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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세상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간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면, 반쯤은 제대로 살고 있는 셈이다. 온전히 살고 싶다면, 사실은 세상이 나를 속였다기보다는 내 쪽의 일방적인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지만. 이 첫 소설집에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의 부끄러움, 민망함, 분노, 미움, 죄책감 등 다양한 감정들을 탐구하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탐구는 탐구, 이야기는 이야기다. 소설가로서 최은영의 가장 큰 미덕은 그게 무슨 탐구든 반드시 근사한 이야기로 들려준다는 점이다. 그녀가 앞으로 쓰게 될 근사한 이야기들이 바로 이 책에서 시작했다.
- 김연수 소설가 추천글
최은영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 대한 극찬은 익히 들어왔다. 순하고 맑은 힘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며 폭넓은 인간 관계의 감정을 다루는 소설들은 큰 인기를 끌었다. 2018 서점인이 뽑은 올해의 작가&책, 소설가들이 뽑은 2016년의 소설 공동 1위. 다양한 수식어에 걸맞은 소설일까 기대반 걱정반으로 책을 펼쳤는데, 잔잔한 울림으로 만족스럽게 마지막 장을 넘겼다. 어마어마한 몰입감으로 독자를 사로잡거나, 번뜩이는 반전은 없다. 대체 왜 관계가 단절되었는지, 그들이 서로에게 남긴 상처가 어떻게 치유되는지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의 시선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차근차근 되새겨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느낌이다.
˝너가 어른 되면 남자고 여자고 없다. 너가 여자여서 안 된다는 소리 듣거들랑 무식한 소리구나 하구 비웃어버려. 넌 뭐든 다 되고 뭐든 다 할 수 있다. 너 땐 남자구 여자구 마음 바른 사람이 잘 살거여.˝ - <비밀>
서로 다른 국적과 언어를 가진 인물들이 유독 많이 나온다. 지방 소읍의 일본 고등학생과의 우정이라하기엔 묘한 관계(<쇼코의 미소>), 베트남 가족과 아픈 과거를 곱씹는 관계(<씬짜오, 씬짜오>), 케냐 청년과의 썸인듯 아닌듯한 관계(<한지와 영주>), 폴란드 친구와 동경하던 선배를 공통분모로 추억을 공유하는 관계(<비밀>). 마치 편지와 일기를 훔쳐보듯 잔잔하게 이어지는 사건의 연속은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담백한 맛이 있는 글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깊게 다가왔고 공감가는 부분도 많았다. 그만큼 여운도 깊었고, <쇼코의 미소>에서 틱틱거리는 할아버지와의 애틋한 에피소드도 큰 울림이 있었다.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야만 하는 현실의 무서움도 차분하게 마주하기에 배울만한 점도 많더라.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_「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익숙지 않은 타국에서, 다른 언어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인공들은 성장의 문턱을 통과한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물론 담담한 일기처럼 이어지는 7편의 소설에서 거듭 느낄 수 있는 삶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혀 다른 타인을 인정하면서, 나아가 온전히 자기 자신이란 이유만으로 혐오의 멸시를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탓을 너무 하는듯 하다. 정작 나쁜 마음으로 스스로가 자책해야할 사람은 떳떳하고 뻔뻔한데 말이다. 세월호 사건을 다룬 <미카엘라>에서 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나아가 배려하는 마음으로 관계가 중요하다. 개인의 힘만으론 결코 버틸 수 없는 게 요즘 시대이니 말이다. 한편,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애틋하다. 손주,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표현 방식만 다를뿐 한결같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훌쩍 자라고, 다 커도 여전히 한없이 귀엽고 보듬어야할 '아기'인가보다. 어리광을 피우고, 투정을 부려도 언제나 변치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기에 살갑지 못한 나를 합리화해본다. 그래도 언젠가 다가올 이별에 가슴이 먹먹해도 담담하게 그리워하고 추억할 수 있도록 후회없이 사랑하고 표현해야겠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서 나 또한 두려움 없이, 온전한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