. 마치 창백한 ‘안색’에서 좋지 않은 ‘건강’을 엿볼 수 있는 인간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언어학의 창시자 소쉬르, 구조주의적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있다.
직접 ‘구조’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고 ‘내적 체계’란 단어를 썼지만, 소쉬르는 언어학, 그리고 구조주의의 시작을 알린 언어학자였다. 그는 언어를 하나의 자율적인 체계로 보고 그 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보편문법을 탐색했다. 우선 기존 언어학의 역사성, 어원, 문법, 의미론을 연구한 ‘통시성’ 대신 그는 ‘공시성’을 학문의 법칙으로 삼았다. 언어의 현 상태, 지금 행해지는 결합, 관계, 배열에서 그는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자연스레 ‘랑그는 파롤에 선행한다.’라는 명제가 도출되는데 두 개념은 이와 같다. 랑그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의사소통의 체계, 즉 구조적 규칙, 심층, 언어, 본질로 대표되는 개념이다. 반면 파롤은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발화되는 언어 행위, 표층, 발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소쉬르는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 언어는 기호들의 체계라고 분석했다. 언어 역시 기표, 기의로 구분할 수 있다. 기표는 시니피앙, 음성기호, 즉 표시하는 것이며 예를 들면 우리가 말하는 개, dog, 犬이 모두 이러한 예다. 그리고 기의는 시니피에로 의미, 개념, 표상, 표시되는 것으로 실제 생물 개를 지칭하는 것이다. 기표는 기의의 옷이 아니고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인 결합에서 형성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다른 요소들과 맺는 관계와 차이에 의해서만 기호를 규정 할 수 있다. 마치 상병이 병장과 일병 사이, B0가 B+와 B-사이에서 차이에 의해 규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적 성과를 발전시켜 사유해보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동일성보다는 차이가, 실체보다는 관계가 중요해진다. 바로 기호체계의 닫힘이란 특성 때문이다. 이런 논리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던 인간이 언어의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인간의 주인이다. 이러한 생각은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묘하게 일치하지 않는가? 언어 ‘구조’ 속에 갇힌 인간. 하지만 랑그가 과연 인간 주체와 무관한 개념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개’라는 말이 누가 처음 말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인간이 만든 발화는 아닐까? 언어를 뛰어넘는 추상적인 체계에 몰두한 나머지 구체적인 현실에 동떨어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언어 활동의 궁극 목적은 소통, 그중에서도 기호의 소통이 아니라 의미의 소통인데 너무 단순화된 이론을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도 가져본다.
그리고 레비스트로스는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는 심층에 주목했다. 마르크스, 프로이트, 지질학과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유사성을 드러낸다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구조주의는 의식되지는 않지만 여러 집합에 공통으로 작용한다고 본 그는 현상학의 반대편에 선 인류학자다. 특히 자연과 문화를 근친상간으로 구분하며 친족 관계를 연구했고, 나아가 신화 연구에 집중했다. 그가 말한 바로는 신화의 줄거리는 제각각 모두 다르지만, 배후에는 바로 하나의 대립 관계가 불변하는 같은 ‘구조’라고 언급했다. 또 인류학자답게 직접 체험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논의를 전개한 그는 변증법적 이성을 몽상이라고 비판했다. 눈으로 목격한 식민주의, 인종주의의 폭력성은 그에게 회의감을 주었다. 과연 역사는 규칙적 발전 과정을 따르는 것일까? 레비스트로스는 그것 역시 우연에 불과하며 인간 과학은 무질서와 우연한 연속이라는 정의를 내린다. 그는 미개와 문명을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며 ‘초합리적(super-rationalism)'이란 근원적 의식을 아마존 원주민에서 찾았다. 초합리적인 것은 바로 물질문명에 상관없이 모두가 공유하는 성질이며 그는 차가운 사회와 뜨거운 사회의 특징을 언급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구조주의는 반경험주의인 동시에 경험주의다. 표층의 관찰에 머물지 않고 경험을 뛰어넘는 심층에 대한 상상을 시도하는 점에서는 반경험주의다. 하지만 상상력으로 얻은 심층에 대한 가설을 다시 관찰을 통해 표층의 차원에서 재확인한다는 점에서는 경험주의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주체적인 존재가 아닌 수동적인 지배를 받을 뿐일까? 마치 중세 시대를 암흑으로 지배했던 ’신‘이란 존재도 어찌 보면 인간에게서 자율적 선택을 지닌 주체란 위치를 빼앗아 간 구조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인간 정신의 역동성과 발전 가능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추상적인 것에 너무 빠져드는 흔적을 구조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창조적인 인간은 결국 스스로 구조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며 혹은 그 구조의 모순과 문제를 깨부수고 나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니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오로지 실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구조‘라는 하나의 이념은 그저 인간에게 유용한 핑계거리로 전락할 뿐이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면죄부로 악용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척박한 한국 스포츠계에서 난데없이 등장한 김연아와 박태환. 이들은 구조주의의 사유대로 필연적으로 등장한 것이며 언제가 나올 존재였을까? 아니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억압하는 하나의 구조,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일까? 후자가 우리 인간에게 더욱 유용하고 시사 하는 바가 큰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구조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무엇보다도 구조주의가 구조 개념 자체를 순전히형식적인 차원에서만 보려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구조의 형식성에 긴장과 역동성이라는 개념을 덧붙이려 한 뒤랑와 상형구조주의는 인간정신을 이해할 때에 주체와 객체, 기호와 의미, 구조와 현상을 동시에 감싸 안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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