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를 창작에 몰두케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간질병으로 인한 병적인 집착, 인생 전체를 물들인 도박병, 충격으로 다가온 아버지의 죽음. 뚜렷하게 하나의 원인으로 귀결되지는 않지만, 그의 기구한 인생을 들여다보면 <죄와 벌>은 물론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모티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가난과 구원을 함께 손에 쥐었던 그는 <죄와 벌>의 공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어두운 도시의 이면을 낱낱이 드러냈다. 톨스토이와는 또 다른 고통과 좌절의 매력을 지닌 그의 소설은 무섭도록 현실적이고 냉혹하다. 특히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은 마치 내가 공범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작가가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서야 이렇게 생생하고 참혹한 범죄자의 심리를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충격적인 첫인상이 길고 긴 소설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타인은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 ‘비범한 사람’이 다수인가요? 저는 물론 그들을 인정합니다만, 그러한 사람들이 무한정으로 많으면 기분이 좀 두려우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체로 신사상을 주장하는 사람, 아니 어떤 ‘새로운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상히리만큼 극소수이지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모든 부류와 그 밑의 세부 부류에 속하는 인간이 탄생할 비율은 어떤 자연법칙에 의해 정확하게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 사상’에 심취한 병약한 대학생이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악한 소수를 처단할 권리이자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그는 전당포를 찾아간다. 전당포 노파 이바노브나는 동생 리자베타까지 착취하며 돈에만 빠져 사는 백해무익한 인물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대, 착한 두냐의 희생에 점점 스트레스를 받던 그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는 스스로 도끼로 악을 처단하면서 선을 실행하는 역할을 하는 비범한 인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피가 솟구치는 노파의 정수리를 바라보면서 그는 극심한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그 역시 결국 평범한 인물에 불과했다. 타인의 가치를 결정하고 처단하는 역할을 하기에는 그는 너무나 나약한 인물이었다. 

 

소설에서는 특히 ‘문턱’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등장한다. 문턱에 서서 극단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엄청나게 고민하다가 그는 결국 살인을 저질렀다. 하지만 악을 처단한 후에 극악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고 환각 증세를 보이던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냉철한 예심판사 포르피리에게 자수를 하고 만다. 그가 믿는 초인이라면 냉정하게 선을 행한 것에 보람을 느껴야 했지만, 그는 결국 인간이었다. 역설적으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아픔 속에서 구원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대지를 상징하는 소냐의 도움 때문이다.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창녀라는 직업을 가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그녀는 시베리아 유배지까지 라스콜리니코프를 따라온다. 땅에 입을 맞추고 죄를 고백하라고 주인공에 권유하는 자도 바로 사랑을 상징하는 소냐다. 과연 누가 혼란스러운 살인자의 눈물에 연민의 감정을 느끼겠는가? 결국 선을 지키는 이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생각한 단 하나의 ‘초인’이 아니라 소냐처럼 사랑의 가치를 나누는 ‘일반인’이다.

 

 

칙칙한 방과 음울한 뒷골목 술집의 묘사를 보며 이질감을 받지 않았다. 낯설지 않은 일상과 닮아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나도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대학생이 되고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하루하루 비좁은 자취방에 벌레와 함께 살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심각한 수준의 몽상과 피해 의식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환경에 영향을 받는지 예전보다 상당히 냉소적이고 주변에 무덤덤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새삼 라스콜리니코프는 복에 겨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냅다 성질만 내고 나가버리는 친구를 이해하고 일자리를 알아봐 주는 라주미힌, 헌신적이고 이해심 많은 동생 두냐,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손길을 아끼지 않는 소냐까지. 그에게 필요한 건 영웅이 아니라 이런 따뜻한 주변의 손길이었다. 그랬다면 노파를 죽이고 뉘우치는 과정의 괴로움을 생략하고 조금 더 일찍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었겠지?

이젠 잠시도 여유가 없었다. 그는 도끼를 빼내 거의 무의식적으로 양손으로 들어올려 아무렇게나, 도끼 등으로 노파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 순간 마치 온몽의 힘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 번 도끼로 내리친 후부터 다시 힘이 확 솟았다.

노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있었다. 평소처럼 기름으로 싹 빗어 붙이고 백발이 섞인 연한 빛깔의 머리를 쥐꼬리처럼 닿아서 그것을 똘똘 뭉쳐 부러진 빗으로 꽂고 있었다. 일격이 가해진 부분은 노파의 정수리였다. 상대방의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노파는 ‘악!’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으나 그것도 아주 미약할 뿐 몸은 허물어지듯이 구부러지고 말았다. 그대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긴 했으나 한쪽 손에는 아직도 저당물을 쥐고 있었다. 이때 청년은 있는 힘을 다해 역시 도끼 등으로 정수리를 향해 한 번, 두 번 도끼 날을 내리쳤다. 피는 물 담긴 컵이 뒤집어진 것처럼 콸콸 흘러나오더니, 노파는 몸을 젖히며 위를 보고 고꾸라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