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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흑임자 작가 김중혁은 야구로 치면 8번 타자쯤 되는 고만고만한 선수라고 겸손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고교 동창 김연수가 4번 타자 슬러거라면 자신은 쉬어가는 타순 정도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김중혁은 5툴 플레이어(정확성, 파워, 수비ㆍ송구ㆍ주루 능력을 갖춘 선수) 3번 타자가 제격이다. 그는 마니아층이 두터운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이효석문학상, 젊은 작가상 대상 등을 받으며 검증받은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흑임자역할로 깨알 같은 입담을 과시하고, 표지의 그림을 그리거나 인터넷 방송의 연출까지 한다. 이렇듯 팔방미인 김중혁은 자신의 재기 발랄한 상상을 여러 분야에서 펼치고 있다. 그러나 역시 그의 최대 장점은 말랑말랑한 단편 소설이다.
“2021394200은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름이 2021394199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소리내어 발음해보았다.
삼십구만사천백구십구
단번에 세 개의 숫자가 바뀐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숫자로 된 자신의 이름이 좋았다. 한 시간에 1씩 숫자가 줄어드는 게 좋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똑같은 이유 때문에 숫자로 된 이름을 싫어하지만 2021394199는 그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신체 어딘가가 지워지는 듯한, 옅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얼음을 가득 채운 위스키가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처럼 자신이 좀 더 부드러운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中
그의 단편집은 하나의 테마가 있다. <펭귄 뉴스>에서 아날로그적 사물, <악기들의 도서관>에서 악기와 소리에 주목했다면 <1F/B1>의 키워드는 현대인이 가장 친숙한 공간인 ‘도시’다. 'C1+y=:[8]‘, ’냇가로 나와‘. ’바질‘,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1F/B1', ‘유리의 도시’, ‘크리샤’ 총 일곱 가지 단편이 묶여 있는데 묘하게 일관성을 보인다. 미래 도시의 레옹과 마틸다가 떠오르는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금 당장 현관문을 열고 몇 걸음만 옮기면 볼 수 있는 대한민국 서울의 모습이다. (주인공 이름이 달라지는 소설이라니! 한 시간에 1씩 줄어드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과 몽환적인 세계를 단편으로만 끝내기는 아쉽다.) 미로와 대로의 구분이 모호한 숨은 골목길, 전설이 시작된 나루터, 까맣게 정전이 되어버린 아파트 단지, 대형 유리로 빼곡하게 가득 찬 대형 빌딩, 작은 공터가 보이는 낡은 건물, 도시로부터 밀려난 어두운 덤불. 그가 창조한 도시는 익숙하면서도 참신한 신비로운 이야기의 토양이다.
“이윤찬은 고은진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는 장면을 떠올렸다. 약이 올라서 정수리가 뜨끈뜨끈했다. 이윤찬은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흐릿한 빌딩들을 노려보았다. 유리가 너무 많았다.
“손님, 시트 다 젖습니다.”
택시기사가 거울로 이윤찬을 노려보았다. 이윤찬의 오른쪽 어깨와 팔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이윤찬은 버튼을 눌러 택시 창문을 닫았다. 창을 닫자마자, 먹을 것을 찾아 몰려드는 생물체처럼 빗방울이 창문으로 달려들었다.”
- '유리의 도시' 中
가장 흥미로웠던 단편은 ‘유리의 도시’였다. 소설 속 도시는 연쇄 유리 자살 사건(?)이 연속해서 일어나는 차가운 곳이다. 아무 이유 없이 유리가 건물 밖으로 떨어져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데 이윤찬과 정남중은 이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리고 그들은 특정 물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알루미노코바륨이 그 원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범인 고은진을 체포하며 순조롭게 사건 종결을 앞두고 있지만 다시 가로 사 미터 세로 삼 미터 크기의 유리가 떨어진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강남을 떠올리며 책을 읽었는데 특히 마지막 부분의 빗방울 묘사는 매우 공감되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빌딩 ‘숲’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체감한 기억, 3007번을 타고 빌딩 숲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마지막 발악처럼 창문으로 뛰어드는 빗방울. 이제는 익숙해진 도시의 유리들이 나를 겁먹게 했던 순간이 어렴풋이 기억났고, 그때의 내 모습도 추억할 수 있었다.
C1+y=:[8]: 는 그해 가을 발표한 내 논문의 제목이다. 상교동의 골목에서 발견한 낙서였는데, ‘시티는 스케이트보드’라는 뜻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두 개의 발, 도시와 스케이트보드 사이에 있는 ‘=’의 속도감이 보기 좋았다.
- C1+y=:[8]: 中
그의 이야기는 뻥이다. 하지만 허황되거나 유치하지 않다. 왜냐하면, 세부적인 묘사가 생생하고 매끈해서 마치 진짜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알루미노코바륨, 광찬구 미온동, 건물관리자연합, 슬래쉬 매니저. 내가 모를 뿐 당연히 존재할 법한 이름이다. 그는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한 소재를 맛깔나게 그려낸다. 스케이트보드를 수식화하고, 1F/B1에서 FBI를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 김중혁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기이한 사건의 연속이지만 마지막 작가의 말처럼 그는 도시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나는 이 속된 도시가 좋다. 여기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의 말처럼 복잡하고 긴박한 도시라는 공간은 결국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다. 그 속의 일부로서 속도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고 여유를 찾는 것 역시 결국 도시인의 숙명이다. 그리고 나에게 여유를 갖는 최고의 방법은 김중혁 작가의 소설처럼 기발하고 신선한 활자들을 음미하는 독서일 것이다.
"윤정우의 눈에 들어온 1F/B1이라는 문자와 숫자와 기호의 조합은 마치 신의 계시 같았다. 윤정우는 잠시 계단참에 서서 표지판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신의 계시라면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표지판 속에서 ‘FBI‘라는 단어가 보였다. ’그럼 이 모든 사건이 FBI의 음모였단 말인가‘라는 생각을 하다가 윤정우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윤정우는 계단을 마저 내려가 관리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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