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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ㅣ 책세상 니체전집 13
프리드리히 니체 / 책세상 / 2015년 12월
평점 :
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결국 미쳐버린 철학자, 자기 민족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한 당당한 독일인, 쇠망치로 하나하나 부패한 관념을 깨부순 용기있는 선구자, 신이 죽은 사회에 초인이라는 개념으로 등장한 자기 찬미의 일인자. 니체를 처음 만난 나는 온전히 그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에 대한 환상은 부끄러울 정도로 무지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고등학교 시절 나는 니체의 사상이 아닌 니체의 이미지를 좋아했었나 보다. 초인 개념을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선구자로 이해했고, 단순히 그의 사상을 느끼지 않고 외우려 했다. 마치 ‘쇼펜하우어 - 염세주의자, 니체 - 니힐리즘, 허무주의’처럼 달달 외우는 고등학교식 암기에 익숙해져 나는 정작 니체가 제시한 낙타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철학적 의미를 곱씹으며 읽어본 니체의 저작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무척 술술 읽히면서도 무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남겨준 니체 철학의 진수가 담긴 난해한 책이었다.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로 출발하여 의지의 과잉 상태를 진단하며 이를 극복하려 한 것처럼 니체 또한 사전적 의미의 ‘허무주의자’는 아니었다. 쇼펜하우어의 소극적인 허무주의와는 달리 니체는 양가성을 지닌 허무주의를 추구했다.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허무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삶의 긍정 단계로 나아갈 힘을 지닌 개념이었다. 그러면서 함께 등장하는 영원회귀, 위버멘쉬 개념은 바로 니체 스스로 극찬한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방대하게 담겨있다.
그의 대한 두 번째 오해는 ‘초인’ 개념이었다. 단순히 타인보다 강한 인간, 그래서 그들에게 진리를 설파하고 지도하는 인간의 뉘앙스가 풍기는 단어의 외면에만 너무 집중했다. 하지만 극복인, 넘어가는 인간, 혹은 위버멘쉬(Übermensch)로 번역된 니체가 하고 싶은 말은 전혀 달랐다. 벗어나며 동시에 이행하는 위버멘시는 하나의 메타포적인 개념이었고 니체가 거듭 주장한 디오니소스적 인간, 힘에의 의지 개념이 응축된 성질이었다. 삶의 허무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긍정을 통해 창조하는 과정 중의 인간. 그것이 진정한 위버멘쉬, 니체가 자신의 그림자로 내세운 차라투스트라의 등장 이유였다.
주인공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와 대중에게 설교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하지만 최우의 인간들은 초인을 비웃으며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권위라는 무서운 벽에 가로막혀 더 나아가기를 주저하는 세계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확고한 진리, 영원불멸한 가치, 절대적인 도덕을 단호하게 거부한 니체는 정신의 3단계 변화를 제시한다. 우선 낙타의 단계는 무거운 짐을 잘 견디며 모든 시련을 견뎌낸다. 대표적으로 내세를 강조하는 ‘신’이란 가치를 등에 업은 낙타는 사막에 도착해 사자 단계로 나아간다. “너는 해야 한다”는 가치를 부르짖는 용을 맞아 사자는 비록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창출한다. 하지만 니체는 약탈하는 사자가 다시 마지막 아이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며 망각이다. 새로운 시작이며 유희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하나의 신성한 긍정이다.”
자기 자신의 의지에 대한 긍정을 설명하며 니체는 아이 단계를 통해 영원 회귀, 그가 주장하는 긍정 철학의 힘을 제시한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아찔했다. 시험 기간에 찾아온 과제와 조모임의 압박이 영원히 돌고 돈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나는 장난스러운 생각이지만 삶과 밀접한 철학자 니체가 가지는 의미를 여기서 제일 많이 느꼈다. 위와 같은 니체의 생각을 따르면 현재의 고통 혹은 행복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수십 년, 수백 년, 혹은 수천수만 년이 지나도 영원히 반복된다. 생각해보면 영원회귀 개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르침을 받았던 기본 통념과 상당히 상충한다. 교회에서는 지금 지금의 고통과 수난을 인내하고 기도하면 행복이 넘치는 천국이 우릴 기다린다고 말한다. 비종교인인 나는 들을 일이 없는 이야기지만 학교에서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고등학교 시절 모든 것을 제쳐놓고 대입이라는 하나의 달콤한 목표를 위해 책상 위에만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낭만이 넘친다는 대학교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대학 입학’이란 목표가 ‘대기업 취직’이란 글자로 바뀌었을 뿐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로 하는 일은 그대로였다. 아프고 슬프고 답답하고 괴로운 현실을 애써 미래에 다가올 성공을 그리며 자위하는 듯했다.
과연 지금 내 눈앞에 삶을 불확실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포기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지금까지 모르면 물었고, 참으라면 참았다. 하지만 고통이 가득한 현실에 그만 무릎 꿇고 낙타처럼 더 무거운 짐을 요구하며 살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삶, 가치 있는 삶이 과연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꼭 들어맞는가? 아니 들어맞아야만 하는가? 니체처럼 모든 권위에 위풍당당하게 맞설 자신은 솔직히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운명애(amor fati)의 용기를 가지고 삶을 긍정하며 매 순간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야겠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괴로움이 가득한 삶에서 긍정적인 힘을 부지런히 찾으며 미약한 인간에서 나아가는 인간으로 달려야 하지 않겠는가? 짜라투스투라의 충고를 기억하며 나의 목적의식이 흔들릴 때마다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 니체를 만나야겠다.
“ 삶은 괴로움일 뿐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데,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삶이 끝나도록 하라! 괴로움일 뿐인 삶이 끝나도록 하라! (.....) 만일 그대들이 좀 더 삶을 믿었더라면 그대들은 자신을 순간에 내맡기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대들은 기다릴 여유도 없고, 게으름을 부릴 만한 여유도 갖고 있지 않다!“
오 인간이여! 주목하라!
깊은 한밤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잠들어 있었다. 잠들어 있었다.
나는 깊은 꿈에서 깨어났다.
세계는 깊다.
낮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다.
세계의 고통은 깊다.
쾌락은 마음의 고뇌보다 더 깊다.
고통은 말한다. 사라져라!
그러나 모든 쾌락은 영원을 원한다. 깊고 깊은 영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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