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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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따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 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서울의 겨울 12

- 한강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작가 한강의 소설은 시같다는 말을 많이 듣곤 한다. 생생한 표현과 감각적인 비유가 가득 담긴 문장이 시를 닮았기 때문이다. 한강은 소설로 유명하지만 1993년 등단한 시인이다. 소설보다 시가 먼저, 그리고 더욱 천천히 씌어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시집이었다. 침묵과 암흑의 세계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은 작품 안에 그런 피하고 싶은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뜨겁고도 차가운 행과 행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건 오히려 적극적인 변화의 의지가 아닌 냉정한 거리두기였다. 물론 고통의 순간을 애써 외면하는 방식이 아닌 천천히 살피며 시간의 힘을 빌리는 방식이었다. '왜 그래'란 질문으로 억지로 무언가를 고치려하기 보다는 '괜찮아'란 한마디로 고통을 그대로 가슴에 품는 것이다. 부쩍 힘든 일이 많고, 아쉬운 상황이 이어지는 하루하루.  단숨에 해결할 수는 없지만, 잠시나마 누그러질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을 외울 필요가 있다.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이 정도면 그만이지라며 포기하고 합리화하는 '괜찮아'가 아닌, 잠시 쉬어가도 잘못된 게 아니라고 손을 잡아주는 '괜찮아'. 내 주변 사람은 물론 사회 전체에 이런 따스함이 곳곳에 물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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