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즐라탄이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이주만 옮김, 한준희 감수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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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즐라탄이다"

도발적인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여타 축구선수 자서전과 다르다. 불우한 어린 시절, 부상을 이겨낸 꾸준한 노력, 동료들의 고마운 도움, 소중한 은사에 대한 감사,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대부분의 흐름은 철저히 거부한다. 콘솔게임에 빠져서 훈련 전날에도 밤새 게임을 한다. 어린 시절 조깅이 싫어서 몰래 대열을 이탈해 자전거나 훔치는 불량배였다. 한정판에 목매며 자신이 번 돈 자랑도 멈추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감독을 욕하고, 자신이 최고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자화자찬한다. 스타의 사생활을 캐는 언론을 피하기 보다는 목소리 높이며 싸우기 일쑤다. . 하지만 즐라탄의 이런 당당한 행동들이 오만이 아닌 자신감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 대열에 오른 즐라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15시 37분이다. 날씨는 따뜻했고 해안에서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 상황만 놓고 보면 위기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조심스럽게 나왔다. 하지만 나는 상대 수비의 허점을 찾아냈다. 득점 기회였다. 축구를 하다 보면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마치 섬광이 터지는 것처럼 눈앞에 골을 넣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호즐메'. (호날두-즐라탄-메시의 줄임말) 흔히 인간계를 초월해 신계에서 축구를 한다고 평하는 메시와 호날두는 독보적이다. 그리고 대중이 TOP3를 꼽으면 흔히들 뽑는 건 스웨덴의 장신 스트라이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다. 그는 여러 클럽을 전전하는 전형적인 저니맨이다. 천문학적인 이적료를 받고 더 많은 돈을 주는 클럽으로 가길 원한다. 겸손은 '개나 주고' 마음껏 한정판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한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동료에게 연습 때도 소리를 버럭 지르고, 경기장에선 욕하며 시비를 거는 수비수를 들이박기도 한다. 말그 대로 제멋대로 독불장군이다. 하지만 그래도 로센고드 출신 다혈질 스트라이커를 명문 클럽이 모두 원한다. 아약스, AC밀란, 인터밀란, 유벤투스, 바르셀로나, PSG. 그가 몸담았던 곳은 하나같이 최정상 클럽이다. 다루기 어려운 사고뭉치를 원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다. 바로 골을 넣어주고, 우승을 이끌기 때문이다. 구단주와 팬들이 원하는 건 오직 승리다. 그리고 그걸 이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즐라탄'이다.

 

내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죽여주네, 끝내주네"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이 역겨운 발 사진은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어떻게 이런 쓰레기를 벽에 걸어둔 거야?"

"머저리 새끼들. 그 발이 아니었으면 이 집을 살 수도 없었어"라고 내가 쏘아붙였다.

 


그는 195cm 장신이면서 발재간이 좋다. 수비수를 농락하는 화려한 개인기를 즐긴다. 태권도를 했던 경험 덕분인지 아크로바틱한 골도 곧잘 넣는다. 잉글랜드와 친선 경기에서 나온 환상적인 바이시클킥은 조 하트를 병풍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아약스 시절 카메라까지 여러 번 속이는 환상적인 슛 페인팅은 기가 막힐 정도다. 중거리 슛 정확도도 뛰어나고 수비수의 거친 몸싸움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낸다. 게다가 동료에게 찔러주는 패스도 무척 감각적이다. 그의 자신감은 결코 허풍이 아니다. 이탈리아 리그 최우수 외국인 선수, 득점왕, 리그1 득점왕, 스웨덴 올해의 스포츠인, 프랑스리그 올해의 선수, 스페인 국가대표 역대 최다 골 기록 보유자. 골을 넣으면 이기는 스포츠인 축구에서 이렇게 든든한 스트라이커는 우승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실제로 그는 가는 팀마다 우승컵을 선물했다. 이 정도면 "나는 즐라탄이다."란 거만한 제목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우승의 영광을 누구에게 선사하고 싶습니까?"

"당신들에게. 나와 인터 밀란 선수들을 의심하고 씹어댔던 언론과 모든 이들에게 이 영광을 바칩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반더바르트, 루이 판 할, 펩 과르디올라

막스웰, 조제 무리뉴, 파비오 카펠로

즐라탄의 자서전을 제일 먼저 읽어봐야 할 축구인들이다. 누군가는 불같이 화를 내겠지만, 누군가는 흐뭇한 미소를 띨 것이다. 즐라탄만큼 호불호가 강한 선수는 없을 것이고, 직설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을 깎아내린다. 지금까지 읽었던 한국 축구 선수 자서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표현들이 난무했다. 매번 고마운 동료와 은사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돌리고, 지금까지 세운 자신의 공을 모두 돌리는 겸손함? 그런 건 즐라탄에게 있어 개나 줄 일이다. 겁쟁이, 남자답지 못한 사람, 거만한 인간. 기발한 독설로 즐라탄은 상대방을 비판하고 자신만의 당당함을 만천하에 뽐낸다. 특히 바르샤 시절 펩 과르디올라를 묘사한 부분은 고소를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의 수위다.

 

나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할 만한 말만 했다. 한심한 노릇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그렇게 얌전히 지낸 적이 없었는데, 나는 바르셀로나 구단에서 제공한 아우디를 타고 훈련장에 가서 모범생처럼 군말 없이 지냈다. 동료 선수들을 향해 소리를 치지도 않았다. 갑갑했다. 나, 즐라탄은 더 이상 즐라탄이 아니었다.

 

즐라탄을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선수에게 모범이 되는 성실하고 훌륭한 우상은 아니다. 그는 더욱 높은 연봉을 위해 팀을 옮기고, 우승을 위해 여러팀을 저울질하는 저니맨이다. 하지만 축구로 돈을 버는 '프로' 축구 선수에게 그러한 덕목은 교활함이나 악덕이 아니다. '원클럽맨'이란 로맨틱한 선택을 칭찬하고 대단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하지만 즐라탄은 축구에 있어서만큼은 거짓이 없다. 항상 남들과 조금 다를지라도 자신을 믿고, 중요한 순간마다 최고의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조금 튀더라도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고, 자기 주관대로 나아가는 게 정답이다. 그것은 축구란 한낱 스포츠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에도 훌륭한 조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즐라탄같은 캐릭터 한 명쯤은 있어야 축구판이 더 즐거울 게 아닌가? 모범생만 가득한 한 반은 심심할 테니.


더 읽을 거리...

 

 

나는 그런 사람이다.

이를테면 '난 즐라탄이야!'하고 혼자 만족해서 고개 쳐들고 다니지 않는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필름이 돌아가듯 나는 반복해서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했어야 했나, 아니 저렇게 했어야 했나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린다. 나는 다른 선수들도 관찰한다. 저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뭘까? 내가 저지른 실수도 검토하면서 더 나은 대안들과 비교해본다. 무엇을 개선할 수 있을까? 시합을 하든지 훈련을 하든지 나는 항상 거기서 뭔가를 배우려고 한다. 물론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 만족하지 않았고 그런 태도가 나를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이 당신더러 최고라고 말하면 듣기 좋지 않아요?"

"그렇죠, 뭐."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당신은 최고가 아니거든요. 당신은 쓰레기예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요."

"쓰레기는 당신이지. 잔소리밖에 할 줄 모르면서. 당신이나 갈고닦으시지."

"엿 먹어."

"당신이나 엿 먹어."

 

그리고 나서 카펠로 감독은 자리를 떴다. 라커룸에 혼자 남은 나는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다양한 방향과 온갖 각도에서 슈팅을 하는 판 바스텐의 영상이었다. 판 바스텐만 계속 나와서 슈팅을 하고 그 공은 번개처럼 그물을 갈랐다. 10분인가 15분 정도 보고 나니 '언제 끝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펠로 감독이 문밖에 사람을 세워놨을까? 당연히 그럴 것 같아서 나는 영상을 끝까지 시청하기로 결심했다. 상영시간은 25~30분 정도 되었다. 이 정도면 볼 만큼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라커룸을 빠져나왔다. 솔직히 그 영상을 보면서 뭔가 배웠다고는 말을 못 하겠다. 다만 감독의 메시지는 확실히 알아들었다. 카펠로 감독의 평소 지론대로 골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늘 착하게 살지도 않았고, 늘 옳은 말만 하고 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한 결과는 모두 내가 책임을 졌다. 나는 다른 사람을 탓하는 놈이 아니다.

세상에는 나와 같은 이들이 많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지금도 야단을 듣는 청소년들이 참 많다. 물론 야단을 맞아야 할 때도 있다. 규율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스스로 역경을 헤치고 정상에 올라보지도 않은 수많은 선생이 "이렇게 해야 돼. 다른 길은 없어!"라고 확신에 차서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화가 치민다. 그것은 편협한 소리이고, 몹시 어리석은 짓이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수천 가지나 된다. 남들이 걷는 길과 달라 보이거나 조금 이상해 보이는 길이 가장 좋은 길일 때도 많다. 튄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을 나는 싫어한다. 다른 이들과 똑같았다면 나는 이곳에 올라서지 못했을 것이다. "나처럼 살아아. 즐라탄처럼 행동해라!"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길을 택하든지 자기 주관대로 나아가로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렇게 살아가려는 사람을 단지 그들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하며 진정서 따위를 돌리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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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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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자위가 핏빛이었다. 아니, 안구 자체가  푹 퍼낸 선지 덩어리 같았다. 

눈꺼풀과 눈두덩까지 자줏빛이었고 눈자위엔 고름 덩어리 같은 점액질이 들러붙어 있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끝까지 환자들을 돌보다가, 개에 물려 죽은 모녀를 발견한 수진. 화양을 활보하는 개에게 가족을 잃고 분노에 쌓여 스타를 죽인 기준. 기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늑대개 링고. 링고가 사랑한 스타와 썰매개 쿠키를 키우며 속죄하는 재형. 쿠키를 죽이고 아버지에게 복수하려는 동해. 동해가 저지른 방화에 목숨을 잃은 승아. 승아를 돌보며 자신과 날을 세우고 다투던 재형에게 빠져버린 여기자 윤주. 인구 29만의 작은 도시 화양에서 얽히고설킨 악연의 고리들은 쉽게 끊을 수 없었다. 재형, 동해, 윤주, 기준, 링고, 수진. 늑대개부터 간호사까지 총 6개의 시선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28>은 절망에 대한 이야기다. 치사율 100%에 가까운 정체불명의 인수공통전염병 '빨간 눈 괴질'이 불러온 대재앙이 시작이다. 영화 <감기>와 여러모로 비슷한 소재지만 그 중심에 '개'라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 등장하는 게 특징이다.


수진은 잠깐 멍해졌다. 개라니.... 아주 이상한 것과 직면한 느낌이었다. 어제오늘 사이에 입우너한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 DOA 환자와 관련이 있었다. 그 남자를 후송한 119구급대원, 담당 의사였던 고 선생, 응급구조사 박 선생, 김아란 간호사, 그 남자가 사는 아파트 관리인 노인, 당시 근무자 중 멀쩡한 사람은 수진과 유은지 두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근무가 아니었던 김유미는 어떻게 된 걸까.

수진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119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스테이션에서 문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야구장 전광판처럼 켜진 한 쌍의 빨간 눈을.


정유정 작가는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보며 인간의 잔인함과 돼지들의 비명을 잊을 수 없어서 빠른 속도로 <28>을 썼다고 한다. 유령도시 화양에서 '개'는 여러 가지 의미로 존재했다.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최대한 잔인하게 죽여버려야할 복수의 대상이거나(기준, 동해), 늘 곁에서 보살펴주고 삶의 이유를 제공해주는 고마운 존재이거나.(재형) 인간의 편의를 위해 선택받고 버려지는 유기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기술의 힘을 빌려 가장 약하면서도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라는 위치에서 마음껏 폭력을 저지르는 인간에 대한 경고가 <28>엔 담겨 있다. 링고의 시각에서 바라본 인간들의 무자비하고 기회주의적인 행동들을 따라가다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결코 인간은 최고의 존재가 아니며, 생각보다 선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동해는 자신의 삶이 서바이벌 게임 같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면 돌이킬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으며, 살아남는 길은 오로지 새로운 문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이라는 점에서, 첫 관문을 통과한 건 아버지의 개새끼를 죽인 날이었다. 두 번째는 입대하던 날, 세 번째는 병원을 탈출하던 새벽, 안개 속에서 총성이 울리던 그 순간이었다.


그런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인간상이 집약된 존재는 '절대악' 동해다. 잔혹한 폭력성을 지닌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동해의 처음은 나약한 아이였다. 화양의료원 내과 과장 박남철의 아들인 동해는 총명한 형, 예쁜 여동생과 달리 '숨기고 싶은 자식'이었다. 자신이 미처 갖지 못한 애정을 갈구하는 동해에게 돌아온 건 가혹한 체벌과 감금이었다. 무섭도록 외롭고 미치도록 괴로운 상황에서 결국 동해의 마음속에 괴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처음에는 군대에서 개를 죽이는 수준이었지만 고삐가 풀린 동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인과 방화까지 저지르는 악마로 변했다. 정유정 작가가 "상처받은 사람들, 욕망과 지옥을 동시에 가진 사람들을 좋아한다."는 인터뷰처럼 동해는 역설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다. 파괴와 절망의 연결고리는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화양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불이었으나 불을 대하는 안팎의 태도는 이렇듯 확연하게 달랐다. 두려움으로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만 똑같았다. 안쪽은 자신이 죽음의 손아귀에 갇혔다는 사실에, 바깥쪽은 자신에게 죽음의 손이 뻗어 올가 봐.


화양은 1980년 5월의 광주와 겹쳐 보이는 설정과 장면이 많다. 시청 앞 광장에서 살기 위해 우후죽순처럼 모이는 시민들, 시민들의 평화로운 행진과 이를 향한 공권력의 집단 발포, 암매장과 사체 유기가 횡횡하는 유령 도시, 공수부대의 포위와 언론 통제로 철저히 고립된 절망적인 상황. 더불어 SNS를 타고 흐르는 괴담만 추가되었을 뿐, 다른 지역의 반응도 무섭도록 닮았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해도 된다는 정당성의 함정에서 국가는 화양을 철저히 고립시킨다. 한편 역설적으로 '빨간 눈 괴질'보다 더 비참하고 안쓰러운 죽음은 환자가 아닌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폭행, 절도, 강간 등 무법도시로 전락한 화양에서 남은 이들이 더욱 고통스럽고 처참하다. 특히 수진이 헬맷을 쓴 폭력배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장면은 너무나 소름 끼치고 현실적이라 보기 힘든 정도였다. 간절하게 기준이 나타나 놈들의 머리통을 박살내거나, 링고가 등장해 오장육부를 찢어발겨 줬으면 소망했다. 악은 또 다른 악의 본성을 깨울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링고는 제복 남자의 등을 향해 도약했다. 제복 남자는 등 뒤의 기척을 알아차린 듯, 뒤를 돌아봤다. 물론 때가 늦었다. 링고의 이빨이 이미 남자의 턱 밑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남자는 고함과 함께 왼팔을 휘두르듯 들어 올렸다. 링고의 이빨은 턱 대신 팔뚝에 틀어박혔다. 엄니가 옷소매와 살을 한 방에 뚫고 들어갔다. 엄니를 스치는 뼈의 감촉이 잇몸 속까지 전달됐다. 뜨거운 피 냄새가 허기진 배 속을 일거에 뒤집었다. 링고는 제복 남자의 팔에 매달린 채 턱을 맞물고 고개를 흔들어서 근육을 찢어버렸다. 제복 남자의 입에서 비명이 솟구쳤다. 몸은 균형을 잃고 낚시에 걸린 고기처럼 앞으로 튕겨 나갔다. 링고는 제복 남자와 몸을 뒤얽은 채 계단참 아래로 곤두박질해서 커다란 물통을 들이받았다. 그 바람에 속도가 굴절되긴 했지만 동반 추락이 끝난 건 아니었다. 다시 계단 한 층을 데굴데굴 굴러떨어진 후 창 밑 쓰레기 더미에 내던져지듯 처박혔다.


'치밀하고 압도적인 서사, 숨 쉴 틈 없이 달려가는 문장,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

<28>의 광고 문구처럼 장편임에도 넘기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는 간호사 출신의 정유정 작가가 환자와 응급실의 분주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 것도 한몫했다. 개인적으로 정유정 작가 작품 중 <28>을 처음으로 읽어봤는데 왜 그리 영화화에 인기가 많은지 알 수 있었다. (<내 심장을 쏴라>는 이민기, 여진구 주연의 영화로 2014년 개봉했다. <7년의 밤>은 추창민 감독이 막바지 시나리오 작업 중이며, <28> 역시 판권 계약을 마쳤다.) 캐릭터 하나하나 특색이 넘치고 자연스럽게 읽는 내내 어울리는 배우들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영화 시놉시스 그대로 써도 될 정도로 자세하고 생생한 장면 구성은 가장 큰 장점이었다. 예를 들면 공수부대의 발포 직전 링고와 일대일로 맞선 기준

의 장면, 광기에 휩싸인 동해와 냉혈한 아버지 박남철이 마주한 장면 등은 영화의 명장면 같았다. 물론 초반보다 뒤쪽으로 갈수록 초반의 몰입도가 시든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분명한 건 이 책처럼 악, 절망, 폭력에 정면으로 맞선 작품은 없었고, 이런 이야기 보따리는 독자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경험할 수 있도록 강렬하고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유빈이의 이유식 숟가락이었다. 자신이 개구리 노래를 부를 때마다 어푸어푸, 소리치며 휘두르던 개구리 숟가락. 손잡이에 달린 개구리 모형 위로 아내의 목을 물어뜯는 개 떼의 아귀가 겹쳤다. 그 이빨에 안간힘을 다해 붙들고 있던 그의 통제력도 우둑 뜯겨 나갔다. 삽시에 가슴이 비었다. 충격도, 슬픔도, 절망감도 사라졌다. 머릿속엔 어둠이 내렸다. 그는 체육관을 뛰쳐나와 구조차에 올라탔다. 버들주공 공사장으로 차를 몰았다. 왜 가는지, 가서 어쩌겠다는 건지 생각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었다. 그를 움직이는 건, 텅 빈 가슴으로 폭주하는 샛노란 불길이었다. 덮치고 부수고 끝장내버리고 말 광기였다. 대상이 무엇이든 눈에 걸리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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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 - 라이언 킹 이동국 90분 축구 드라마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동국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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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87cm, 83kg.

스트라이커는 최전방에서 수비수들과 끊임없이 부딪히고 견제를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든 골대 앞에서 수비수를 이겨낼 최상의 신체조건을 타고났다.


춘계고교대회, K리그, 아시안컵, 동아시아선수권, AFC챔피언스리그 득점왕.

스트라이커는 끈질긴 노력 이상의 타고난 골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더라도 어려운 골이든, 쉬운 골이든 결국 득점에 성공한다.


A매치 101경기 32골, 클럽 467경기 204골.

스트라이커는 꾸준히 경기에 나오며 적은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청소년 국가대표 시절부터 30대가 넘어선 지금도 태극마크를 달면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내가 본 한국 공격수 중 가장 이상적인 스트라이커에 가까운 선수는 이동국이다.

제로톱, 펄스나인(False 9, 가짜 공격수) 등 최근 축구 트렌드에서 정통 공격수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점유율 중심의 축구가 유행하며 짧은 패스와 활발한 스위칭 플레이로 공격 기회를 만드는 미드필더가 최전방에 서곤 한다. 티키타카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제패한 스페인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2011 아시안컵에서 득점왕 구자철을 배출한 한국 역시 재미를 봤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스트라이커'란 포지션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다. 펄스나인 역시 믿을만한 확실한 스트라이커가 없어서 생긴 궁여지책의 전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페인처럼 자신들의 장점을 120% 발휘하기 위한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붙박이 스트라이커가 없어 미드필더 구자철을 최전방으로 올린 한국과 같은 경우가 이와 같다.) 스트라이커의 임무는 골을 넣는 것이다. 강력한 몸싸움으로 수비수를 벗겨내 헤딩으로 골을 넣든, 탁월한 위치선정으로 간결한 골을 넣든. 결국 득점에 성공해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스트라이커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선 상대의 집요한 견제를 이겨낼 탄탄하고 강력한 신체 조건과 단 한번의 기회를 골로 연결할 득점 감각이 꼭 필요하다. 


최근 에이스로 성장한 손흥민은 측면 공격수나 처진 스트라이커 자리에서 폭발적인 드리블 돌파, 과감한 중거리 슈팅으로 상대를 파괴하는 크랙 유형이다. 김신욱은 발밑 기술도 겸비한 선수로 압도적인 키를 활용해 제공권을 장악하는 타겟맨 유형이다. 박주영은 상대 수비와의 수 싸움에 능하고 기본기가 좋은 테크니션 유형이다. 하지만 이들은 내가 상상했던 스트라이커와는 다른 성향의 공격수다. 엄청난 욕을 먹지만 결국 1골로 비난을 환호로 바꾸는 선수. 최전방에서 우직하게 몸싸움을 펼치면 중요한 순간에 침착하게 골을 만들어낼줄 아는 선수. 그런 정통 스트라이커는 언제나 라이온킹 이동국이었다. (실력의 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정통 스트라이커 유형에 부합하는 정도를 뜻한다.) 항상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골로 기대에 보답했기 때문이다. 막내 이동국은 암울한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통쾌한 중거리 슈팅을 날리며 희망의 빛이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붕대를 칭칭 감고 진통제를 맞아가면서도 기어이 6골로 아시안컵 득점왕에 오르며 한국의 자존심을 지켰다. 안정환, 고종수와 K리그 트로이카를 결성하며 소녀팬들을 몰고 다니며 전성기를 누렸다. U-23 경기 31경기 22골이란 압도적인 기록도 이어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란 자서전 제목처럼 이동국의 빛보다는 그림자에 더 많은 비중이 실려 있었다. 유난히 시련이 많았던 축구선수 이동국, 인간 이동국의 담담한 회상이 담겨 있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엔트리 탈락, 2006년 무릎 십자인대 파열, 2010년 16강 우루과이전 통한의 마지막 슈팅. 최고의 찬사를 받지만 언제나 가장 외롭고 욕을 한몸에 받는 자리에서 그는 꿋꿋이 20년 넘게 버티고 있다. 게으른 천재, 똥볼 제조기, 국내용이란 온갖 비난에도 그는 주변의 편견에 흔들리지 않았다. 겹쌍둥이 아빠 이동국은 가족의 힘으로 자신만의 축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전북현대 입단 이후 최강희 감독을 만나 그 꽃을 피웠다. 프리미어리그 실패 이후 성남에서도 제대로 된 활약을 못 했던 이동국은 전북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네가 먼저 손을 들지 않는 이상 선발에서 빼지 않겠다. 10경기에서 골을 못 넣어도 널 믿겠다. 최근 2년 동안 잃은 자신감만 회복하면 넌 잘 할 수 있을 거다. 나는 네 기량이 대한민국 탑 레벨이라고 생각한다." - 최강희 감독


이렇게 자신을 믿는 감독 밑에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그리고 이런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이동국은 10년 넘게 몸에 밴 스타일을 뜯어고치며 완전히 새로운 선수로 태어났다. 2011년엔 무려 15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이타적이고 동료를 더욱 이용할 줄 아는 선수로 변했다. (22골로 득점왕에 오른 2009년엔 도움은 0개였다.) 노련미가 더해지며 상대 수비수의 신경전에 휘말리는 경우도 줄었고, 2선까지 내려와 연계 플레이에도 재미를 붙였다. 자신에게 최적화된 전술에서 결국 돋보이지 못하면 도태되기 마련인데 이동국은 부담감을 이겨내고 동료까지 살려주는 경기 운영에 눈을 떴다. 세계 최정상급인 발리슛의 비결도 동료들의 움직임, 패스 덕분이라며 공을 돌리는 걸 보면 더욱 성숙해진 걸 알 수 있다. 사실 수원 블루윙즈 입단 직전까지 왔다는 비화에 아쉬움이 무척 남지만, 사실 전북만큼 궁합이 잘 맞는 팀은 없다고 확신한다. (이동국이 아니라 이천수라니!!)


수줍음 많았던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부터 홍명보의 20번을 이어받은 포항 스틸러스, 재충전의 시기가 되었던 광주 상무, 아쉬움이 남았떤 해외리그 진출까지. 우여곡절이 가득한 그의 축구 인생만큼 인간 이동국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7년 동안 묵묵히 (군대까지!) 기다려준 아내,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잘하는 것도, 성격도 딴판인 재시와 재아, 무뚝뚝하지만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아버지 등 가족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어린 시절, 가족 이야기, 시련, 전성기 등 평이로운 구성이었지만 읽는 재미가 쏠쏠했고 묘하게 포항 레전드 황선홍과도 닮은 점이 많았다. 가장 고독하고 욕을 한몸에 받는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어가서 그럴까? 2002년 황선홍의 아름다운 마무리처럼 이동국 역시 언젠가 국가대표에서 멋지게 은퇴할 수 있길 바란다. (사실 준우승을 거둔 이번 아시안컵이 최고의 타이밍이었는데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사실 운동선수 중 시련이 유난히 많은 선수는 없다. 하지만 황선홍, 박지성, 이동국처럼 그런 시련을 이겨내고 성공으로 결실을 본 선수가 드물기에 더욱 빛나는 법이다. 그 누가 이동국을 비난한다 하더라도 그는 한국 축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훌륭한 선수다. 조급함을 버리고 여유를 찾으며 더욱 일이 잘 풀리는 그를 보며 많은 걸 배웠다. 순간순간 간절하게 목표를 향해 뛰면서도, 스스로 여유를 찾고 쉬어갈 줄 알아야 한다는 건 비단 축구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시 처음부터 착실하게 준비하면 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동국이 맞이한 제2의 전성기처럼 최고의 자리에서 웃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리그에선 얄미운 적이지만) 대한민국 축구팬의 한사람으로서 스트라이커 이동국을 응원한다. 

 

축구선수 이동국의 트레이드마크는 발리슛이다. 그 동안 중요한 순간, 큰 경기에서 터진 골들은 어김없이 발리슛이었다. 그 어려운 슛을 어떻게 그렇게 잘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발리슛은 나만 잘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도의 집중력, 순간적인 반응, 센스 있는 처리 등 내 안에 내재된 요소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알맞은 패스를 올려주고, 보이지 않는 움직임으로 나를 자유롭게 만드는 동료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찰나에 이뤄지는 그 수많은 상황이 딱 맞아떨어질 때 발리슛이 완성된다. 인생에서도 그런 아름다운 조화의 발리슛을 날리고 싶다.




축구 선수 이동국은 항상 모두의 사랑을 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나를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들만큼 시기하고 헐뜯는 이들도 많았다. 나를 믿고 신뢰하는 지도자도 있었지만, 내 능력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지도자도 존재했다. 예전엔 그런 상황이 짜증나고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내게 부정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 둘 바꿔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돌아선 마음을 다시 되돌리면 그들이야말로 둘도 없는 나의 지지자가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네덜란드 선수들이 얼마나 잘하는지 직접 부딪혀 보고 싶었다. 들어가서 상대 수비수와 한 번 부딪혔는데, 밖에서 볼 때만큼 두렵지 않았고 생각보다 힘이 대단하지도 않았다. 투입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기회가 왔다. 나는 골대에서 먼 거리였지만 상대 수비수를 밀고 들어가며 적극적으로 슈팅을 날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판 데르 사르 골키퍼를 지나 골대 위로 살짝 넘어갔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향해 날린 나의 첫 번째 슈팅이었다.




우루과이전이 끝나고 나는 넬슨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 그라운드에 우두커니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허무한 마음을 달래지 못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실패한 사람을 더 많이 만나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에 성공한 사람은 성공으로 가는 길밖에 모른다. 나중에 위기가 오면 그대로 무너진다. 실패한 사람은 왜 자신이 실패했는지 안다. 그 후에는 쉽게 실패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실패도 결국 성공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임을 믿고 싶다. 나는 시원한 비를 가슴 속에 새기며 돌아섰다.




축구 선수인 나의 영광이 숨어 있고, 노력으로 그것을 찾는 곳이라고 믿었다. 그라운드는 이제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내가 아닌 우리 모두의 가치를 찾아가는 공간, 나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공간. 때론 삶에서 받은 상처를 씻어낼 수 있는 공간. 그 그라운드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 동안 더 벅찬 감동을, 더 큰 희망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지금은 언론도, 팬들도 선수의 부상에 큰 관심을 보이고 그 선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경각심이 있지만 당시엔 그런 게 없었다. 태극마크는 진통제였다. 태극마크를 달면 아파도 그냥 뛰어야 했다. 나보다 앞서 투혼이라는 이름으로 부상을 참고 뛰며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는 선택을 해야 했던 선배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내 뒤에도 이천수, 박주영 같은 후배들이 그렇게 혹사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한국 축구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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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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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따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서울의 겨울 12

- 한강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작가 한강의 소설은 시같다는 말을 많이 듣곤 한다. 생생한 표현과 감각적인 비유가 가득 담긴 문장이 시를 닮았기 때문이다. 한강은 소설로 유명하지만 1993년 등단한 시인이다. 소설보다 시가 먼저, 그리고 더욱 천천히 씌어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시집이었다. 침묵과 암흑의 세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은 작품 안에 그런 피하고 싶은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뜨겁고도 차가운 행과 행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건 오히려 적극적인 변화의 의지가 아닌 냉정한 거리두기였다. 물론 고통의 순간을 애써 외면하는 방식이 아닌 천천히 살피며 시간의 힘을 빌리는 방식이었다. '왜 그래'란 질문으로 억지로 무언가를 고치려하기 보다는 '괜찮아'란 한마디로 고통을 그대로 가슴에 품는 것이다. 부쩍 힘든 일이 많고, 아쉬운 상황이 이어지는 하루하루.  단숨에 해결할 수는 없지만, 잠시나마 누그러질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을 외울 필요가 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이 정도면 그만이지라며 포기하고 합리화하는 '괜찮아'가 아닌, 잠시 쉬어가도 잘못된 게 아니라고 손을 잡아주는 '괜찮아'. 내 주변 사람은 물론 사회 전체에 이런 따스함이 곳곳에 물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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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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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힐링', 2014년 '의리'처럼 한 해를 되돌아보는 키워드는 언제나 의견이 분분하다. 각자 관심 분야가 다르고. 화제가 된 사건도 금세 새로운 이슈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2015년의 6분의 1이 지난 지금 사람들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단어는 분명하다. 충격적인 사건이 잊혀질만할 때쯤이면 또다른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이 터졌다. 그렇게 연결고리는 이어졌고, 2015년 키워드의 파급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박창진 사무장 땅콩회항2차공판 "모멸감으로 죽였다"...왜?
"범행 이유 뭡니까?" 판사 마지막 질문에…이지연 "모멸감 때문에" 눈물 쏟아
허지웅 '국제시장' 논란, 과거 악플 발언 눈길 "멸치 이야기에 모멸감 느껴"
경비원 분신 아파트 압구정 신현대아파트 "한 사모님의 폭언과 모멸감 때문?"

 

네티즌이 가장 많이 본 기사에는 하나같이 '모멸감'이 들어간다. 갑의 횡포, 분노조절장애, 묻지 마 범죄, 악플, 감정노동, 우울증, 자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건 사고의 근원에는 하나같이 부정적인 모멸감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자 김찬호는 '모멸감'을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는 괴로운 감정이며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을 파괴한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단순히 TV 뉴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일상에 만연해있다고 꼬집는다. 울분, 화, 분노와는 조금 다른 복잡미묘한 감정에 나, 너, 우리가 함께 힘들어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병들고 있다.


사실 '작가' 김찬호보다는 김찬호 '교수'이란 호칭이 더 친숙하다. 대학교 시절 <문화인류학>이란 교양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 느꼈던 그에 대한 인상은 무척 주변에 호기심이 많고, 권위의식보다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란 것이었다. 과제 역시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낯설게 보기'가 주어졌다. (수업의 호불호가 갈리긴 했다. 너무 자유로운 커리큘럼이라 평가의 기준이 모호하며, 준비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가 신선하고 즐거웠다.) 대학생의 언어 습관, 문과대 사물함 강제 철거 사건의 부조리함 등을 조목조목 자유롭게 짚어가는 과제가 부담보다는 즐거움으로 다가왔었다. KTX부터 찜질방까지, 한국 문화를 낯설게 보며 객관적으로 우리의 모습을 짚어낸 <문화의 발견>, '돈'이란 흥미로운 소재를 경제학이 아닌 인문학적 관점에서 비틀어 본 <돈의 인문학> 등 그의 저서도 교양 수업 커리큘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한국 문화의 특수성과 상대성을 귀납적으로 추리해가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작가였다.


미국에서 감정노동이라는 개념이 처음 적용된 분야는 항공업계다. 여러 항공사들 사이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고객들을 사로잡는 차별화 전략으로 기내 서비스 직원의 친절함을 업그레이드하는 전략이 생겨났다. 말하자면 상냥함을 '끼워 파는' 것이었다. 곧이어 다른 분야들에까지 감정노동이 확산되면서, 더 이상 끼워파는 '덤'이 아니라 당연한 상품의 속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가 되었다. 그런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감정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도 생겨났다. 그러나 감정노동의 강도 면에서 보면 미국과 한국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감정노동』을 읽다 보면, 책에 소개되는 사례들이 너무 밋밋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만일 저자가 한국의 감정노동 현장을 조사한다면, 증보판 내지 개정판을 쓰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 본문 中


그가 새롭게 주목한 <모멸감>에도 역시 수많은 사례가 담겨 있다. 감정노동의 최전방에 있는 스튜어디스, 싸이의 강남스타일 열풍에 함께한 혼혈아 등 최근 한국 사회의 실제 상황부터 <지하로부터의 수기>, <윌든>, <삼국유사> 등 명작들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소개한다. 더불어 파울 클레, 변웅필, 오귀스트 로댕 등 예술가의 그림으로 각 장의 서론을 풀어나간다. 김찬호 작가는 언어의 어원부터, 다양한 문학작품에 녹아든 모멸감,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특히 한국이란 특수한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모멸감의 향연을 조목조목 짚어나간다. 그리고 이번 책에는 특이하게 CD도 함께 담겨있었다. '감정의 찌꺼기', '모욕의 응어리', '거머리 행진곡' 등 제목만 들어도 찝찝한 곡들이 10곡씩이나 담겨 있다. 저자의 텍스트를 읽고 받은 느낌을 소리로 표현한 프로젝트인데 사실 한 번 듣고 그리 유쾌하지 않아서 여러 번 돌려 듣지는 않았다.

 

모멸감의 위험성은 바로 전염성에 있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와 응어리를 자기를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또 다른 약자에게 모멸감을 전이시킬 수 있다. 그리고 약자와 강자를 구분 짓는 가장 흔한 요소가 바로 '경제력'이 돼버린 게 자본주의 사회다. 갑의 횡포를 당하는 '을'도 을의 횡포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알바몬'의 최저임금법 CF에 집단 반발한 소상공인들이 대표적인 예다. (혜리의 애교가 섞인 CF는 공익광고 이상의 파급력을 뽐냈다.) 자신들은 대기업의 여러 계약에 묶여서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24시간 영업, 제품 밀어내기 등을 해야 한다고 울상을 짓지만, 그 아픔을 자신보다 더 경제력이 약한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고 있다. 법으로 정한 시급을 주기 싫으면 아르바이트를 쓰지 않으면 그만인걸, 관례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말도 안 되는 보수를 주면서 '아프니깐 청춘이다'란 헛소리로 세뇌시키는 '열정페이'가 있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은 폭탄 돌리기처럼 남에게 번지기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모멸감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감정과 나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감정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서 독립적을 자라나는 생명체 같은 존재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다. 서로 힘을 겨루면서 맞서고 있는 '타자들'이다. 승부는 당연히 힘에 좌우되고,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세진다. 먹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감정에 많이 머무는 것, 즉 그런 감정을 유발하는 상황에 자기를 노출시키거나 그런 사건이나 인물을 계속 생각하는 것 등이다.

- 본문 中


'부러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자.'

외모지상주의를 꼬집은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나온 글귀를 나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 남의 시선에 가슴앓이하기 보다는 자존감을 가지고 주체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비교'를 멈추어야 한다. 신이 아닌 이상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그에 못 미친다고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는 일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그를 뛰어넘기 위해, 아니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그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타인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다면.) 감정의 주인이 되려면 감정과 나를 동일시하지 말고 독립적으로 자라나는 생명체로 다루어야 한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로 세상이 존재하기 마련이니 자기를 주의 깊게 성찰하는 노력이 제일 먼저 필요하다.


첫째, 구조적인 차원에서 접근이 요청된다.

둘째, 문화적인 차원에서 접근을 생각해야 한다. 

셋째, 개인의 내면적인 힘을 키워야 한다.


저자 김찬호의 맺음말에서 우리는 '모멸감'이 만연한 병든 사회를 치료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생존'과 '정의'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21세기에 '자존'의 문제는 가장 큰 화두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며, 행복은 우월감이 아니란 사실을 언제나 되새기며 격조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약육강식과 승리에 몰두하기보다는 여유와 배려로 함께 사는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멸감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건 결국 이런 자존감이 높고 깨어있는 사람이다. 이들이 모여 더불어 행복한 문화를 만들고, 이는 사회 구조적인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도전은 아니다. 그러므로 함께 고민하고, 그 고민을 나누며,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물론 작은 실수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깔깔대는 정도는 동심의 발현이고,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유쾌함이다. 그러나 일정 선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는 경우가 많다. 어찌할 수 없는 신체적인 약점이나 장애 또는 불우한 가정환경 등을 부각시키거나 성적인 수치심을 자극하면서 키득거리는 것은 당사자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심어준다. 동기는 가볍지만 결과는 중대할 수 있다. ‘유희‘와 ‘희롱‘, ‘노는 것‘과 ‘놀리는 것‘ 사이의 간격은 의외로 좁다.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굴욕감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바로 소비시장이다. 개처럼 벌었지만, 정승처럼 쓰고 싶다. 돈 벌면서 받은 ‘천대‘를, 돈 쓰면서 받는 ‘환대‘로 덮어씌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만만치 않다. 최소환의 신체적인 안락을 위한 소비라면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 수 있지만, 끊임없이 비교가 이루어지는 소비사회에서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자꾸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소통에는 정성이 중요하다. 정성이란 몸과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 몸으로 함께 있는 사람이 내게 온 마음을 기울여줄 때 자신의 존귀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 않고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경청하고, 하나 마나 한 말들만 늘어놓으면 자존감이 상한다. 그렇게 겉도는 만남과 대화 속에서 심성은 자꾸만 건조해지고 냉랭해진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사소한 부주의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져 섭섭한 감정을 자아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신승리법‘이 초래하는 자가당착, ‘긍정의 배신‘을 늘 조심해야 한다. 때로는 타인의 모욕을 받으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도 있다. 경멸은 자기의 정체를 비춰주는 시선이 될 수 있다. 『서준식 옥중서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타인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욕구는 엄청난데 서로를 인정해주는 너그러움은 부족하다. 웬만큼 잘나지 않으면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여기에 저성장으로 인해 생존의 기반마저 흔들리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은 더욱 실현이 어려워 보인다. 거기에서 비롯되는 결핍과 공허를 채우려고 갖은 애를 쓰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취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타인에 대한 모멸이다. 누군가를 모욕하고 경멸하면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모멸은 모멸감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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